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안규철_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시각예술]

사랑이 싸구려가 된 요즘, 더 논할 사랑이 아직 남았나?
글 입력 2015.12.0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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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사랑인가? 그 긴 시간들을 다 보내고 이제야 유행가처럼 속되고 흔하다며 외면했던 사랑을 말하게 되었나?
사랑은 너무 많고 싸구려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사랑 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도 사랑은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그래서 다시 사랑을 얘기 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되었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발길에 치이는 게 모두 사랑이고 입술에 발린 게 모두 사랑인 이곳에서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고,이런 사랑 말고 다른 사랑이 있을 거라고, 그런 사랑의 나라를 상상해보자고 말하는 것은 무모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그 말을 다시 해야겠다."  -작가 노트 중-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안규철 작가의 전시이다. 
전시 제목은 마종기 시인의 시<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인용 한 것으로 작가는 '안 보이는 사랑'들로 구축해 낸 나라로 관객을 인도한다. 흔하디 흔해 우리가 매 순간 마주하는 사랑이 아닌 우리가 잊었거나 혹은 사라져서 '보지 않는' 사랑에 관해 논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담고 있다. 전시는 크게 일곱 개의 작품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작품이 각각 별개의 의미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한 나라를 이루는 요소들처럼 밀접하게 연관되어 일련의 전시가 작가가 만들어 준 어떤 나라로의 여정 같은 느낌을 받는다.


아홉 마리의 금붕어.JPG

 
 그 나라에서 관객이 처음으로 마주하는 것은 아름다운 고립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아홉 마리의 금붕어>라는 작품을 접하게 된다.연못은 9개의 동심원으로 독립적으로 구획되어 있고 아홉 마리의 금붕어는 각자의 연못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한 개의 연못에 살고 있지만 금붕어들은 각각 모두 각자의 세계에 갇혀 살아간다.
금붕어들은 각자의 공간에 갇혀 타자를 만날 수 없으며 그 공간에서만 계속 돌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끝없는 고독이다. 작품의 주된 내용인 고독과는 대조적으로 연못의 옥색과 금붕어의 주황색이 대비되어 시각적으로 마주했을 때는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진다.
우리가 사는 세계도 금붕어와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사는 세상도 그냥 이처럼 각자, 따로 살아가는 것이 속성인 것이다. 이것은 딱히 슬프거나 안타까운 일이 아니다. 또한 이 연못이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가 사는 세계는 본질이 고독일지라도 아름다움으로 충만하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서 관객들의 첫 여정은 홀로 남게 되는 것이다.


피아니스트와 조율사.jpg
 

 전시에서 두 번째로 마주하는 작품은 <피아니스트와 조율사>이다.
이 작품은 전시 기간 동안 매일매일 변화하는 작품이다. 매일 피아노를 치는 연주가가 있고 그 피아노의 건반 소리를 하루에 한 개씩 없애는 조율사가 있다. 전시의 초반부에는 연주가가 치는 피아노 곡이 거의 온전한 형태였을 것이다. 그러나 전시가 시작된 지 두 달 이상이 지난 내가 방문한 날에는 피아노에서 60개 이상의 건반이 소리를 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연주가가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지만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움직임만 있을 뿐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음악이 사라져가는 과정에서 불어나는 침묵은 다시 한 번 관객에게 홀로 되어가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소리가 나는 것이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떤 연속적인 과정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리가 나지 않는'과 '안 보이는'은 같은 맥락이다. 안 보이는 것들은 본래 속성 자체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는 소리가 나던 피아노 건반이 소리가 나지 않게 되는 것처럼 우리에게 존재했었지만 우리가 잊어버리거나 놓쳐 보이지 않게 되는 것, 존재하지 않게 된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이제 잊어버리거나 놓친 것들을 다시 불러내는 작업을 하게 된다.
<1000명의 책>과 <기억의 벽>은 온전히 관객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작품이다. 


1000명의 책.jpg
 

 <1000명의 책>은 전시 기간 동안 1000명의 관객이 문학 작품을 연이어 필사하는 작업이다. 필경사의 방에서 한 명의 관객은 한 시간 동안 주어진 문학 작품을 필사한다. 서로를 알지 못하는 개개인의 관객이 필사하여 한 개의 필사본을 만들어낸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한 개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 속의 연대이다. 
고독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본질이지만 연대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 다른 결을 만들어 준다. 이것이 작가가 말하는 '안 보이는 사랑'이 아닐까?
 우리는 일상에서 내가 타인과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필사본 같은 가시적인 산물들을 쉽게 알아챈다.
그러나 내가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 그 행위 자체는 보이지 않으며 은근하게 이루어 지기 때문에 알아채지 못한다. 
작가는 <1000명의 책>을 통해 관객들이 '필경사의 방'에서 필사하는 한 사람을 보게 함으로써 타인과의 관계를 맺어가는 그 과정을 주목하게 한다. 본질이 고독인 우리의 세상에서 관계를 맺는 다는 것 이것이 바로 안 보이는 사랑인 것이다.


기억의 벽.jpg
 

  <기억의 벽>은 관객들에게 자신이 잃어버린 것, 그리워하는 것 그러나 지금 곁에 없는 것을 직접적으로 쓰게 한다. 각자가 쓴 카드는 8600개의 못이 박혀 있는 벽을 빼곡히 메우게 된다.  관객들이 각자 그리워하는 것들을 쓴 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한 편의 시를 읽는 느낌이 든다. 전혀 다른 경험에서 온 것들이지만 '그리움'이라는 속성으로 묶여 있는 8600개의 단어들은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가득 채운다.
이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사랑인 것이다. 관객들은 자신에게 부재하는 것을 구체적인 단어로 불러 냄으로써 '안 보이는 사랑'을 더욱 선명하게 지각하게 된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는 전시 제목처럼 이 전시는 안 보이는 사랑으로 만들어진 나라로 떠나는 유람 같았다. 서로 남다른 것, 색 다른 것을 하려고 앞 다투는 현대미술에서 사랑이라는 흔하고 지극히 평범한 소재로 전시를 구성한 것은 작가의 용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감한 선장이 이끄는 배가 승객을 좋은 여정으로 이끌어 주듯 우리들은 질리게 들어봤을 법한 사랑이라는 말에 우리가 잊었던 소중한 것이 있음을 발견했다. 고독-소중한 것을 불러냄-다시 고독 이라는 전시의 일련의 과정은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즉 우리가 사는 세계가 유토피아적인 아름답기만한 세상이 아님을 견지했다. 이 전시는 세계에 대한 긍정도 부정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시인이었다. 전시의 마지막 단계를 <침묵의 방>이라는 작품으로 다시 고독으로 끝맺음으로써 작가는 우리가 사는 세계는 외로운 곳이라는 점을 재인식하게 했다. 그러나 그 곳에 항상 보이지 않더라도 항상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그 점을 알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잊었거나 놓쳤을지라도 사랑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이 세계를 살아나가는 것이다.





바람의 말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 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꽆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이윤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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