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에 대하여 - < 트로이의 여인들 >을 중심으로. [예술철학]

예술은 소비자의 눈이 만든다
글 입력 2017.08.31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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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 트로이의 여인들 >)


 < 트로이의 여인들 >은 전쟁 후 패전국 트로이에 남은 여인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녀들은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이 무기력하게 승전국에 끌려가 남은 삶을 굴욕적으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여인들은 목숨을 구걸하지도, 더 좋은 곳에서 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극에서 보여준 '인간의 존엄성'은 그녀들이 승전국에 끌려가는 그 순간까지도 '트로이'의 사람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고수했다는 데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이들은 사회적 약자, 피억압자임에도 주체이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들은 창씨개명을 해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의 이름을 고수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상태였고 이들은 총칼을 들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혜택을 거부하고 비참할지언정 조선인으로서 살아가고자 했기에 존엄하다.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꼭 총칼을 들고 적을 짓밟아 승리를 쟁취하는, 소위 남성성의 모습을 보이는 것만이 존엄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저 묵묵히 시대가 허락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위대하게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최근 인터넷상에서 < 트로이의 여인들 >의 내용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비판의 논지는 대개 '결국 운명론적으로 순응하는 태도가 과연 존엄한가?'라는 것이었다. 대부분 극에서 남녀평등을 신조로 하는 '페미니즘'에 대한 성찰이 서려있기를 기대했다가 실망한 이들의 글이었다. 아마 그들은 이 극이 '여성'을 주체성을 갖춘 주인공으로 앞세우고 있기 때문에 주인공들이 무언가 '행동하는' 인물상이기를 바랐다고 생각한다. 연극에 대한 많은 리뷰 글에서 비슷한 반응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을 비판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당연히 모든 사람의 의견은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우리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볼 때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에 대해 떠오른 생각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여성이 처한 현실에 대해 고발하고 여성 해방과 페미니즘을 외치고자 하는 욕구. 하지만 이러한 욕구는 여성을 피해자의 범주에 가둬놓거나,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 굳이 '남성적인' 방법으로 투쟁하여 승리하는 모습을 보고자 하는 뒤틀린 욕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많은 영화가 이 소비 욕구를 반영하지만 그것은 때때로 부자연스러움과 억지스러움을 내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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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원더우먼 >(2016). 출처 : 구글 이미지)


 이를테면 영화 < 원더우먼 >(2016)과 < 고스트 버스터즈 >(2016)가 그렇다. 원더우먼은 반신(Demi-God) 여성들인 '아마조네스' 부족의 공주였지만 자신의 사명을 위해 인간 세계로 오자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들로부터 무시와 조롱을 받는다. 하지만 그녀는 우직하게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 원더우먼의 경우 피해자로서 '남성권력'에 대해 대항하는 인물은 아니며, 딱히 자신에 대한 선입견에 불만을 느끼는 인물도 아니다. 원더우먼은 선과 악의 전통적 대립에서 정의의 상징으로서 아쉬울 것 없이 싸운다. 그녀의 경우 설정상의 몇몇 이유(아마조네스 부족, 사랑의 상징 등)를 제외하고는 딱히 여성일 이유가 없는 인물이다. 아무리 반신이라고 해도 물리적으로 강한 힘을 가진 여성을 성차별 타파의 아이콘으로 삼기는 어렵다. 애당초 신체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월등한 힘을 갖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에 비현실적인 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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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 고스트 버스터즈 >(2016). 출처 : 구글 이미지)


 고스트 버스터즈 역시 마찬가지이다. 원래 남자들이 주인공이었던 영화였으나, 2016년에 여자 주인공들을 앞세운 설정으로 리메이크되었다. 이 영화는 그간의 고정된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을 뒤엎고 일종의 '미러링'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호평과 악평을 동시에 받는다. 사실 고스트 버스터즈의 경우에도 '여성이기에 가능한 서사'라는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영화도 많은 작품에서 남성과 여성에게 주어졌던 역할을 그대로 뒤집은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신선하지만, 한편으로는 어색하고 이질적이다. < 원더우먼 >과 < 고스트 버스터즈 >, 두 영화 모두 개연성 없이 남성에게 당연히 주어지던 역할을 그대로 여성에게 옮겼다는 사실 하나로 화제가 된 작품들이다. 비슷한 한국 영화로는 비교적 최근 영화인 < 악녀 >(2017)가 있다. 예측 가능하듯 여성 = 사랑(모성애) = 피해자 = 복수의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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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미씽 : 사라진 여자 >(2016). 출처 : 구글 이미지)


