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물에 흠뻑 젖은 옷처럼 무거운 관계 - 상처투성이 운동장

글 입력 2016.12.29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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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보고 난 뒤의 감정부터 설명해보자면, 초반쯤은 퍽퍽한 호밀빵에 크런치한 땅콩잼을 잔뜩 발라 한 입에 먹은 느낌과 같았다. 맛있지만 목이 콱 매여서 새콤달달한 오렌지 주스가 필요한 그 기분.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갈수록 마요네즈 잔뜩 든 햄버거를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기분, 크림 스파게티를 너무나 맛있게 먹는 친구의 모습을 보는 기분으로 변해갔다. 햄버거와 크림 스파게티를 예로 든 이유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음식들이니까. 그만큼 이해하기 어렵고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상처를 치유하고 받아들이는 이야기보단 불통의 이야기처럼 다가왔달까. 
  
연극의 두 주인공인 케일린과 더그의 첫 만남은 양호실에서부터 시작된다. 몸이 아파 양호실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8살의 케일린. 그녀는 어느 날 지붕 위를 올라가다 떨어져 다친 더그를 만난다. 그날 이후로 30년간 이어지는 서로의 길고 긴 인연. 뒤섞인 시간의 흐름을 따라 8→23→13→18→28→33→38살의 순으로 이어지는 이들의 만남은 언제나 상처와 사고로 이뤄진다. 케일린의 말처럼 저능아 같은 사고를 몰고 다니는 더그. 폭죽이 눈에 들어가 실명하게 되고 벼락을 맞아 혼수상태에 빠지는 등 그의 몸은 자학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혹사당한다. 그가 이처럼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내는 이유는 아마도 케일리를 위함이었으리라. 토악질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창피해 날을 잔뜩 세우는 13살의 케일리 옆에서 더그는 함께 토악질을 한 뒤 씩 웃어준다. 바보처럼. 
  
내가 너 보살펴줄 수 있어 
-더그-
  
네가 백만 년 동안 찾던 사람이 나라고 생각해? 
아니야. 난 네가 살아가는 이유가 될 수 없어.
-케일린-

착하다고 해야 할까 바보 같다고 해야 할까. 케일린을 사랑하는 더그의 모습은 참으로 한결같다. 18살의 케일린이 남자친구와 원치 않던 섹스를 하게 되었음을 알자 더그는 그놈을 죽여버리겠다고 말한다. 케일리를 걸레라 칭하던 그의 멍청한 친구 녀석과는 달리 기본이 되어 있는 남자다. ‘너 그놈이랑은 잤으면서! 나도 널 좋아하는데! 왜 나랑은 안 자주는 거야 이 걸레 같은 계집애야.’ 적어도 이런 말은 하지 않으니. 그녀가 칼로 자해해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린 허벅지를 보고 자신에게도 똑같이 해달라는 이 남자의 사랑방식. 이상하게 부담스럽고 숨이 막힌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방적인 그의 사랑이 자꾸 눈에 띄어 머릿속이 복잡해져만 갔다. 
  
연습 키스를 빌미로 질색하는 케일리에게 키스하는 더그. 멋대로 상처를 보여주고 그녀가 치유해주길 바라는 더그. 그녀를 예쁘고 완벽한 여성이라 말하는 더그. 자신이 보살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더그. 나는 더그를 밀어내는 케일린의 마음을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보살펴줄 사람 필요 없어’  연극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던 케일린의 대사. 그녀가 원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길들여지지 않은 상처투성이 고양이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사랑과 보살핌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자유와 독립이 아니었을까.
  
무척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두 사람의 관계 때문에 연극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에겐 연극의 내용보다는 오히려 연출과 무대 디자인이 굉장히 세련되고 트렌디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지금까지 본 연극 중 가장 현대적인 미니멀리즘을 나타낸 무대 세트는 간결한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여기에 더해 다른 연극과는 달리 꽤 여러 번 반복된 암전 타임에도 다음 스토리를 예상할 수 있도록 주인공들의 목소리, 떨어지고 부서지는 소리, 달리는 소리 등을 들려준다. 뿐만 아니라 배우들은 무대에서 직접 옷을 갈아입기까지 한다. 의도된 연출이었는지 장면 전환이 많은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장 당황스러웠던 순간이었다. 마치 관음증 환자가 되어 배우들을 훔쳐보는 기분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그 부분이 꼭 필요했을까. 어찌됐든 여러모로 굉장히 독특했던 작품으로 기억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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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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