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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아픔을 온전히 극복하는 건 불가능하다. 상처가 아물어도, 상처를 받은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다. 따라서 상실의 아픔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 사소하게는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꿈을 포기하는 것,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 나아가 사랑하는 이를 다른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것까지. 삶은 슬픔을 받아들이는 것, 사랑을 놔주는 것, 켜켜이 쌓인 상흔을 달고 괜찮은 척 웃으며 속으론 우는 것이다.


삶에 주어진 시간이 하루뿐이라면 어떨까. 물리적인 죽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잠에 들면 잠들기 전 겪었던 일들의 기억이 전부 지워지고, 소중한 이들을 매일 처음 알게 되는 인생 말이다. 완전한 망각이 일상이 된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도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일본 작가 이치조 미사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초연 뮤지컬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이하 <오세이사>)의 여자 주인공 ‘마오리’는 사고로 인해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마오리는 잠이 드는 순간 잠들기 전의 일들을 모두 잊는다.


선행성 기억상실증은 외상이나 질병으로 인해 뇌가 손상되기 전의 일들은 기억하지만, 손상 후 새롭게 접한 정보는 기억하지 못하는 증상을 뜻한다.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지 못하며 발생하는 병이다. 선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으로는 영화 <메멘토>, <첫 키스만 50번째> 등이 있다.


<오세이사> 원작 소설은 일본에서 4,607:1의 경쟁률을 뚫고 제26회 전격소설대상 ‘미디어워크 문고상’을 수상한 메가 히트작이다. 일본에선 동명 영화로 2022년에 개봉했으며, 한국에서도 2025년 하반기 개봉을 목표로 제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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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러리컴퍼니와 유니버셜라이브가 공동 제작한 창작 초연 뮤지컬 <오세이사>는 서울 코엑스 신한카드 아티움에서 2025년 6월 13일에 개막했다. 8월 24일에 막을 내리는 극은 남자 주인공 가미야 도루 역에 이준, 윤소호, 김인성, 여자 주인공 히노 마오리 역엔 장민제와 솔빈이 캐스팅됐다. 마오리의 친구인 와타야 이즈미 역엔 오유민과 나현영, 도루의 친구가 되는 사에구사 켄토 역할엔 신은총과 정지우가 출연한다. 도루의 아버지인 가미야 유키히코는 임기홍과 김태한, 도루 누나 가미야 사나에는 김강희가 원캐스트로 연기한다.


뮤지컬 <오세이사>는 1막 85분, 2막 45분으로 1막 러닝타임이 2막보다 거의 두 배가 길다. 이는 남자 주인공 ‘도루’ 서사에 얽힌 비밀을 고려한 의도된 구성이다. 또한 주인공들이 고등학생일 땐 1막, 3년이 지나 성인이 된 시점은 2막으로 전반부와 후반부 분위기 차이가 극명하다. <오세이사> 1막은 전형적인 일본 하이틴 로맨스 겸 성장물 클리셰를 충실히 따른다.


평범한 고등학생 도루는 친구들에게 휘말려 마오리에게 얼떨결에 고백한다. 마오리는 아무렇지 않게 도루의 고백을 받아들이며 세 가지 조건을 건다. 학교에선 말 걸지 말기, 연락은 최소화,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지 말기. 선을 긋는 조건부 계약 연애를 제안한 건 마오리지만, 그녀는 도루를 ‘기억하려는 듯’ 도루의 사소한 것들까지 전부 기록한다. 가짜 감정이 어느덧 진짜가 된 순간, 도루는 마오리가 선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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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루의 가족 이야기도 극의 중요한 축이다.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신 도루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다. 도루는 아쿠다가와상 유력 후보인 재능 있는 소설가 ‘니시가와 케이코’를 좋아한다. 니시가와 케이코는 집을 나간 도루 친누나 사나에의 필명이다. 소설을 쓰기 위해, 아버지와의 갈등을 피해 집을 떠난 사나에는 아쿠다가와상을 수상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린다. 가장 행복한 순간, 오랜만에 집에 들어온 사나에는 아버지를 마주한다.


남매의 아버지 유키히코는 아내를 잃은 후 집에 틀어박혀 소설을 썼다. 불행하게도 아버지와 딸의 재능은 달랐다. 사나에가 소설가로 성장하는 동안, 아버지는 글을 어디에도 보여주지 않고 집에만 쌓아둔 채 회피했다. 어머니의 죽음, 소통의 부재로 쌓인 오해, 재능의 차이 등으로 인해 앙금이 쌓였던 부녀는 우여곡절 끝에 극적으로 화해한다. 그 모습을 지켜본 도루는 이젠 ‘진짜’ 여자 친구라고 할 수 있는 마오리에게 이 순간의 가장 순수한 마음을 고백하기로 결심한다. 도루가 마오리에게 달려가는 모습으로 1막은 끝난다.


