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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건들, 역사적 흐름을 현미경을 통해 보는 것처럼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제로 존재했거나 혹은 존재했을 수도 있는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정현 작가님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기록된 역사에서 짧게 언급되거나 아예 언급되지 못한 존재들을 문학을 통해, 이야기를 통해 불러오는 일이, 과거를 말하지만 실은 미래와 연결되어 있고 한계와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목소리를 충분히 얻지 못한 과거의 인물을 비추는 것은 곧 현재의 소수자들을 비추고, 과거와 현재의 가능성을 넓히는 일이었다.

 

현실에는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항상 사람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일이 벌어지고, 그건 과거의 현실 또한 마찬가지였다. 보수적인 사회여서, 유교 국가여서, 여성이 2등 시민이어서, 성소수자의 존재를 지우는 시대여서 아예 일어나는 게 불가능한 일이란 없었다. 역시나 좋은 의미로건 나쁜 의미로건.

 

상상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경계 안에 가두거나 한계를 미리 지레짐작하면 안 된다. 생각하는 만큼 가능성이 찾아올 수 있다. 이런 말을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되뇌던 시간에 한정현 작가님의 작품은 증거와도 같았다.

 

그런 한정현 작가님의 신작이 무려 모험 판타지라는 소식에 신기한 마음 반, 반가운 마음 반이 되어 서둘러 책을 펼쳤다.

 

 

 

엘프와 드래곤, 그리고 절반의 존재가 있는 세계


 

이야기의 화자는 중앙 정부에 의해 지정된 구역에서 살아야만 하는 하프엘프 루비다.

 

2천 년 전, 인간들이 타 종족과의 교배를 연구하며 하프엘프, 하프드래곤 등 절반의 존재들을 만들어낸다. 교배를 통해 엘프들의 외적인 아름다움이 인간과 합쳐지기를 바랐으나 실험은 인간들의 기대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엘프들에게 있어서 궁극의 '미'는 지혜인 까닭에 하프엘프들이 전부 노인의 형상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실험을 통해 태어난 절반의 존재들을 내팽개치듯이 대한다. 예측할 수 없기에 통제할 수 없으니 인간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며 통행증 없이는 지정된 구역인 게토를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이런 세계관 속에서 여관을 운영하는 루비는 어느 날 객실 정리를 하던 중 반려 인간에게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하프드래곤 수에게서 예언을 듣는다. 바로 오래 기다린 손님이 당도한다는 예언이다. 그리고 얼마 뒤, 루비는 청소하던 중 자신의 할머니 비소에게 누군가가 남긴 편지를 발견한다.

 

자신을 끝까지, 제대로 사랑해 줄 인간을 만나기 위해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인간을 사랑해 온 할머니 비소는 루비에게 불가사의하다. 비소가 사랑한 인간들은 한국전쟁 당시의 군인부터 월북 대학생, 제철소 하청 노동자 등 한국의 근현대사를 총망라한다. 망하는 사랑만 했던 비소로 인해 다양한 우여곡절을 겪은 루비는 그 편지가 비소의 과거 연인 중 한 명이 쓴 것이란걸 알아본다.

 

 

 

연대가 아닌 연합


 

긴 모험이 시작되려는 이번 권의 끝에서 예언대로 한 손님이 찾아온다. 비소의 과거 연인과 관련된 사람인 '명'이다. 이를 기점으로 세 존재는 사랑의 흔적을 따라가는, 사랑을 찾으려는 연합을 맺는다. 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치매 환자' 또는 '악마'가 되는 하프 드래곤, 한때 소설가로 활동했던 하프엘프, 그리고 한 인간의 연합이다. 종족도, 처한 상황도, 성격도 다르다. 하지만 이들을 엮어주는 '사랑'이라는 꿈, 기억 또는 흔적이 있다.

 

한데 이들이 '연합'이란 단어로 서로의 관계를 이름 붙이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연합이죠."

"네? 뭐라고요?"

"같은 목적을 향해 인간들이 잠시 같은 편인 척하는 그거요. 사랑만큼이나 배신을 내포하는 그거요."

배신이라는 말에 끙, 하면서도 그제야 루비도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어쩌면 그편이 더 솔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루비와 명, 그리고 텔레비전을 보던 수가 동시에 중얼거렸다.

"사랑과 연합, 이로군요."

 

 

셋의 모험이 일종의 '연대' 같은 것이냐는 루비의 질문에 인간인 명이 '연합'이라고 정정하며 '연대'는 사랑만큼이나 배신을 내포한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연대'가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와는 별개로, 너무나 쉽게 '연대'를 말하거나 '연대'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모두 지워버린 채 그저 아름답게만 묘사하는 일에 의문을 가지고 있던 차에 반가운 대목이었다. 아무래도 두근거리는 모험에 '연합'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기도 했다.

 

그리고 문득 의문이 생겨서 단어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내려놓고 국어사전을 검색했다.


 
연합(聯合)
1. 두 가지 이상의 사물이 서로 합동하여 하나의 조직체를 만듦. 또는 그렇게 만든 조직체.
2. 하나의 관념이 다른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현상. ‘기차’로 ‘여행’을 떠올리는 따위의 현상이다.
3. 소쉬르의 언어학 이론에서, 형태나 의미가 유사성이 있는 언어 요소들은 사람의 기억 속에서 서로 연상되어 한 무리를 이루고 있다는 이론.
 
 
연대(連帶)

1.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짐.

2.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있다기엔 서로 살아온 경험도, 세상에서 놓인 위치도 다르다.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지기에는 목적이 다르기에 같은 과정에서 각기 다른 경험을 할 수도 있다. 검색 결과를 보며 과연 그렇군,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시공간에 존재하는 낯선 '판타지'의 존재들


 

기록과 흔적, 그 사이사이에 상상이 스며들어 가능성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한정현 작가님의 신작이 모험 판타지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작품 속 세계는 우리가 사는 현실과 완전히 다른 시공간이 아니다. 김포공항, 관동대지진, 일제강점기 등 우리에게 익숙한 장소나 역사적 사건, 시기들이 담겨 있다. 마치 평행 우주의 한 축 처럼 엘프와 드래곤이 존재하고, 인간에 의해서 불완전한 절반의 존재인 하프엘프, 하프드래곤이 존재하는 세계다.

 

언뜻 현실의 세상에 존재하기엔 낯선 것 같은 판타지적 존재들의 눈에 비친 인간의 세상은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한국의 역사를 다르게 볼 수 있는 창을 열어준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절반의 존재들은 소수자를 대하는 인류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이제 막 시작된 0장의 이야기, 사랑의 흔적과 사랑 그 자체를 찾아 떠나는 모험이 막 시작되는 부분에서 끝이 난다. 이후의 이야기에서 이들이 만날 흔적은 무엇일지, 사랑은 무엇일지, 그 상상과 가능성의 세계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0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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