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스러운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통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려야 할까. 고통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과 환경을 원망해야 할까. 아니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로 상처를 억지로 덮어야 할까. 어느 쪽도 충분한 답은 되지 못한다. 고통은 의지만으로 사라지지 않고, 모든 시련이 아름다운 교훈으로 남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 이후』는 고통을 쉽게 위로하지 않는다. 대신 고통 앞에 선 인간에게 여전히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묻는다.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그 상황을 대하는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가. 상실 이후에도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가.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의미에 책임지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이 책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잘 알려진 빅터 프랭클의 미출간 유고작을 엮은 책이다. 1946년부터 1984년까지 발표된 강연과 인터뷰 네 편을 통해 의미, 자유, 책임, 사랑, 고통, 죽음에 관한 그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어판에는 손자인 영화감독이자 심리치료사 알렉산더 베셀리프랭클의 특별 서문도 수록되었다.
지옥을 경험한 사람은 어떻게 다시 웃을 수 있었을까
손자 알렉산더가 기억하는 프랭클은 쾌활하고 다정하며 농담을 좋아하는 할아버지였다. 간혹 성급하게 화를 내기도 했지만 금세 사과할 줄 알았고, 손주들의 장난을 받아주며 일상의 작은 즐거움을 누렸다.
그러나 열아홉 살이 된 알렉산더가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제대로 읽으면서 그 평범한 일상의 뒤편을 발견한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여러 강제수용소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부모와 형제, 아내를 잃은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때 손자의 마음에는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그는 어떻게 산산이 부서지고, 원망으로 가득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고 해서 모든 고통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프랭클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빈으로 돌아온 뒤, 수용소에서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고백한다. 수용소에서는 살아남아 가족을 다시 만나겠다는 목표가 있었지만,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는 그 가족들이 이미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그럼에도 프랭클은 자신의 삶을 끝내는 대신, 자신에게 남은 과제를 붙들었다. 의사로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고, 작가로서 자신이 발견한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선택할 수는 없었지만, 그 사건 이후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는 선택했다.
이 책이 다루는 것은 단순히 ‘어떻게 살아남았는가’가 아니다. 살아남은 뒤, 상실과 절망을 품은 채 어떻게 다시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다. 프랭클은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아우슈비츠가 있습니다.”
이 문장은 일상적인 고통을 홀로코스트와 동일시한다는 뜻이 아니다. 고통을 서로 비교하고 등급을 매기지 말라는 의미에 가깝다. 다른 사람에게 사소해 보이는 사건도 한 개인의 삶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최대의 고통일 수 있다. 실직, 실패, 이별, 질병, 죽음, 죄책감과 고독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한 사람의 세계를 무너뜨린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프랭클은 고통을 축소하지 않는다. 다만 그 고통이 인간의 마지막 결론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우리는 왜 풍요로운데도 공허한가
프랭클은 현대인이 경험하는 삶의 공허를 ‘실존적 공허’ 또는 ‘실존적 좌절’이라고 부른다. 이는 단순히 기분이 울적하거나 일이 힘든 상태가 아니다. 자신이 왜 살아가는지, 무엇을 향해 가는지 알 수 없는 상태다.
그는 인간이 목적지를 알지 못할수록 오히려 더 빠르게 달린다고 지적한다. 무엇을 위한 속도인지 생각할 틈 없이 더 많은 성과와 소비, 자극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에 대한 욕구가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쾌락은 만족이 아니라 공허를 잠시 잊기 위한 마취가 되기 쉽다.
이는 오늘날의 번아웃과도 맞닿아 있다. 우리는 흔히 번아웃을 ‘너무 많은 일을 해서’ 발생하는 문제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프랭클은 과도한 업무뿐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내적 부조화에서도 인간이 소진된다고 본다.
반대로 아무런 요구와 도전이 없는 삶 역시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프랭클은 인간에게 건강한 수준의 긴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쪽에는 현재의 내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아직 실현하지 않은 구체적인 과제와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 두 지점 사이의 긴장이 인간을 움직이게 한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프랭클은 일자리를 잃은 청년들을 만났다. 그들을 괴롭힌 것은 실업 자체만이 아니었다. ‘일자리가 없다는 것은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쓸모없는 사람의 삶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그들을 더 깊은 절망에 빠뜨렸다.
프랭클은 이 청년들이 도서관이나 기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도록 도왔다. 임금을 받는 일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해야 할 과제가 생기자, 이들의 우울감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직업이 곧 인간의 가치라는 뜻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돈과 생계뿐 아니라, 자신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감각과 실현할 의미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힘들지 않은 삶이 반드시 건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엇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삶이 인간을 더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
의미는 일과 사랑, 그리고 불가피한 고통에서 온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프랭클은 크게 세 가지 길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일을 통해 무언가를 창조하거나 성취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이란 반드시 직업이나 경제활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의 과제를 완수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며, 세상에 자신만의 흔적을 남기는 모든 활동이 포함된다.
두 번째는 사랑과 경험을 통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한 사람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로 바라보는 것, 자연과 예술을 깊이 경험하는 것, 세계와 진실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 소유했느냐뿐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고 경험했느냐에 따라 자신의 내면을 확장한다.
