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도를 기다리며, 부조리한 세상에서 웃다 [공연예술]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는 걸까?
글 입력 2016.04.13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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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웅 연출, 극단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

아일랜드 출신 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
'En attendant Godot(Waiting for Godot)'가
임영웅 감독의 손을 거쳐 재탄생한지도 어느새 46년째다.





원작자인 베케트는 아일랜드 사람이지만, 이 연극의 초판인 'En attendant Godot'는 프랑스어로 쓰여졌으며, 초연무대 역시 프랑스에서 가졌다. 이 작품이 작가가 세계2차대전 당시 프랑스 남부지방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1952년 출판되어 1953년에 초연무대에 오른 이 작품은, 1969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이른바 '부조리극'의 정수라고 평가받았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부조리극으로 분류되고, 그 대표적인 유형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부조리극의 주제는 불합리 속에서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그 존재조차 불확실한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끝없이 묻는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는 걸까?" "고도를 기다려야지!"


둘째, 부조리극의 구성은 한편으로 극의 시작부와 똑같은 형식으로 종료되는 '순환적 구성'이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처음 상황이 지속, 반복되는 '직선적 구성'이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하는 단 하나의 행위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에 빗대어 볼 때 '고도를 기다리며'는 직선적 구성의 부조리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작자인 베케트 자신은 이 극을 '희비극'이라고 칭했다. 또한 이 작품의 공연에 대해서도 희비극적인 속성을 철저히 고수하도록 요구하였다. 여기서 이 극에 대한 해석의 여지가 갈라진다.

이 작품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고 무대에 올랐는데, 대표적으로 프랑스와 아일랜드, 즉 이 연극의 뿌리라고 불릴 수 있는 곳에서의 해석을 보면 '부조리극' 혹은 '비극'에 가깝게 되어 있다. 그리고 임영웅 연출의 헤석은, 보다 '희극적'이다.

이 해석의 차이는 극 전체의 분위기에서부터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비교를 위해 첫 도입부를 예로 들어보자. 막이 오르면, 황량한 무대 위에서 고고가 낑낑 소리를 내며 신발 한 짝을 벗으려 애쓰고 있다. 그리고 디디가 무대에 올라 그런 고고에게 다가온다.

이 때 디디(블라디미르)의 등장 장면을 보면, 대본 원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시하고 있다.



VLADIMIR (s'approchant à petits pas raides, les jambes écartées).
블라디미르 (다리 사이가 벌어진 채, 뻣뻣하고 보폭이 좁은 걸음으로 (에스트라공에게) 접근한다).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앞서 '비극적'으로 해석했다고 언급한 공연들을 보면, 디디는 천천히, 안짱다리로 어기적 어기적 등장한다. 
그리고 임영웅 연출의 디디는 두다다다 우렁찬 발소리를 내며 종종걸음으로 등장한다. 무릎 사이가 벌어진 채로, 아주 좁은 보폭으로, 다리는 시종일관 뻣뻣하게. 

두 연출 모두 베케트의 지문을 어긴 점은 단 하나도 없다. 그러나 두 연출의 느낌은 180도 다르다. 임영웅 연출의 디디는 그 등장할 때의 걸음 속도가 족히 다섯 배는 빠르고, 등장하면서 내는 소리 또한 다섯 배는 크다. 이 차이점이 임영웅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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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 쓸쓸한 느낌을 준다 - 사진: 류소현)





이 극에서 배우들은 도입부에서뿐 아니라 시종일관 희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디디가 혹시나 하고 모자를 툭툭 털어보는 장면에서 과장된 몸짓과 함께 '핫!'하는 귀여운 소리를 내고, 포조가 채찍을 휘두르며 목청이 터져라 큰 소리를 내기도 한다. 또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다가 디디가 "그래서? 그게 뭔데?!"하고 재촉하면 고고(에스트라공)가 개그콘서트의 코미디언처럼 과장스럽게 "까먹어버렸다~"고 해버린다. 그래서 공연 내내 관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온다. 사실, '부조리극'이라는 타이틀로 보나, 극이 담고 있는 내용을 보나, 극이 쓰여진 시대적 상황을 보나, 이 극은 '재미있는' 극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웃는다.

