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 이 곳에서 나간 우리는 어차피 서로를 해치며 살아갈 텐데, 앨리스. - [전시]

일곱 살에서 멈춰라! 하지만 이젠 너무 늦었어
글 입력 2017.09.09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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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내가 선호하는 '꿈'이란 이런 것이다.



내 얘기를 남에게 하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쥐들 때문에 그래요.
율겐은 재빨리 말했다. 사내의 굽혀진 다리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쥐들 때문이라고?
예, 쥐들이 죽은 사람을 먹잖아요. 사람 말예요. 그놈들은 그렇게 사니까요.

누가 그러던?
우리 선생님.

그래서 넌 지금 쥐들을 지켜보고 있는 거냐? 사내가 물었다. 쥐들을 지켜보는 건 아니죠! 아이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 동생이 저 아래 누워 있어요. 율겐은 손에 쥐고 있던 나무 막대기로 허물어진 벽을 가리켰다. 우리 집은 폭격당했어요. 갑자기 지하실 불이 꺼졌죠. 그리고 동생이 없어졌어요. 나는 그 아이를 불렀어요. 그 애는 나보다도 훨씬 어렸죠. 겨우 네 살이었으니까요. 틀림없이 여기 있을 거에요. 나보다도 훨씬 어린애거든요.

사내는 소년의 더벅머리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 너희 선생님은 쥐들이 밤에 잔다는 사실은 아예 말하지 않으시든?
아뇨, 그런 말 하지 않았어요.

힘없이 말하는 율겐은 갑자기 피곤해 보였다.
음, 선생님이 그런 걸 모르신다고 해도 선생님이긴 하지. 사내는 말했다.

밤에는 쥐들도 잠을 잔단다. 밤엔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도 좋단다. 놈들은 밤에는 언제나 자니까. 어두워지기만 하면 말이다.

-볼프강 보르헤르트, 『쥐들도 밤에는 잠을 잔다』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이라면 꿈을 꿀 수 있는 자격 정도는 줘야 하는 게 아닌가. 특히 그 사람이 영원히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면 말이다.

상실은 시시각각 일어나고, 인간은 현실을 마주한다. 그러나 약한 척 할 필요 없다. 인간은 현실을 지어 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으니까.



1. 설치 미술의 놀이 공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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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 공원의 아름다움은 현실과 동떨어진 세상이라는 점에 있다. 놀이 공원은 할 수만 있다면 하늘섬에 지어야 한다. 같은 의미에서 놀이 공원은 신비한 통로가 있어야만 한다. 마치 아무도 모르는 지하 수로 같은 곳 말이다. 나는 그 통로가 신비롭게 반짝, 거리는 것을 보았다.

놀이 공원의 목적은 '놀이 추구'에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은 현실과 놀이공원을 나눈다. 왜냐하면 놀이 공원은 놀이'만' 추구하기 때문이다. 만일 놀이 공원에서 '일'을 하자고 한다면 이상하게 쳐다볼 것이다. 사람들이 흥밋거리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예쁜 것을 즐기고, 아무도 무표정이지 않은 곳. 아니, 웃어야만 하는 곳. 앨리스 전시회는 그런 곳처럼 보인다. 마치 놀이 공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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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놀이 공원의 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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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독특하게도 이 전시회는 놀이 공원의 절대적인 행복을 부인한다. 마치 부푼 풍선처럼 땡땡해 보이는 행복을 굳이 찢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찢어진 행복 앞에서 멈칫한다. 이 찢어진 행복을 어디에서 봤더라, 하고 곰곰히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놀이 공원은 다시 전시회로 돌아 온다. 현실과 환상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앨리스 동화'를 상상하고, 해석해서 나름의 일러스트와 구성을 이끌어 낸 어떤 전시회로 말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앨리스 텍스트'가 있다. 즉, 글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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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상과는 다른 이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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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속 세계를 구현한 이 전시회는 입장과 동시에 스스로를 '세상과는 다른 이 곳'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어쩌면 이 전시회 내의 공간이 마음에 들면 들수록, 그러니까 이상적이면 이상적일수록, 현실은 이 곳과 정반대라는 함의를 주는 것만 같다. 그 어떤 것도 이 곳으로부터 가지고 나갈 수가 없다. 언벌스데이, 즉 일상을 선물처럼 여기는 다정한 사람들을 마주하고, 글자들을 선물로 받고, 이별해야 한다. 글자들은 다만 둥둥 떠다닐 뿐이다. 그렇다면 이 곳은 잔혹 동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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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은 일상과 닿아 있고
어떤 꿈들은 현실이 됩니다.

플레이모빌로 표현된 세상 속 앨리스는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했고
마침내 노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환상과 현실의 경계 위에서
꿈을 꾸며 살고 있습니다.

그 속에는 저의 모습이 있었고,
그것은 아마 우리 모두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 환한별 (플레이모빌 부분 전시)
<앨리스와 엘리스>



아마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저 외로워서 뭉쳤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많은 것들을 잃었기 때문에 외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롭기 때문에 내 외로움은 별 수 없었다. 그렇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나는 외로웠다. 그래서 외롭지 않은 환상 속의 그 곳을 닮은 이 곳에서 눈을 반짝이게 되는 것이다. 마치, 꿈의 실재성 같아서.

환상은 먼지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있으면 생길 수 밖에 없는 게 먼지라고 우리 할머니가 그랬다. 먼지는 아무도 손대지 않는 오래된 것을 따뜻하게 안아 준다. 그렇지 않을 때는 세상을 별처럼 부유한다. 먼지가 햇빛에 산란한다는 과학책 문장을 나는 좋아한다. 그런 먼지를 요정처럼 보고 있으면, 세상은 물 속 젓가락처럼 어긋난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못하는 어린 소녀에게 그런 꿈이 무슨 상관인가. 전쟁에서 죽은 자기 동생을 쥐로부터 지키려는 어린 소년에게 그런 어긋남이 무슨 소용인가. 이 곳에서 나간 우리는 어차피 서로를 해치며 살아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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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de Home, Nicholas Britell - Moonlight OST
End Credits Suit , Nicholas Britell - Moonlight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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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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