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대구시의 한 예술고등학교에 다녔다. 입학하고 첫 학기, 한 지하 교실에서 스텐실 기법 연습을 하던 때였다. 도화지에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멜라니 마르티네즈의 ‘Cry baby’ 가사를 적던 필자에게 한 동급생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자기도 멜라니 마르티네즈를 좋아한다고 했다. 둘은 그 순간부터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2026년, 친구가 된 지 10년째를 맞이했다. 그때 수줍게 말을 걸던 친구는 다가올 두 번의 전시 준비로 여념이 없는 미술 작가로 성장했다. 10년간의 우정을 기념하며, 김량희 작가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작가 김량희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회화를 작업하는 김량희라고 합니다.
에디터인 저를 비롯해 인터뷰를 읽을 독자들에게 어떤 호칭으로 불리길 원하시나요?
방금 스스로를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으니까 작가라고 불러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1. 예술가로서의 당신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을 진행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자연에서 가장 좋아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자연에서는 편견이 무용하기 때문에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집니다. 지금은 자연물 중에서도 바위를 소재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어요. 특히 바위의 거친 표면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흔히 바위는 단단한 이미지를 연상시키고, 상처는 극복해야 할 과제처럼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저는 바위가 오랜 시간 겪어온 풍화와 마모, 그 모든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 마음이 갔어요. 겉으로는 강해 보일지라도 누구에게나 연약한 부분이 있을 수 있죠. 바위는 그걸 꼭 숨기거나 억지로 극복해 낼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는 바위가 정직하게 깨져가는 모습에서 위로를 얻고, 그런 삶의 태도를 닮고 싶어요.

김량희 작가가 직접 촬영한 바위의 표면
작업을 진행하다가 어떤 순간에서 작품이 완성되었다고 느끼나요?
설명하기 어렵긴 한데, 스스로 느끼는 조형적 리듬감이 있어요. 부분적으로 보나 전체적으로 보나 마음에 드는 구성이 될 때 붓을 내려놓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의 작업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혹은 창작의 세계를 확장해 준 작품이 있을까요?
2022년에 직접 기획했던 폐가에서의 전시 〈썩빌〉을 통해 의미 있는 성장을 했던 것 같아요. 작가로서 전시 공간부터 직접 만드는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거든요. 과연 하고자 하면 다 할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이 전시를 끝내고 가장 먼저 그렸던 게 〈이끼와 바위〉라는 그림이에요. 크기가 210.0*150.0cm인데 학부 시절에 했던 것 중에 가장 크기가 큰 작업이었어요. 큰 화면에 큰 붓으로 색깔을 채워나가는 과정이 마치 넓은 들판을 자유롭게 달려 나가는 기분이 들어서 기억에 남아요. 이 그림이 지금 하는 모든 그림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끼와 바위, 2022, oil on Korean paper, 210.0 × 150.0 cm
똑같이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현재는 붓을 거의 들지 않고 다양한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저로서는, 다른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작가님이 대단해 보입니다.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게 만드는 동력이 무엇인가요?
저는 생각이 많은 편인데, 생각만 하다 보면 속에서 그게 다 엉키게 되거든요. 근데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 그게 가장 잘 해소되는 것 같아요. 말이나 글로 풀어내기 어려운 감정까지 전부 다 표현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가끔 이걸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어요. 관객과 작가 사이에서 새로운 영감을 주고받는 순간이 있거든요. 아무래도 그런 감동들이 다음 작업을 하는 데 큰 힘이 되어주더라고요.