이 새로운(46년 된) 해석에 대해서 상반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나에게 처음 이 극에 대해 가르쳐주신 교수님께서는 임영웅 연출이 이 대본을 잘못 해석했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극이 시사하는 삶의 부조리한 모습과, '고도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찰에 집중하는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희극적인 해석이 거북할 수도 있다. 극 자체의 구성보다는 배우들의 말투나 행동에 의해 웃음이 유발되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은 자칫 연극의 분위기가 '가볍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해석이 기발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특히 베케트가 직접 이 극의 부제를 'Tragicomedy-희비극'이라 칭한 것을 고려해봤을 때 희극적인 접근방식이 원작자의 의도에 더욱 부합할지도 모른다. '희비극'의 정의를 '그 내용은 비극적이지만 문체 양식은 희극적인' 극이라고 한다면 임영웅의 '고도를 기다리며'야말로 희비극적인 연출이 아닌가. 그 내용은 음울하지만 그것을 표현해내는 양식은 더없이 희극적이다.

이러한 의견의 대표주자로는 '부조리 연극'이라는 책의 저자이자, '부조리극'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작가 마틴 에슬린과, 더블린 연극제 무대 이후 'Irish Press'의 반응을 꼽을 수 있다.







어떤 해석을 선호하느냐, 어떤 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냐는 받아들이는 이에게 달려 있다. 문학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이 출판되고, 사람들에게 읽히는 과정에서 작가의 의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독자의 개인적 경험을 기반으로 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대본을 연출자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 연출가의 무대를 관객들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4월 10일 일요일, 산울림 극장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왔다.
나는 이 산울림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원작과는 다른, 임영웅 연출의 고유 작품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예상했던 것보다 배우님들의 발성이 좋아서(?) 소극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바람에 조금 정신없었다. 그리고 내가 배운 바에 따르면 이 부분은 심오한 장면이고, 베케트의 삶의 부조리에 대한 고민이 들어있는 것 같은데, 배우들은 희극적이고 관객들은 웃고 있어서 처음에는 이래도 될까 싶었다. 원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문득,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 부조리하다고 해서 조용하게 앉아서, 수동적으로 '기다리며' 살아야만 하는 걸까? 웃고 떠들고, 장난치며 즐겁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50년째 오지 않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리는 두 주인공. 이들이 기다리는 '고도'는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베케트는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면 나도 작품에 써 놓았을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게 인생이라는 것. 그러니 '고도'는 생각하기에 따라 희망적인 미래일 수도, 죽음일 수도 있고, 종전, 조국의 독립, 자유, 떠나간 연인,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인생동안 기다려야 한다면, 웃으며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원제 'En attendant Godot'는 프랑스어 문법상, 완결되지 않은 문장이다. 이 문장을 분석해보면 동사(기다리다-attendre) + 목적어(Godot)로 이루어져 있다. 프랑스어에서 'En (동사어간)-ant' 의 형태는 제롱디프(gérondif)라고 불리는데, 이 제롱디프는 쉽게 말해 '~하며'라는 뜻을 가지는 동사절(종속절)에 쓰인다. 즉, 이 표현을 쓰려면 이 절의 앞이나 뒤에 주절과 주된 행위(동사)가 필요하다. '~하면서 ~했다'의 형식으로 쓰여야 완결된 문장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제목 'En attendant Godot'는 고도를 기다리며.... 에서 끝이 났다. 깔끔하게 끝난 것이 아니고, 여운을 남기고 공백을 남긴 채 끝이 나버렸다. 고도를 기다리는 동시에 내가 행하고 있는 주된 행동이 없다. 비워 놓았다.

그 여백을 채우는 것은 각자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베케트도 몰랐으니까. 임영웅 감독은 이 주된 행동을 '웃음'으로 채워준 것이다. 웃으며 기다리는 것, 괜찮지 않은가?


[류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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