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훌쩍 왔다. 틈만 나면 해가 길어졌다거나 오늘은 진짜 한여름 더위만큼 덥지 않냐는 말을 인사 대신 나눌 정도로 성큼성큼. 언제 앙상한 가지를 보여주었냐는 듯이 나무는 초록색 잎을 껴입었다.
대게 그렇듯 푹푹 찌는 더위와 장마를 동반하는 여름은 각가지 감정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서점에서 늘 붐비지 않는-슬픈 일이다- 시/에세이 코너를 관심 있게 들여다보는 이는 알겠지만, 문학계에도 이런 ‘여름’ 바람이 한바탕 불기도 했다. 여름을 노래하는 시가 대거 등장했고, 누군가는 이걸 “납작하다”라거나 “무한히 ‘리부트’되는 여름”*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아무렴 어떨까. 이런 여름이든 저런 여름이든, 여름이 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사실 아닐까.
*박상수의 평론 ‘영원한 베타 테스트로서의 여름—최근 한국시에 나타난 ‘포스트세속주의’의 한 경향에 관하여’(문학동네, 2025)에서 인용했다.
영화 <여름의 카메라>는 “첫사랑의 설렘과 아빠의 비밀이 필름 카메라 사진처럼 천천히 번져가는 퀴어 성장 무비”다. 십 대 소녀 ‘여름’(김시아 분)은 사고로 아빠를 잃고 줄곧 들지 못했던 카메라를 첫사랑을 통해 다시 손에 쥐게 된다. “너를 보면 셔터소리가 들”린다는 ‘여름’의 고백엔 첫사랑이 가져다준 설렘이 그대로 묻어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첫사랑을 시작한 여름은 멈췄던 셔터 소리를 듣고,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아가는 시간을 통과한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에 진실의 여부를 가늠할 수 없는 이유로 관계의 끝을 맞이한다.
어쩌면 두 사람분의 ‘첫사랑 서사’로 생각했을 땐 단순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의 독창성이나 사건의 의외성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쉽게 공감을 일으키기도 하는 풋내기의 첫 사랑담이니까.
성스러운 감독은 첫 장편 데뷔작인 이번 영화를 발표하며 “LGBTQIA+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세계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니 그 납작하고 귀여운 사랑은 그것을 보장할 안전한 세계를 말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여름의 카메라>는 한 소녀가 첫사랑을 겪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빠의 죽음을 마주해가는 딸의 이야기기도 하다. 아빠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과 그 죽음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이 자살이었는지 의구심이 드는 상황에서 차마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는 여름은 그대로 또 한 번의 여름을 맞이한다. 아빠의 카메라 속 필름에 등장한 ‘마루’(곽민규 분)를 마주하고 몰랐던 장면들을 하나씩 마주하게 된다.
아빠의 예전 애인과 그 아빠의 딸은 이제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눈다. 여전히 변하지 않았던 똑같은 습관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각자 다른 시간대의 한 사람, 남자 친구이거나 아빠였을 사람의 이야기를 두 사람은 공유한다. 씁쓸한 첫사랑의 결말을 통해 ‘마주하는 법’을 배운 여름은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도 용기내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생겼다.
“나는 레즈비언”이고 “아빠는 자살인 것”이냐고 물을 용기가 생긴 것이다.
영화 속 여름은 첫사랑이나 아빠의 죽음과 같은 개인적 서사에서 계단을 오르며 차근차근 성장하는 것과 동시에, 외부의 세계에선 ‘별일’이라고 부르는 퀴어로서의 정체성은 가뿐하게 돌파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건 어쩌면 감독이 의도한 ‘안전한 세계’의 장면이자 여름의 한 챕터이지 않을까.
누군가가 안전할 수만 있는 세계가 아직은 영화 속에만 그려진다는 게 아쉬운 여름이다. 때로는 카메라가 되어, 렌즈를 가득 채운 초록이 되어, 흔들리는 배경 속 피사체가 되어 여름과 여름의 카메라를 맞이한다. 이런 여름이든, 저런 여름이든 어떨까.
중요한 건 여름이 왔다는 사실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