세 번째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다만 이 부분은 신중하게 이해해야 한다. 프랭클은 고통을 찬양하거나 일부러 고난을 찾아 나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바꿀 수 있는 상황이라면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은 치료하고, 벗어날 수 있는 폭력과 부당함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불필요한 고통을 견디는 것은 의미가 아니다. 프랭클이 말하는 것은 오직 이미 일어난 상실과 되돌릴 수 없는 과거, 인간의 유한성과 죽음처럼 피할 수 없는 고통에 관한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고통을 대하는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 프랭클은 이를 ‘비극을 개인적인 승리로 변화시키는 능력’이라고 표현한다. 고통 자체가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통 앞에서 자신이 어떤 태도를 선택했는지가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반드시 고통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자신의 전부로 만들지 않을 자유는 인간에게 남아 있다.
환경은 인간을 어디까지 결정하는가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깊이 받아들인 것은 인간의 자유에 관한 프랭클의 관점이었다.
“어떤 운명이 닥쳐오더라도, 그런 운명에 대해 이런저런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는 결코 상실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가난, 폭력, 차별, 질병과 전쟁은 분명 한 사람의 선택 가능성을 제한하고 삶을 무너뜨릴 수 있다. 따라서 모든 불행을 개인의 의지나 선택 탓으로 돌리는 것은 프랭클의 사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해석이다.
그러나 환경이 강력한 영향을 준다는 사실과, 인간에게 어떤 선택의 자유도 남아 있지 않다는 주장은 같지 않다. 좋지 않은 환경에 놓인 모든 사람이 반드시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프랭클이 끝까지 지키려 한 것은 바로 그 작은 간격이다. 주어진 조건과 인간의 응답 사이에 남아 있는 마지막 자유다. 그는 자신의 인간관을 비관주의나 낙관주의가 아닌 ‘행동주의적’ 관점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행동주의란 심리학의 행동주의 이론이라기보다, 선택과 실천을 강조하는 행동 지향적 태도에 가깝다.
인간은 완전히 선하거나 완전히 악한 존재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품위 있는 선택과 품위 없는 선택의 가능성이 함께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어느 집단에 속했느냐가 아니라,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하느냐이다. 이 관점은 냉정하다. 더 이상 모든 문제를 환경과 타인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을 무력한 피해자로만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존엄하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나의 책임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 일 이후의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는 나 역시 참여해야 한다는 뜻이다. 삶은 우리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고, 우리는 말이 아니라 선택과 행동으로 답한다.
환경의 희생자에만 머물 것인가, 아니면 주어진 조건 속에서도 삶의 공동 창조자가 될 것인가. 프랭클의 자유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자유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를 포기하지 않는 자유다. 우리가 살아낸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책에서 가장 오래 남은 것은 ‘과거라는 창고’의 비유였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젊음도, 관계도, 성취도 언젠가는 끝난다. 그래서 지나간 삶을 바라보며 수확이 끝난 황량한 들판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프랭클은 우리가 빈 들판과 그루터기만 볼 뿐, 이미 수확물이 가득 들어찬 창고는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한 일, 우리가 한 사랑, 우리가 꿋꿋이 견딘 고통은 지울 수 없습니다.”
내가 만든 것, 사랑한 사람, 끝까지 견뎌낸 시간, 실패 속에서 배운 태도는 이미 과거 속에 보존되어 있다. 그것은 취소할 수도, 누군가가 빼앗을 수도 없다. 미래의 가능성은 아직 불확실하지만, 이미 실현된 과거는 가장 확실한 형태로 존재한다.
이 문장을 읽으며 삶의 의미는 단지 ‘찾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견한 의미는 선택과 행동을 통해 실현되고, 내 삶의 일부로 내재화되어야 한다. 의미는 머릿속에 적어놓는 좋은 문장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낸 경험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 기여한 일,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 순간,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내린 선택, 실패한 뒤 다시 일어난 경험은 모두 온전히 나의 것이다. 누구도 그것을 가져갈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현재의 결핍만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아직 이루지 못한 것만 세는 대신, 이미 삶의 창고에 쌓아온 것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죽음의 수용소 이후』는 삶이 언제나 공정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노력하면 반드시 성공한다거나 모든 상처에는 아름다운 이유가 있다는 달콤한 결론도 내놓지 않는다. 오히려 삶은 때로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부당하며,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던진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프랭클은 인간에게 자유가 남아 있다고 말한다. 상황에 응답할 자유, 의미를 실현할 자유, 품위를 선택할 자유다. 그리고 그 자유에는 자신이 내린 선택을 살아내야 할 책임이 따른다.
의미는 삶을 장식하는 문장이 아니라, 삶을 견디고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오늘 해야 할 일을 해내고, 한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사랑하며, 바꿀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결정하는 것. 그렇게 살아낸 경험과 성취, 사랑과 견딤은 과거라는 창고에 들어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나의 존재 증명이 된다.
고통이 삶의 결론이 되지 않도록, 『죽음의 수용소 이후』를 읽으며 자신의 삶이 지금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마주해보기를 바란다.
![[아트인사이트] 이소희 컬쳐리스트.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16125426_gsedhuuu.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