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리고 1년이 지났다 [문화전반]

강남역사건 그 후의 이야기
글 입력 2017.05.19 18:12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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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7일



  1년 전 5월 17일, 강남역 근처 화장실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다. 공용화장실에서 남자 6명을 보내고 난 후 여자가 들어오자 저지른 범죄였다. 가해자는 범행동기에 대해 '평소 여성들이 나를 무시했다'고 진술했다. 가해자의 행태로 보나 범행 동기로 보나 여성을 표적으로 한 여성혐오범죄였다.

  사건 후에 피해자를 추모하는 행렬이 잇따랐고 수많은 포스트잇이 강남역에 붙었다. '오늘도 우연히 살아남았다' 라고 적힌 포스트잇에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 뿌리깊게 박혀있던 여성혐오에 대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억눌려있던 수많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느껴야 하는 불안함과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이들의 공감 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슬퍼하고 분노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 범죄를 그저 정신질환자가 저지른 '묻지마범죄'로 규정하며 분노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 사건 자체가 주는 파장도 컸지만 더 큰 파장은 이 사건 후 사람들의 엇갈린 반응들이었을 것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당연한 분노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해하지 못할 유별남이라는 사실에 절망했다. 분노와 절망은 변화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했고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7년 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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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정치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3위에 오른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

 
  그리고 1년이 지났다. 지난 1년을 뒤돌아보면 변화는 분명히 있었다. 크고 작은 페미니즘 행사와 강연회가 열렸으며 문화계에서는 SNS를 중심으로 이전에 없던 '성폭력 폭로' 운동이 일어났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도 페미니즘에 쏟아진 뜨거운 관심을 찾아볼 수 있었다. 교보문고의 2016년 정치 사회분야 베스트셀러 30권 중 5권은 페미니즘 관련 책이었고 가장 최근인 2017년 4월의 정치 사회분야 베스트셀러 역시 20권 중 6권이 페미니즘 관련 도서였다. (출처:교보문고 홈페이지) 그 뿐만이 아니라 예전같으면 문제없이 넘어갔을 연예인이나 정치인의 발언들, 텔레비전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 속 내용들이 여성혐오를 내포하고 있다는 지적을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았다.

  이러한 변화들의 가장 큰 성과는 새로운 언어를 얻었다는 것이다. '여성혐오'는 단순히 여성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타자화하여 어떤 틀에 가두려 하는 모든 사고방식과 행위를 총칭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많은 여성들이 생활 속에서 느끼던 불편함을 '여성혐오'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동안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던 '페미니스트',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성차별에 대항하는 유력한 수단이 되었다. 새로운 언어는 새로운 생각을 하게끔 했고 새로운 생각은 다시 새로운 행동으로 이어졌다. 현재는 대통령이 된 대선후보가 유세기간 동안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처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겁고 거대해 절대 굴러가지 않을 것만 같던 공을 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썼고 공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가피한 충돌



  변화에는 늘 충돌이 따르는 법이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그 목소리를 조롱하고 무시하고 심지어는 깔아뭉개는 목소리도 커졌다. 우리 사회에 성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페미니즘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부터 페미니즘이 필요하긴 하지만 지금 한국의 페미니즘은 진짜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까지 다양하다. 특히 후자의 경우 자신의 입맛에 맞게 '진짜페미'와 '가짜페미'를 구분하며 과거 '김치녀'라는 말로 여성에게 프레임을 씌웠듯이 이제는 페미니즘을 하는 사람들에게 '메갈'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려 한다. 눈에 보이게 직접적으로 페미니즘을 조롱하는 사람들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지금 여성들이 그토록 절실하게 페미니즘을 외치며 분노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채 '남혐 여혐 모두 나빠요 우리 사이좋게 지내요' 라고 말하는 속 빈 평화주의자는 앞서 언급한 사람들만큼이나 유해하다. 이들은 소란이 싫어 교묘하게 현 상태를 유지하려 하는 쪽이다. 페미니즘을 둘러싸고 페미니즘 외부에서 일어나는 충돌못지 않게 페미니즘 내부에서 일어나는 충돌도 빈번하다. 여러 사안에 대해 같은 페미니스트이지만 서로 생각이 달라 연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이미 변하기 시작했다. 1년 동안 한 사람, 한 사람의 변화가 뭉쳐 사회 전체에 가져온 변화는 유의미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게 될수록 페미니즘 바깥에서 펼쳐지는 터무니없고 비논리적인 주장들은 점점 힘을 잃어갈 것이다. 그리고 페미니즘 내부에서 일어나는 충돌의 경우 이분법적이고 획일적인 사고를 지양하는 페미니즘의 성격을 고려할 때 오히려 반드시 필요한 현상이다. 페미니스트라고 모두 한 목소리를 낼 필요는 없다. 책 <여성혐오, 그 후 우리가 만난 비체들>에서는 '소란스러운 연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건강한 페미니즘은 다양한 목소리가 한 목소리에 묵살당하지 않고 서로 공존하는 형태이다. 페미니즘은 그 내부에서 각자의 다름을 존중하고 의견을 교환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페미니즘이 더 이상 필요없는 세상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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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7일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던 강남역사건 1주기 추모행사의 제목은 '우리들의 두려움은 용기가 되어 돌아왔다' 였다. 1년 간 두려워하고 분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용기를 내어 공부하고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한발짝 나아갈 수 있었다. 누군가는 '그만 좀 해라' '유별나게 굴지 좀 마라' 라고 하겠지만 새로운 지식과 언어를 습득해 이전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사람들은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원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페미니즘의 정의도 사람에 따라 다양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단순히는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 안전하게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는 세상, 더 나아가서는 한쪽이 다른 쪽에 의해 '대상화', '타자화'되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 페미니즘으로 재정의된 세상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더 많은 색이 선명하게, 그리고 함께 존재하는 세상일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무엇보다도 이미 모든 사람들이 페미니스트처럼 생각하고 페미니즘적 사고가 당연해진 세상이여서 더 이상 '페미니즘' 이라는 말이 무효하고 필요없는 세상이야말로 모든 페미니스트들이 원하는 세상이 아닐까 싶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더 예민해져야하고 더 목소리를 내야한다. 앞으로 매 해 5월 17일이 될 때마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때마다 1년 전보다는 좀 더 나은 세상이 되어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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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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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4
  •  
  • 고민
    •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 현상과 이후 페미니즘에 대해 잘 지적해 준 것 같습니다. 사람들 각자 자신에 맞는 페미니즘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생각을 이야기하며 이해한다는 부분이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또한 "한쪽이 다른 쪽에 의해 '대상화', '타자화'되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라는 궁극적인 부분을 지적해 주신것도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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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갈매나무
    • 2017.05.31 22: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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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민피드백 감사합니다! 구체적인 부분을 언급해 주셔서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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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yeonjg
    • 우리는 모두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조금 더 불편해하고 예민해져야겠죠. 조금씩 세상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더 나아질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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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매나무
    • 2017.05.31 22:4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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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yeonjg댓글 감사합니다. 맞아요 저도 세상이 조금씩 더 좋아질거라 믿어요 그러기 위해 저부터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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