1막에선 공원, 수족관, 노래방, 불꽃놀이 등 일본 하이틴 로맨스 장르에 공식처럼 등장하는 장면들이 펼쳐진다. 무대 연출은 감성적인 분위기의 LED 영상 그래픽과 회전무대, 계단을 활용했다. 뮤지컬 넘버보단 가요의 멜로디와 가사가 연상되는 넘버들 또한 독특하다. <오세이사>의 넘버는 발라드, 모던록, 인디팝, 신스팝, 포크, 스윙 등 다양한 장르로 구성됐다. 원작의 유명한 대사들을 그대로 차용한 부분도 있기에 몇몇 대사에선 이질적인 정서가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만들어진 가사와 곡은 국내 관객에게 익숙하고 편안하게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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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소설이나 영화를 접하지 못했다면, 2막은 예상 밖이다. 도루가 세상을 떠난 후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도루와 사나에의 어머니는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나에가 도루에게 건강을 잘 챙겨야 된다며 걱정하는 복선 대사가 1막에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남자 주인공이 극의 중반부가 지난 시점에 벌써 사라진다는 것, 1막 내내 환자로 묘사된 마오리가 삶에선 시한부가 아니었단 게 고정관념과 로맨스 클리셰를 보란 듯이 깨는 반전이다. 로맨스 장르의 시한부 주인공 타이틀은 당연히 여자 주인공이 가져갈 거라고 흔하게 생각하니 말이다. 전반부의 익숙한 전개는 중후반부 반전을 위한 빌드업인 것이다.


1막에선 켄토가 부르는 쇼스타퍼 성격의 넘버들(‘TEST’, ‘친구여’)로 인해, 잔잔하고 서정적인 넘버들 사이에서 분위기가 확실히 환기된다. 하이틴 로맨스·가족 드라마였던 1막과는 달리, 2막은 슬프고 애틋한 멜로다. 따라서 넘버 분위기도 극의 분위기를 그대로 따라간다.


1막은 도루와 마오리의 연애, 도루의 가족사를 다뤘다. 2막은 남은 사람들, 즉 도루를 사랑했지만 기억은 없는 마오리와 도루의 가족들, 친구들의 이야기이다. 이즈미와 켄토는 마오리의 기록들에서 도루 이름을 전부 지운다. 그녀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지켜주는 것이다. 빼곡하게 기록된 도루와의 추억들은 이즈미, 켄토와의 우정으로 대체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과 공허함을 간직한 채 살아가던 마오리는, 예전에 자신이 그린 그림 속 도루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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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사라져도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오리는 마음속 도루와 재회한다. 선행성 기억상실증이 호전되고 있기도 하지만, 그녀에겐 절차기억(procedural memory : 운동과 연관된 특정 작업을 의식 개입 없이 실행하게 하는 기억. 공 던지기, 운전, 피아노 연주, 자전거 타기처럼 반복 학습된 행동을 몸이 기억하는 것)이 남아 있었다. 마오리는 도루와 자전거를 타던 추억이 몸에 새겨져 있단 걸 깨닫고, 도루의 영혼과 만난다. 1막 엔딩이 마오리에게 진심을 고백하러 달려가는 도루였다면, 2막 엔딩은 잃어버린 도루를 마오리가 찾아내는 것이다.


<오세이사>는 반전과 예상 밖 전개, 주제 의식이 원작 소설에서부터 뚜렷한 작품이다. 감정을 섬세하게 다룬 로맨스·멜로 장르에 충격적인 반전과 미스터리 요소(도루를 사랑했단 증거마저 모두 잃은 마오리가 도루를 기억해 내는 후반부)가 더해져 몰입력을 높인다. 이야기가 가진 힘이 뛰어난 작품이다. 그렇기에 뮤지컬에선 꼭 알아야 할 정보와 감정선, 이를테면 도루의 죽음에 얽힌 중요한 서사가 지나가는 대사 몇 마디로 처리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04 뮤지컬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_내일의 네가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_김인성, 솔빈.jpg


 

겉으론 평범해 보이고 결핍도 많지만 결국 가장 용감한 선택, 다른 선택을 하는 게 주인공이 갖춰야 할 덕목이다. <오세이사>의 남자 주인공인 도루 또한 극 초반부엔 지극히 평범해 보인다. 마오리와의 계약 연애도 상황에 휘말려 얼떨결에 시작했고, 친구들과 가족들을 대하는 모습도 그저 착하고 순하게만 보인다.


하지만 어머니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알고, 자신 또한 아픔을 물려받았다는 걸 똑똑히 알면서도 사랑 앞에서 솔직해진 도루의 용기는 비범하다. 마오리가 자고 일어나면 자신을 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오늘’의 마음을 고백하러 달려간다. 마오리는 그의 고백을 내일이 되면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에게 왜 마음을 보여줬을까.


이유는 분명하다. 생은 허무할 정도로 짧고, 언제 어떻게 끝을 맺을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기억 못 할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순수한 진심을 보여주는 게 찰나의 인생을 가장 뜨겁게 만드는 일이다. 하지 못한 말, 남긴 후회는 세상을 떠날 때 누군가에게 물려줄 유산이 될 수 없다. 기억은 사라져도 마음은 지워지지 않으며, 사라질 짧은 순간들이라도 그 순간들이 모이면 시간, 세월, 영원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영원은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도루의 마음을 끌어안고 살아갈 마오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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