[Opinion] 책 '다른 방식으로 보기'

예술의 불평등에 반항하라
글 입력 2017.10.14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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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
예술의 불평등에 반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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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cent van Gogh, Wheatfield with Crows, 1890
혹은, '고흐가 그린 마지막 그림.'
일부 연구가들은 고흐가 이 밀밭에서 자살했다고 주장한다.



1. 예술품의 감상은 순수하지 않다.

인간은 시각정보를 ‘보고’,‘판단’한다. 회화도 감각기관을 통해 뇌로 흘러들어 오는 시각정보다. 감동을 하나의 정서로 생각해보면 더 와닿을 것 같다. 샥터-싱어의 2요인 이론은 정서(emotion)가 신체적 반응과 그것을 어떤 감정으로 해석하는 인지적 반응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러한 이론은 미술에서 느끼는 감동과 차이가 있기 때문에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실 필자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감정에 ‘인지’가 끼어드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밀려들어오는 감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판단 전에 그러한 감정이 떠밀려 왔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이 쌓아 만들어낸 무의식의 결과물일 것이다. 꼭 이렇게 돌려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단순히 좋아하는 작품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 스스로에게 왜 그 작품을 좋아하는지 끊임없이 묻다보면 그럴듯한 이유가 나온다. 즉, 감동이란 인지적인 과정의 산물이다. 존 버거는 이러한 경향을 반 고흐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우리는 밀밭 그림과 ‘죽기 직전에 그린’ 반 고흐의 그림에 다른 영감을 받는다. 왠지 이런 테스트는 우리가 갖고 있는 예술의 신비성을 깨 부수는 것 같다. 왜냐면 일반적으로 예술은 항상 뭔가 신비롭고 좀 더 ‘특별한 ' 것으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미술 감상은 인지를 뛰어넘은 어떤 영감을 주는 것으로 묘사된다. 탁월한 사물에 대해 느끼는 심미성은 마법 같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예술이 애매모호한 영역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들하지만 저자는 결코 예술작품이 위선으로서만 수용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시각정보를 보고 판단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대신 그는 예술에 씌여지는 수많은 의도와 예술의 신비성을 꼬집는다. 의도가 신비성으로 덮어질 때 예술은 정치적 공작으로 탈바꿈한다.


 
2. 예술에 숨겨진 권력의 언어

예술는 하나의 언어다. 최소한 어떤 정보를 ‘예술’로 만들어 놓는 것은 언어다. 이러한 특징은 현대의 개념미술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언어가 사회적인 도구인 것 처럼 회화도 사회적인 도구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이 어떤 의미를 가진 도구로서 수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존 버거는 예술의 사회적 특징이 그 사회의 강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이 메시지는 몇 십년이 지난 오늘날 더 강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오늘날 소비되는 수많은 광고 자체도 그의 메시지를 충실히 반영하지만, 기존 예술도 고급화되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는 신비화된 고급문화다. 현대사회의 젊은 세대들은 ‘문화세대’라고 불리며 자유롭게 문화 속을 횡단하지만, 무의식적으로 고급예술과 대중문화를 분리시킨다. ‘고급예술’이라는 단어는 예술이 권력과 관련되어있음을 충실히 입증하고 있다. 이처럼 회화는 수많은 권력의 포장지에 쌓여있다. 그것들은 그렇게 함으로서 그 누구도 비판할 수 없는 어떤 신성한 것으로 바뀐다. 미술사를 펼치면 회화를 나누는 것은 표현 방식이다. 어떤 평론가들은 감상대신 전문적인 용어만 잔뜩 쓰여진 글을 쓴다. 예술을 감상하는데 우열이 있는 것 마냥, 지식이 감상을 압도할때 ‘전문가’와 ‘비전문가’는 나뉜다. 예술품을 감상하는데 어떤 특정한 지식과 계급이 필요한 것 처럼 만든다. ‘매너리즘’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와 같은 수많은 단어는 분명 고전의 가치를 보전한다. 그리고 미술이라는 문화의 역사를 분류하고 기록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하지만 감상을 위해서가 아닌 특정 집단의 권력을 위해서 봉사할 때, 예술은 혁명성을 잃는다. 미술의 고급화는 그 안의 콘텐츠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 역시 차단하곤 한다. 과연 포장지에 쌓인 콘텐츠는 정말 비판없이 ‘숭배’할만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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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ouard Manet, Olympia, 1863


고전부터 현대예술까지, 권력과 자본은 예술가를 종종 권력의 도구로 사용했다. 미술에서 후원자 개념은 오래되었다. 후원자가 있는 이상 예술은 후원자가 바라보는 세계를 그릴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회화는 부조리를 아름답게 그려낼 수도 있다. 책에서 지적한 수많은 불평등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다가왔던 것은 대상으로서의 여성이었다. 여성은 당시 권력자인 남성을 위해 성적욕망을 자극하는 은근한 눈빛을 보낸다. 그녀는 그녀와 함께하는 남성에게 시선을 던지는 대신 회화밖에 존재하는 그녀의 소유자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낸다. 작가가 말했듯, 남성과 여성의 위치를 바꾸면 그림 속 여성이 얼마나 형편없는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회화에서 나타난 여성의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 할때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올랭피아>가 비교된다. 하지만 올랭피아조차 여성은 창녀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올랭피아가 혁명이었다면, 그것은 남성 관객들 간의 혁명이었을 뿐이다. 여성의 육체와 누드는 명백한 차이를 가진다. 철학적으로 접근해보면 여성의 육체는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여성의 발가벗은 몸은 그저 그녀 자신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가 미친듯이 찍어내는 광고를 볼 때 여성이 정말 올랭피아에서 벗어 났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오늘날 남성들은 여성들을 ‘꾸미기 좋아하는 존재’로 보거나, 그렇게 하는 것을 ‘자기관리’라고 부른다. 밖에 나가면 수많은 여자들이 거울에 서서 화장을 고치고 있다. 과연 그것은 정말 거울일까, 쇼윈도우 일까?


 
3. 예술에 진보에 기대 새로운 언어를 쓰자

권력에 봉사하는 예술은 여성의 육체가 아닌 ‘누드’를 그리게 했고, 철학이 아닌 ‘자본’을 그리게 했다. 작가는 예술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함으로서 현명하게 문화를 받아들이라고 했다. 따라서 필자 역시 예술의 가능성을 믿는다. 물론 오늘날에도 예술의 문제점은 반복되고 불평등을 아름다운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정치의 예술화지, 예술의 정치화가 아니다. 수많은 갤러리와 대안공간에서 권력에대한 저항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대중이 진정으로 예술의 허레허식을 걷어내고 기존 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다면 예술은 진정으로 자신의 역할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새로운 언어로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이렇게 정신적인 부분에 자리잡은 예술은 평등과 자유의 도구로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예술은 권력자의 언어가 아니라, 가치의 언어다.


[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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