 물론 역사를 반영하고 시대를 고발하기 위해 여성의 위치를 그대로 드러내어 두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 한공주 >, < 미씽 : 사라진 여자 > 등의 영화는 많은 여성이 처한 안타까운 현실을 구현하여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사는 데 성공했다. 특히 여성이 주인공인 한국 영화나 연극에서는 여성을 피해자, 남성을 가해자의 구도에 놓거나 여성이 처한 불리한 현실에 대해 다루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난히 많다. 연극의 예시로는 < 아름다운 사인 >, < 환영 >, < 진홍빛 소녀 > 등이 있다.

 여러 가지 시도들이 반영하듯, 이런 소비의 욕구는 당연하다. 그러나 우린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그 "신여성"의 모습이, 투쟁과 승리가 남성적인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그리고 여성에게 그런 남성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앞서 말했듯 승리는 남성적인 것만이 아니다. 때로는 그 자리에 "트로이인"으로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여기서 잠시, 이 글이 '여성은 나약하고 힘이나 권력과는 거리가 먼 인물형이며, 남성은 강하고 힘과 권력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고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글의 요지는 우리가 어느 순간부터 그 수준을 넘어 여성을 '피해자, 나약하고 무력한 존재, 그럼에도 남성성을 발휘하여 비현실적인 힘으로 이겨내야 하는 자'에 고정하고 있지는 않느냐는 것이다. 여성이 작품에서 도구 역할을 벗어나 주체성을 부여받게 되는 것과 남성이 해오던 역할과 인물형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는 것은 다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과거에 있든 현재에 있든 우리는 모두 한 "개인"이다. 한 개인, 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샌가 어느 영화나 연극의 주인공이 '여자'라는 사실만으로 그녀가 고단하고 불리한 상황에 처해있으며, 이 억압받는 상황에 대해 울부짖든지 비현실적인 힘으로 맞서든지 할 것이라고 미리 짐작하고 기대해버린다. 이것이야말로 여성을 가둬두는 게 아닐까 싶다. 여성이 고난을 극복할 방법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다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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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 아가씨 >. 출처 : 구글 이미지)

이런 관점에서 영화 < 아가씨 >는 좋게 평가된다.
남성에게 종속되온 여성의 위치를 현실적으로 반영하면서도,
그들의 주체성을 개연성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아름답게 표현해냈기 때문이다.


 시대적 한계, 성차별, 여성의 비극.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왔고 어느 시대에나 고발되어야 하며 어느 시대에나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이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여성과 여성을 다루는 예술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인간과 여성을 따로 놓고 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눈으로 여성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하여 또 다른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그런 눈으로 보고 기대하면 그런 예술만 생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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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 출처 : 구글 이미지)



"...시몬 드 보부아르는 또한 여성이 오로지 남성과 유사해지는 경우에 한해 대등하게 평가받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여성의 평등을 주장해온 사람들마저도 여성이 남성과 똑같이 될 수 있고 해낼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평등을 요구해왔다는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이러한 주장이 여성과 남성이 다르다는 사실을 무시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 < 철학의 책 >, 윌 버킹엄 외 공저



 그런 의미에서 여성을 틀에 가두는 것은 남성뿐이 아니다. 여성 또한 여성의 역할을 고정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예술을 통해 여성이 겪는 현실을 고발하고 그 현실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욕망이며 지향되어야 한다. 하지만 진정 우리가 원하는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성을 인간으로 보는 예술이 더 많아져야 할 것이다. 여성을 '여성'이라는 고정된 이미지 안에만 가둬놓는 것에서 벗어나, 그들에게 '인간'으로서의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해야 한다. 예술에서 여성을 떠올렸을 때 더 이상 희생자 혹은 신여성의 이미지로만 제한되는 것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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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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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Bernard
    •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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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ladyJ
    • Bernard댓글 감사합니다 ^^
    •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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