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질투심,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다 - 소설가 김경욱 『99%』[문학]

'미선은 그 여름날 해변에 함께 놀러갔던 서울내기 여학생을 닮았다.'
글 입력 2016.01.2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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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경욱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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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경욱씨는 작가세계 신인상(1993)을 받으며 등단한 이래로 제37회 한국일보 문학상(2004), 제53회 현대문학상(2007), 제40회 동인문학상(2009), 제 40회 이상문학상 대상(2016)을 수상하며 국내의 최고 소설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김경욱씨는 주로 경험하거나 체험한 일보다는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해 글을 쓰는 편이다. 다른 작가들에 비해 작품에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지만, 지금까지 나온 소설에 분신이 하나씩은 들어가 있어 조합하면 김경욱이 탄생한다고 한다. 또한 그는 소설 쓰기야말로 미래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이 세상엔 많은 소설들이 존재하므로 더 이상 새로운 소재는 없지만 비슷한 소재를 가지고도 그 안에 담고 있는 인간에 대한 해석이 다르고, 이야기를 추상화시키면 재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대의 해설이랑 뉴스를 보거나 신문의 사회면을 읽으며 소설에 쓸 소재의 영감을 받을 때가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을 읽으면 마치 실제 있는 이야기처럼 생생하게 다가오며, 사회비판적 요소도 다분히 드러난다.





작품 속으로


99%

기시감 : 처음 오는 곳, 처음 대하는 장면,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어디선가 이미 본 것 같은 느낌을 한자로는 "기시감", 프랑스어 또는 심리학적 용어로는 "데자뷰" 혹은 "데자뷔"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시감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이 소설은 최 대리가 새로 입사한 능력자 스티븐 킴을 과거에 본 듯한 기시감에 사로잡혀, 그의 출신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이야기다. 소설 속 내용을 파고들기 전에 최 대리의 성장 배경과 성격 및 특성에 대해서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최 대리는 학창 시절 B시의 명문고에서 5등 내에 들었던 우수한 학생이었다. 집안 사정으로 G시의 고등학교로 전학 가서는 서울대에 입학하면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는 학교의 제안에 죽기 살기로 공부했고, 1등을 거의 놓치지 않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생존경쟁 속에서 치열하게 앞만 보고 달려왔으며, 다른 학생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곤 했다. 상위 1%가 그동안 그가 있어왔고, 있어야만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회사에 스티븐 킴이 들어오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진다. 그의 위치를 위협하는 존재의 등장으로, 상위 1%에서 99%의 위치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그는 질투심에 불타오르고, 주변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분노와 슬픔에 휩싸여 괴로워한다. 그리고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아몬드가 박힌 달콤한 초콜릿을 베어 물어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킨다.


이제 소설 속으로 파고들어 가보자.

1) 광고 회사
최 대리가 근무하고 있는 곳은 광고 회사이다. 다른 업종보다도 경쟁이 치열하며 살아남기가 힘들다고 소문이 나 있다. '광고'회사 라는 설정은 학창 시절부터 줄곧 그의 삶을 지배한 '이겨야만 한다'는 모토에 불을 지펴 더 큰 '승부욕'을 발휘하게 한다.  

2) 머릿속 난쟁이
머릿속 난쟁이는 최 대리가 받는 '스트레스'를 상징한다. 프레젠테이션 결과를 기다리거나 참을 수 없이 궁금한 것이 생기는 것처럼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머릿 속에서 아우성 쳐대며 초콜릿을 달라고 외쳐댄다. 그럴 때마다 아몬드가 콕콕 박힌 달콤한 초콜릿을 한 입 베어물곤 한다. 

3) 여자친구 미선
최 대리는 사내 커플이다. 그와는 달리 미선은 명문대 출신도 아니고 부잣집 딸내미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원이다. 이런 그녀 곁에 있을 때면 그는 일종의 '우월감'을 맛볼 수 있다. 이것이 그를 그녀 곁에 머물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이 될 지도 모른다.

'미선의 눈빛이 경외로 반짝거렸다. 자신이 갖지 못한 재능을 향한 동경과 흠모를 무구하게 드러내는, 선택받은 자가 된 듯한 기분에 빠져들게 하는 저 눈빛. G시에서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던.'