〈이끼와 바위〉 작품 설치 현장
최근에는 문화예술계 내에서 직장인의 삶을 시작하셨죠. 소감이 어떠세요?
일을 시작하면서 예술은 결국 사람을 이어주는 일이라는 걸 더 실감하고 있습니다. 문화예술계에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는 분들이 정말 많아요. 개인을 ‘우리’로 이어주는 게 예술이 해야 할 일 아닐까요?
2. 향유자로서의 당신
저와 처음 알던 순간부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팝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의 굉장한 팬이시죠. 테일러 스위프트가 좋은 이유와 가장 좋아하는 곡을 독자들에게 영업해 주신다면?
제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사랑해 온 가수예요.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정말 며칠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 같지만, 가장 큰 이유를 고르자면 테일러 스위프트는 자신의 인생을 걸고 사랑을 이기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삶은 사랑 때문에 초라해지기도 하지만, 결국엔 사랑으로 빛나는 시간들이 엮어질 거예요. 어떤 사랑이든 그 종류에 상관없이요. 테일러는 그 모든 순간들을 세세하게 관찰하고 본인이 제일 자신 있는 방식으로 계속 세상에 얘기해줘요. 사람들은 노래를 통해 저마다의 경험을 떠올리지만, 신기하게도 모두가 비슷한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에 혼자가 아닌 기분이 드는 거죠. 지금 답변하면서 생각나는 노래는 5집 〈1989〉에 수록된 ’This Love’. 테일러 특유의 시적 묘사가 살아있어서 더 섬세한 곡이에요. ‘사랑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지만, 결국엔 다시 돌아온다.’ 그런 내용이에요.
테일러 스위프트 외에, 최근 가장 좋아하거나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대상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인물이 없다면 책, 영화, 시리즈, 그밖에 무엇이든 좋습니다.
하루에 한두 잔씩 오늘은 무슨 음료를 마셔볼지 고민하는 낙이 있어요. 특히 집에서 과일을 갈아서 직접 스무디를 만들어 먹는데, 다양한 레시피를 연구해 보는 재미가 있어요. 그리고 하루에 한 번쯤은 귀여운 동물 사진이나 영상을 보는 작은 힐링 시간을 가집니다.
3. 친구로서의 당신
우리 둘의 우정에서 가장 큰 특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내성적인 편이라 낯선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데요, 에디터님한테는 먼저 말을 걸어보고 싶었어요. 고등학교 1학년 전공 수업 때 에디터님을 처음 봤는데, 그림에 제가 좋아하는 노래가 적혀있는 거예요! 제 주변에서 그 노래를 아는 사람을 처음 봤어요. 한국에서 인지도도 낮고 굉장히 독특한 콘셉트의 가수였으니까요. 그래서 그날 수업 내내 속으로 어떻게 말을 걸어볼까 연습하다가 수업 끝날 때쯤 겨우 다가갈 수 있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 먼저 용기를 내기 참 잘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멋진 친구를 사귀게 됐으니까요. ㅎㅎ.
에디터인 저와 작가님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각각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희는 스스로 무얼 좋아하는지 계속 탐구하는 사람들인 것 같아요. 다른 점이라면 저는 예전엔 관심 없던 장르로도 서서히 취향을 넓혀가는 중인 듯하고, 에디터님은 본인이 좋아하는 걸 왜 좋아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에디터님이 어떤 작품에 대해 감상을 얘기해주면 저도 그 작품이 너무 궁금해져요. 아니면 내가 먼저 본 작품에 대해서 에디터님은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질 때도 있고요.

김량희 작가는 산에서 자연의 새로운 얼굴을 발견하듯, 자신의 취향과 경험도 점차 넓혀가는 중이다.
저와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교환 독서! 저희는 보통 어떤 작품에 대한 감상과 평가가 마무리된 후에 이야기를 나눠왔잖아요? 그런데 교환 독서를 하면 서로 어떤 부분에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바로바로 볼 수 있으니까 재밌을 것 같아요.
4. 당신으로서의 당신
저와 처음 만났던 2016년부터 지금까지 10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10년 전에 그려본 본인의 미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자면 어떤 점이 닮아 있으며 또 어떤 점이 다른가요?
10년 전이면 제가 미술을 배우러 낯선 도시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했을 때네요. 조용한 시골에서 살다가 처음 이 도시로 왔을 때 ‘머리 위로 기차가 지나간다. 신기하다.’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선명해요*. 10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 그 지상철을 타고 출근하는 사람이 되었네요. 어릴 때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들이 지금 당장 내 눈앞에 펼쳐졌을 때 새삼스럽긴 해요. 어떤 점이 닮았는지, 아니면 달라졌는지 정확하게 설명하긴 어려운 것 같아요. ㅎㅎ. 계속 변화하는 중이라 그런 걸까요? 어렵습니다.
(*에디터 주: 대구광역시에는 지상으로만 운행하는 도시철도 노선이 있다.)
작가님의 ‘코어’를 이루는 감정 키워드를 딱 하나 꼽는다면 무엇인가요?
‘꿈’으로 고르겠습니다. 저는 꿈을 이루는 사람보다는 꿈꾸는 방법을 잊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삶에서 어떤 실패나 좌절을 겪더라도, 나는 얼마든지 내가 좋아하는 걸 또다시 찾아낼 거다. 저는 지금 그런 의지로 살아가는 것 같아요.

작가 김량희의 중심에는 꿈이 자리잡고 있다.
직업, 성격, 취향, 취미 등 자신을 이루는 여러 아이덴티티 중 무엇이 가장 마음에 드나요?
지금은 ‘직업’인 것 같아요. 예술계에 종사할 수 있어서 큰 보람을 느끼는 나날입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기 전에, 아트인사이트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것이나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유롭게 부탁드립니다.
최근 들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있는 사회 초년생으로서의 제 모습이 스스로도 낯설어요.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즐거울 때도 있지만, 혼란스러울 때도 많습니다. 얼마 전에는 그런 착잡함 속에서 초심이란 한 번 잃어버리는 순간 다시 되찾을 수 없는 일시적인 마음가짐일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많은 것이 변하더라도, 처음부터 그대로 남아 있는 것도 있다는 걸 불과 며칠 전에 깨달았어요. 여전히 소중한 게 있다는 건 참 기쁘고 다행인 일이죠. 여러분께도 잠깐 잊어버렸지만 계속 간직해왔던 게 있다면 그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삶에서 그걸 계속 꺼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진제공 김량희
작가 인스타그램: @from.rianthu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