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왜곡의 아름다움 - 풍경으로 보는 인상주의 전을 다녀와서 [시각예술]

글 입력 2016.03.21 23:0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오래 전부터 하던 전시회를 이제야 다녀오게 되었다. 이미 다 보고 오신 분들이 ‘왠열? 뒷북?’ 이라고 하신다면 죄송하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전시회를 다녀와서 그림에 대한 글을 처음 써보는 내가 용기를 가지게 되었기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사실 나는 인상주의 보다 르네상스 시기의 예술들을 더 선호하는 편이지만 어쨌든 예술이라면 다 좋아한다. 이 전시회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인상주의 화가들의 풍경화를 위주로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인상주의의 연대기 순으로 전시관이 나뉘어져 있다. 그 덕분에 인상주의의 흐름을 잘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도 이 전시회의 순서를 따라 나의 감상을 써보려고 한다. 물론 각 파트의 제목도 전시회의 것을 가져왔다. 표절이 아닌 오마주로 봐주셨으면 한다.



1. 인상주의의 선구자


2011032315272621126_1.jpg
 
다운로드.jpg
 

 전시회에서는 인상주의가 사실주의와 외광파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전시관에는 쿠르베를 비롯한 사실주의, 외광파의 화가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그도 그럴게 인상주의가 외광풍경화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여기에 등장하는 외광파 화가들도 인상주의 화가라는 타이틀을 가져도 될 만큼 선구적 이였던 것이다. 사실주의 화가인 쿠르베조차도 외광풍경화를 그리지 않고 야외에서 그린 습작을 바탕으로 실내에서 작업을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외광파의 흐름을 근대적 감성의 분출로 본다면 쿠르베의 작품은 아직 이성의 제어에 있는 듯하다. 쿠르베의 작품인 <안녕하세요, 쿠르베씨> 와 외광파 용킨트의 작품을 비교해보면 내가 말한 바를 좀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 프랑스 인상주의


인상주의.jpg
 

 이 전시관에 오면 이제 대중적으로 유명한 분들이 많이 계신다. 모네, 마네, 르누아르는 예술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다. 여기서부터 내가 여기서 느낀 ‘왜곡’이라는 것이 시작된다. 인상주의는 사실주의에서 그 기원을 찾을 만큼 대상을 사실에 가깝게 그리려고 했다. 그래서 야외에 직접 나가 그림을 그릴만큼 사실성을 중요시 여겼는데 역설적으로 그림은 대상을 철저하게 왜곡한다. 모네의 그림을 보면 대상의 형태는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른 화가들도 정도의 차이만 있지 다 비슷한 느낌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빛이다. 알다시피 빛은 사물이 인간의 시각에 비춰지게 해주는 필수요소이다. 그렇기에 대상은 빛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의미가 될 수 있는 것이고 결국 빛을 수용하는 인간 자체가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인상파 화가들은 이런 생각으로 그림을 그린 듯 했고 대상보다는 빛의 움직임, 빛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그림을 그렸기에 대상은 빛의 변화에 따라 왜곡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사실성은 대상이 아닌 인간 내에 있다는 믿음의 결과였다. 이것은 곧 아카데미즘을 비롯한 그간의 미술사조의 이성적인 측면에 대한 감성적 반란이었으며 진정한 회화혁명의 시작이었다.


hjh0820201602171516480.jpg
 

 전시 중 풍경화가 아닌 이례적인 작품이 몇 개 있었는데 마네의 <아스파라거스 다발>도 그 중 하나이다. 이 그림 또한 회화혁명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인데 앞서 내가 주창했던 왜곡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 그림은 보다시피 인상파의 화풍으로 아스파라거스를 정물화로 그려낸 것뿐이다. 이게 중요한 것은 그간의 정물화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 요소들을 써서 그림에 의미를 담아내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달랐다. 뜬금없이 아스파라거스가 중앙에 놓여있고 그게 끝이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뒤샹이 소변기 하나 가지고 와서 전시했을 때와 동급인 충격을 그 당시 사람들이 받았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혁명적인 변화가 프랑스 인상주의의 시작이었다.  



3. 후기 인상주의


AA.11053894.1_99_20151228235303.jpg
 
벨르뷔의_조망_hanako_76.jpg
 

 후기 인상주의로 분류되어 있는 화가들은 아무래도 작가들 사후에 분류되어진 만큼 그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느낌은 없는 듯 했다. 세잔은 좀 더 과학적인 방법으로 공간 구성에 힘쓴 것 같으며 고갱과 고흐는 강렬한 색채와 형태를 표현하였다. 내가 봤을 때 이들과 앞의 프랑스 인상주의 작가들과의 차이는 후기 인상주의의 작품들에서 대상의 형태의 왜곡이 덜 심하다는 것이었다. 앞서 본 모네의 작품은 형태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알아보기가 힘들다. 반면 고흐나 세잔의 작품은 비교적 형태를 쉽게 알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색채 또한 더욱 뚜렷해졌다. 프랑스 인상주의의 작품들을 보면 대체로 흐릿한 느낌을 준다. 아직 지식이 부족한 탓에 이렇게 밖에 설명을 못하겠지만 무슨 느낌인지는 대충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어쨌든 이러한 차이에서 나는 새로운 사조임에도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더 발전하려는 작가들의 열정을 엿보았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인상주의가 근대미술의 시작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4. 신인상주의