4) 싸우나 박
회사 창립 멤버이자 최 대리의 사수였던 인연으로 친분이 두텁다. 이런 이유로 사내에서는 가장 먼저 대리로 승진한 최 대리에게 의심의 눈초리가 오가곤 한다. 하지만 자존심이 센 그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결코 줄을 서지 않았고 자신의 능력을 통해 얻어낸 것이라고 따져든다. 싸우나 박은 최 대리가 절대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자존심'을 부각하는 역할을 한다.

5) 스티븐 킴과 기시감
스티븐 킴을 과거에 본 듯한 기시감에 휩싸여 그의 출신을 의심하는 내용은 소설의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 새로 입사한 스티븐 킴은 금세 우수 사원이 되어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다. 눈길을 사로잡는 아이디어와 우수한 경쟁 PT실력으로 광고주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아 버리는 스티븐 킴이 최 대리에게는 눈엣가시가 된다. 상위 1%에서 놀던 그가 99%로 전락할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불안감은 그를 향한 '질투심'으로 발현된다. 그리고 이 질투심은 그를 어떻게 해서든 깎아내리기 위한 방향으로 머리를 굴리게 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기시감'이다.

5-1) 김태만
최 대리는 스티븐 킴의 화려한 이력과 달리 그 이면에 숨겨진 과거가 있다고 믿는다. G시의 고등학교에서 그로 인해 2등으로 밀려난 김태만이 바로 스티븐 킴이 아닐까 의심한다. 그의 과거 회상 부분을 읽다 보면 당시에 자신의 경쟁상대였던 김태만을 의식해 얼마나 자세히 관찰했는지 느껴진다. 그리고 광고 회사에서 스티븐 킴을 의식하면서 하나하나 살피는 것을 보고 참으로 독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출신 초등학교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 요즘 같은 시대에 애국심으로 귀국했을 리는 없다는 점, 왼발이 오른발보다 크다는 점 등을 들어 근거를 확보해 나간다. 그리고 과거와 맞지 않는 부분들 이를테면 외모가 다르다는 점은 성형을 했다는 식의 억지로 껴맞춰간다. '그렇게까지 해야만 할까?' 싶을 정도로 아주 집요하다. 어찌보면 김태만이라는 사람은 있었을 지언정 김태만을 둘러싼 여러 특성들은 그가 만들어 낸 창작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라도 1%의 자리를 지켜내고 싶은 심리가 반영된 것은 아닐까.   

5-2) 닻, 스크루 그리고 여자친구
김태만과 그의 여자친구와 함께 고2 여름방학에 해변에 놀러간 적이 있다. 1학년 때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던 김태만이 먼저 다가와 같이 놀러 가자고 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이 내용이 최 대리가 상상해 낸 픽션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색했던 사이에서 갑자기 다가와 놀러가자고 하는 설정을 만들어 내어 스티븐 킴이 어떻게 해서든 김태만임을 입증하고자 하기 위해 말이다. 해변가에서 김태만은 빛나는 재능으로 운명의 항로를 바꾸려 했으나 사소한 우연에 좌초한 청춘에 관한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최 대리는 계속해서 그가 음울하게 이야기했다는 것을 반복해 언급한다. 그의 머릿 속에서라도 스티븐 킴은 자신의 아래에 있던 김태만이고, 늘 당당한 지금의 모습과는 달리 슬픈 모습을 하고 있는 그를 상상하는 것처럼. 김태만은 영화 속 청년은 모든 것을 수중에 넣은 순간 안타깝게 요트의 닻에 걸려 떠올랐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청년은 닻이 아닌 스크루에 걸린 채 딸려 나왔다는 것을 확인하곤 김태만이 착각했다고 생각한다. 그저 항해 도중 사망해버린 것에 불과한 것인데, 거의 목표 지점에 다다라 요트를 정박하기만 하면됐으나 안타깝게 죽고 말았다고 착각했다는 것. 거의 자신을 따라잡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던 것이었음을 상상 속에서나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미선은 그 여름날 해변에 함께 놀러갔던 서울내기 여학생을 닮았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는 갸우뚱하고 넘어갔으나 두 번째 읽었을 때는 이것이 여름방학 에피소드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단서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최 대리는 스티븐 킴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평상시에 술도 안 마시는 미선이 스티븐 킴의 술은 잘도 받아 마시는 것에 또다시 질투심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래서 미선은 그의 망상 속에서 스티븐 킴의 여자친구로 재탄생했고, 술에서 깬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옆에 여자친구가 나체로 누워있었다는 데에서 그로부터 미선을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스티븐 킴에 대한 열등감으로 고통 받는 최 대리는 실은 김태만이 아니라 자신이 두려워하는 '닻'을 여자친구의 배꼽 밑에 그려넣는다. 스티븐 킴과 별반 다르지 않은 실력을 갖고 있다고 자존심을 내세우며, 곧 스티븐 킴을 이기는 지점에 정박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으나 잘못하면 닻에 걸려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이 두려움이 배꼽 밑의 닻에 투영되었다. 그리고 스티븐 킴의 배꼽 밑에도 닻이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데에서 과거에 나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힌 그를 발견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낸다.

