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작가의 상상에서 시작된다. 어떤 작가는 자신의 삶에 허구를 더해 이야기를 만들고, 어떤 작가는 자신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공간에서 다른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워 이야기를 만든다. 그렇다면 <맨 끝줄 소년>의 작가 ‘후안 마요르가’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게 되었을까.
중고등학교 수학 교사였던 후안 마요르가는 시험지를 채점하다가 한 학생의 글에 사로잡힌다.
“선생님. 저는 공부를 하지 않아서 문제를 전혀 풀 수가 없어요. 하지만 테니스는 잘 쳐요. 지난 일요일에는 대회도 나갔어요. 저는 챔피언이 될 거예요. 그땐 선생님도 와서 축하해 주세요.”
시험지에 문제의 답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쓴 학생을 기억해둔 작가는 상상을 더하고 더해 희곡을 완성한다.
교실 맨 끝줄에 앉아 모두를 지켜보는 소년
고등학교 문학 교사인 헤르만은 학생들의 작문을 채점하다 허탈해한다. 주말에 있었던 일을 쓰라는 과제를 내줬더니 “토요일에 나는 텔레비전을 봤다. 일요일에는 피곤해서 아무것도 안 했다.”같은 초등학생 일기 수준의 문장들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맞춤법마저 엉망인 글들을 읽고 헤르만은 교사 생활에 회의감까지 느낀다. 그러다 교실 맨 끝줄에 앉는 소년, 클라우디오의 작문을 읽는다.
클라우디오는 같은 반 친구 라파에게 수학을 가르쳐주는 대신 철학을 배우겠다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이유로 라파의 집을 방문한다. 사실 소년은 의도적으로 라파에게 접근했다. 화목하고 번듯한 중산층 가정의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라파에게 어려운 수학 문제를 던져주고 방을 나와 부엌과 거실을 맴돌며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관찰한다.
“라파에게 돌아가려고 할 때 어떤 향기가 내 주의를 끌었다. 혼동할 수 없는, 중산층 여자의 향기다. 그 향기에 이끌려 난 거실까지 가게 되었다. 거기서, 소파에 앉아 인테리어 잡지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이 집 여주인을 발견했다. (...) 그녀는 소파로, 난 라파 방으로 돌아갔다. 라파에게 삼각법 문제를 풀어 줬다. 이번 학기에 수학을 낙제하지 않으려면 많은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계속)
- 맨 끝줄 소년, 6쪽
작문 끝에 적힌 (계속)이라는 두 단어에 헤르만의 아내는 기겁한다. 이 아이는 친구를 기만하고 친구의 가족을 비웃고 교사인 당신도 조롱하고 있다고. 이 글이 사실이라면 당신이 개입해야 하는 거라고.
하지만 소년의 글에서 작가적 재능을 발견한 헤르만은 희열을 느낀다. 어쩌면 독자로서 뒷이야기가 궁금한 마음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소년을 혼내기보단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부추긴다. 관찰만으로는 갈등이 부족하지 않냐고. 주인공의 목적은 무엇이고 그걸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관찰자에서 주인공으로
일기가 아닌 소설에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무언가 이루기 어려운 것을 갈망하고, 그를 방해하는 적대자를 만나며,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잃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 레마는 오늘 저녁에 짬뽕을 먹을까 짜장을 먹을까 하는 작은 갈등이 아니다. 트로이로 가서 전쟁을 이끌 것인가, 사랑하는 여인의 곁에 남을 것인가 같은 흥미진진한 갈등이어야 한다.
"등장인물은 뭔가를 원해. 그런데 원하는 걸 이루자니 문제들을 만나게 되는 거야. 그 등장인물에게 라이벌, 적들이 나타나는 거지."
- 맨 끝줄 소년, 47쪽
소년은 중산층 가정의 위선과 균열을 관찰하는 '관찰자'에서 '주인공'으로 변해간다. 집안에서 소외된 라파의 어머니에게 마음을 주고, 그녀를 집에서 탈출시키겠다고 헤르만에게 선언한다. 관찰자로만 머물던 소년은 그녀에게 시를 써주고, 마침내 입을 맞춘다.
"좋은 결말을 위해 필요한 두 가지가 뭔지 아니? 독자가 이렇게 말해야 해. "이건 예상하지 못했어. 하지만 다른 방식도 안되겠다." 이게 좋은 결말이야. 필연적이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거. 그럴 수밖에 없으면서 반전이 있는 거. 넌 그걸 찾아야 해. 독자에게 힘을 주거나 독자를 상처받게 하는 결말."
- 맨 끝줄 소년, 103쪽
소년이 만든 결말은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헤르만에게 상처를 남기고, 결국 스승과 제자이자 독자와 작가인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을 맞는다.
넷플릭스 드라마 <맨 끝줄 소년>과는 달리 원작에는 제자의 복수극 같은 건 없다. 우리 집이 아닌 친구의 집, 우리 가족이 아닌 친구의 가족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 관음이 소설이 되었을 뿐이다. 소년은 그저 충실히 자신의 이야기에 결말을 짓는다. 다만 스승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말이다.
소년은 다시 글을 쓰게 될까. 교실의 맨 끝줄에 앉아 친구들과 선생님을 관찰했던 소년이 학교를 벗어난다고 상상을 멈출 수 있을까. 그렇다면 소년은 또 다른 라파를 찾아 그의 집에 파고들어 은밀한 비밀을 탐닉하게 될까. 관음 없이 글을 쓸 수는 없는 걸까.
"여기에서 얼마나 많은 창문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지 보셨어요? 전 여기 앉아 생각해요. 저 집에서의 삶은 어떨까?"
- 맨 끝줄 소년, 113쪽
작가는 모든 것을 이야기로 만든다. 자신의 삶과 가족의 삶, 주변인의 삶까지도 이야기가 된다. 후안 마요르가처럼 삶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고, 자전적 소설이라는 장르 안에서 자신의 기억을 편집해 쓰기도 한다. 작가는 예술을 위해 주변인의 삶을 침해해도 되는가. 당사자의 허락이 없어도 ‘소설’이라는 이유로 용인될 수 있는가.
한국 문학계에서 작가의 ‘창작 윤리’ 논란이 벌어진 적이 있다. 정지돈 작가는 옛 연인에게 “자신과의 일화를 소설로 인용했다”는 항의를 받고 해당 소설의 판매를 중지했다. 김봉곤 작가의 <여름, 스피드>와 <시절과 기분>도 지인과의 사적 대화를 인용했다는 이유로 절판됐고, 그가 받은 젊은 작가상도 반납했다. (법원은 김봉곤 작가가 지인에게 소설 집필과 출판 사실을 사전에 동의받았다며 작가의 손을 들어줬다.)
헤르만은 소년의 소설을 읽으며 라파 가족의 사생활을 이야깃거리로 소비했다. 하지만 소설 속에 자신과 아내가 등장하자 더는 독자로 머물 수 없게 된다.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나의 삶을 글로 읽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관음은 즐겁지만, 관음의 대상이 되는 건 꺼림칙한 법이다.
* 사진은 프랑수아 오종의 영화 <인 더 하우스>의 장면들. 결말에서 스승 헤르만의 반응이 원작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