sed012016022917384984_99_20160229174107.jpg
 

 신인상주의로 오면 과학적인 기법을 추구했던 작가들이 모여 있다. 전시회에서는 이들을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눴는데 하나는 세잔을 이어받은 색채분할기법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점묘법을 사용하는 그룹이었다. 전시에서는 주로 점묘법의 화가들을 보여줬다. 그 중 시냑의 작품을 보면 색이 점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인상주의의 작품들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시에서의 설명에 따르면 색의 수직적 사용과 수평적 사용이 서로 다른 것을 착안하여 색을 점으로써 표현해 서로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낸다고 한다. 내 얕은 지식으로는 이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과학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왜곡의 정도가 점점 약해진다는 것이었다. 여전히 빛에 대한 주목으로 색채의 왜곡은 있지만 형태면에 있어서는 확실하게 뚜렷해진 느낌이다. 



5. 독일 인상주의


1.jpg
 

 독일 인상주의는 상대적으로 위의 그룹들보다 많이 알려지진 않았다. 그래도 확실히 그림에서 풍겨오는 느낌은 달랐다. 위 그룹들의 느낌은 빛을 통해 세상을 본 느낌이라면 독일 인상주의의 그림은 세상위에 빛을 덮어씌운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대상에 대한 왜곡도 크게 발생하지 않는다. 프랑스 인상주의와는 정반대인 느낌인데 이것은 독일이 인상주의를 상당히 늦게 받아들인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신인상주의의 느낌도 나면서 초기 인상주의의 느낌까지 겸비하고 있다. 그래서 이 전시가 신인상주의 뒤에 따라오게 되었을 것이다.



6. 나비파와 야수파


7IOlqB55.jpg
 
15a49a339f549963a64a65acbf78c2ec.jpg
 

 인상주의의 시대는 그 명성에 비해 굉장히 빨리 끝나게 된다. 사상도 그렇고 기술도 그렇고 뭐든지 급변하는 19세기답게 미술의 사조도 급변하게 된다. 인상주의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탄생하게 된 것이 바로 나비파와 야수파이다. 나비파는 선구자라는 뜻에 걸맞게 매우 파격적인 그림을 보여준다. 전시회에 나온 그림 중 하나인 <티욜루아의 분홍빛 교회>라는 작품에서는 교회를 큰 바위가 가려버리는 구조를 취한다. 상징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던 모리스 드니의 성향으로 추측컨대 자연으로 상징되는 바위가 인간을 상징하는 교회를 가림으로써 인간에 대한 자연의 전복 혹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자연의 위대함을 나타내고자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나비파는 고갱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강렬하고 주관적인 그림을 그렸던 고갱의 제자들답게 주관적이고 순수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야수파는 고흐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한 그림들을 보여준다. 풍경화지만 풍경을 압도해버리는 색채를 사용하여 강렬한 느낌을 준다. 블라멩크의 작품 <샤투의 다리>를 보면 이 느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다리는 안중에도 없다. 풍경을 뒤덮는 푸른 색채만이 있을 뿐이다. 이로써 인상주의에서의 대상에 대한 왜곡은 결국 왜곡을 넘어 대상의 소멸에 이르게 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며 인간의 주체적 감성을 표현하려 했던 인상주의의 노력은 색채를 표현수단을 넘어 하나의 대상으로 보았던 야수파에 이르러 끝나게 되었다. 대상의 고유한 색을 뛰어넘어 빛의 색을 그리고자 했던 것이 다시 색채 고유의 표현을 중시하는 것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이 순서대로 관람을 마치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이 글은 그저 전시회를 갔다 온 자가 자기 흥에 들떠서 쓴 글이기 때문에 다소 주관적이며 오류도 많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쓴 것은 인상주의에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인상주의 작가들은 자신들이 처음에 작품을 전시할 때 많은 비판을 받았었다. 인상주의란 이름이 붙게 된 것도 모네의 <인상, 해돋이>라는 작품을 본 한 비평가가 그들을 조롱하려고 붙인 이름이여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새로운 미술 사조를 만들고 회화혁명을 일으키고 후대의 많은 인물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지금의 현대미술도 대중들에겐 아직 저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질이 떨어지는 작품들도 많겠지만 시대를 앞서나간 작품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나는 19세기의 대중들이 인상주의를 처음 봤을 때처럼 지금의 대중들이 현대미술을 보고 낯설어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회피하지 말고 다시 한 번 돌아봐줬으면 한다. 혹시 아는가. 우리들이 죽은 뒤 그 그림들이 현대 회화혁명의 주역이 될지도 모른다.


[권중하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