5-3) 사우나와 닻
싸우나 박이 명예퇴직을 선언하고 마지막 회식을 가진 후 남은 사원들과 함께 사우나에 가기로 한다. 같이 가기로 한 멤버에 스티븐 킴도 속해 있었다. 절호의 찬스인 셈이다. 그의 배꼽 밑에 닻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하지만 소설은 알려주지 않는다. 닻이 있는지 없는지. 이 열린 결말은 내게 엄청난 분노를 가져왔다. 과연 그가 김태만이 맞을 것인가 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마주했지만 결과는 독자에게, 그러니까 내게 온전히 맡겨져 버렸다. 그렇다면 내멋대로 결론을 지어봐야겠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는 김태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김태만의 특성과 비슷한 부분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최 대리가 지어낸 특성들을 억지로 가져버리게 된 것이었을 뿐 김태만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6) 카카오 99%함량 초콜릿
소설의 결말 부분에 나오는 소재이자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이다. 그가 평소에 먹는 달콤한 초콜릿과 달리 싸우나 박이 건낸, 카카오가 99% 함유된 초콜릿은 아주 쓴 맛을 낸다. 영국 귀족들은 이 초콜릿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이 초콜릿의 씁쓸한 맛은 갈수록 지독하지만 끝 맛은 달콤하다. 영국 귀족 그러니까 상위 1% 계층이 즐겨 먹은 초콜릿. 달달한 초콜릿만 고수하는 99%와는 다르게 특별함을 추구한다. 그리고 이 초콜릿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마지막 1%에 있다. 즉, 씁쓸하고 고통스러운 99%를 견뎌내야만이 1%에 도달할 수 있다.

'나는 혀로 입 안 구석구석을 탐색한다.
그가 말한 달콤한 끝 맛을 찾아내려는 것처럼.'

스티븐 킴의 배꼽 밑에서 닻을 찾아내려는 그의 심리는 초콜릿을 통해 표현된다. 99%로 전락한 쓰디쓴 현실에서 벗어나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 1%의 즐거움을 얻고 영국 귀족과 같은 1%의 특별함을 느끼고 싶은 그는, 혀로 입 안 구석구석을 탐색하며 달콤함을 찾아 헤맨다.






『99%』는 누구든 갖고 있는 질투심이라는 심리를 '기시감'이라는 소재를 통해 재밌게 풀어나갔다. 1%를 질투하며 미워하지만 한 편으로는 1%가 되고 싶어하는, 그러나 현실은 99%에 속해있는 현대인들이 꽤나 공감할 만한 주제로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 생각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최 대리의 내면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지면서, 그 감정에 깊게 깊게 파고 들어갔고 결국엔 동화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단편소설인데도 불구하고 한 편의 영화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경욱 씨가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글을 쓰는 편이기 때문인 걸까?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 자주 출몰하고 인간의 내면 심리를 아주 섬세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참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자료>

작가와 인터뷰 그리고 1:1의 만남 - 김중혁, 김경욱, 김동영 ④,
http://readersu.blog.me/130089095476.
[백(白)형제의 문인보](12) 소설가 김경욱, 백가흠, 경향신문.


[정선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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