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안의 외침 구역, '성황당'이라는 무대
본 연극은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진행되었다. 여러 극장이나 공연장을 갈 때, 자리를 찾아가기 위한 여정이 분위기를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두산아트센터 건물에 들어와 아래로 내려가야 했던 계단은 괜히 긴장감을 조성했다. 지하라는 공간이 일상 속에 자주 마주치는 공간이 아니라 그런 것 같다.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갈수록 위의 일상은 점점 멀어지고, 무언가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들어간 공연장은 성황당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웅장한 나무들과 그 사이를 엮는 새끼줄은 왠지 들어오면 안 되는 영역에 들어온 듯했다. 밖에 시끄러운 광장시장을 지나 들어온 인간세계와는 정말 다른 분위기를 알리려는 듯, 외부세계와의 단절을 요구하였다. 성황당은 전통적으로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공간이다. 이 무대는 그저 배경이 아니라, 불안과 한을 토해내는 제의의 공간으로 설정된 것이다.
특히 이 무대장치는 1막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큰 역할을 했다. 성황당의 무대를 배경으로 배우들의 독백들로 대부분 이루어진 1막은 대화를 주고받는 드라마 방식이 거의 쓰이지 않았다. 배우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관객을 향해, 혹은 허공을 향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내게 오히려 이러한 성황당 속에 갇혀진 귀신들의 한소리처럼 느껴졌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본인들만의 불안이 곡소리처럼 흘러나왔다.
무대 위의 여성들은 살아있지만, 동시에 이미 죽은 자들처럼 보였다.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들,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존재들이 이 성황당에 모여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왠지 관객들에게도 나중에 이곳에 와서 한풀이 굿판을 벌이라는 의미 같았다. 당신의 불안도 여기에 놓고 가라고, 여기서 소리쳐도 괜찮다고 말하는 듯했다.
2. 독자적인 주체들, 이후의 할머니가 된 서로
연극의 1막은 배우들이 직접 이야기들을 작성했다고 한다. 또한 각자 맡은 역할의 이름이 배우들 본연의 이름을 쓰는 만큼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이오진 연출은 배우들을 선정하는 과정에 있어 가장 다양한 환경에 놓여있는 사람들, 서로 만날 기회도 없었으며 그들 스스로가 고유한 사람들을 선정했다고 한다.
이런 선택은 매우 의도적이다. 연령대도, 경력도, 살아온 환경도 모두 다른 이들이 한 무대에 모였다. 어떤 이는 20대 초반이고, 어떤 이는 중년의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여성으로 살아가며 느끼는 불안이다. 다양한 연령대와 환경이 느껴지듯 다양한 불안의 형태가 느껴졌다. 경제적 불안, 관계의 불안, 미래에 대한 불안, 늙어가는 것에 대한 불안에 대한 불안. 특히 현재를 말하는 1막은 각자 놓인 환경과 그 이후에 꿈꾸는 미래에 대해 불안정하다고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동시에 같은 무대 위에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위로가 되는 듯했다. 나만 불안한 게 아니구나. 우리 모두 불안하구나.
그래서 오히려 2막은 딜라이트하다. 어느새 할머니가 되고, 혼자라면 나약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각자가 서로가 되어주었다. 비혈연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은 사회적 가족 및 생활 동반자 법이 더 발전한 미래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1막에서 각자 고립되어 있던 여성들이 2막에서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 이들은 함께 늙어가기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혈연이 아닌 선택으로 이루어진 가족. 이것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도 1인 가구가 증가하고, 비혼이 증가하고,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가 해체되고 있다. 이 연극은 그 이후의 삶을 상상한다. 우리는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 누구와 함께 늙어갈 것인가?
가능성이 충분한 듯한 미래의 캐릭터들이 살고 있는 모습은 이야기 방식으로 진행되서 그런지 드라마틱하게 느껴졌다. 할머니들은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춤을 추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웃는다. 이들의 관계는 때로 갈등하고, 때로 화해한다. 완벽한 유토피아가 아니라 현실적인 삶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이들은 1막의 고립된 불안을 벗어났다. 이러한 가능성의 미래들은 관객들에게 웃픔을 주었다. 웃기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도 희망적이다.
3. 음악, 불안을 엮는 콜라주
이렇게 기이한 관계를 연결해주는 것은 결국 '음악'이 아니었나 싶다. 이 연극은 뮤지컬의 형식을 빌려왔지만, 전통적인 뮤지컬과는 다르다. 노래가 서사를 전달하거나 감정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래는 이질적이고, 불편하고, 예상을 깨뜨린다. 이 연극을 가장 잘 표현하는 넘버 '어떤 여자들은'의 가사는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한다. 각자의 삶이 있고, 각자의 선택이 있다. 반복되는 리듬 속에서 무언가 어긋나는 느낌, 춤추고 싶으면서도 불편한 느낌.
반복하고 고요하게 에너지를 표현하고 싶었다는 연출의 의도처럼, 음악은 각자의 불안을 하나로 묶지 않고 콜라주처럼 병치시켰다. 콜라주는 서로 다른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그림을 만드는 기법이다. 하지만 그 조각들은 여전히 각자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이 연극의 음악도 그렇다.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모여 하나의 곡을 이루지만, 각자의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불안을 풀 수 있을까? 아마도 풀 수 없을 것이다. 불안은 살아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이 연극을 보고 나오면서, 불안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조금은 춤추는 할머니라는 미래와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