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억 분의 1’은 요즘 이목을 끌고 있는 인생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태어나기’ 버튼을 누르면서 인생이 시작된다. 게임은 시작 페이지에 다음 문구를 띄운다.
지금 이 순간에도 1초에 네 명꼴로 아기가 태어납니다.
그중 한 명이 되어 단 한 번뿐인 삶을 끝까지 살아봅니다.
어디서, 누구의 아이로 태어날지는 고를 수 없습니다.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Amit의 성장기
나는 ‘Amit Kumar’. 인도 첸나이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남자아이다. 가족은 힌두교를 믿으며 위로 2세 누나가 있다.
무럭무럭 자라 4세가 되자 갑자기 집에 빚이 생기면서 형편이 어려워진다. 이런 장면이 나올 때마다 식겁했지만, 지켜보니 집안 형편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는 것이었다. 다섯 살이 되자 원하는 것을 입력하라는 창이 떴다. 나는 “배불리 먹을 식량”이라고 적었다. 그렇다고 게임이 무언가를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바라는 마음을 품은 채 계속 살아가는 것이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치며 관심 분야가 생기기 시작한다. 성적이 좋지 않아 자주 꾸중을 듣지만, 좋은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특정 과목에 흥미가 생기는 등 어른들의 영향을 쉽게 받기도 했다. 이는 내가 학업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되어 주었다.
곧이어 예고에 지원할지, 일반고에 진학할지, 아니면 학업을 포기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Amit이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그리고 좋아하는 것에 도전이라도 해 봤으면 하는 마음에 예고 지원을 결심했다. 결국 떨어졌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할지 결정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대학 진학률이 그리 높지 않다는 설명을 보니, Amit이 대학에 진학한다면 더 나은 위치에 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지원했고, 다행히 합격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Amit의 인생에 곧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말았다.
전공은 그가 하고 싶어 했던 디자인으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빚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 밤도 있었고, 갑작스럽게 소매치기를 당하기도 했다. 취업 준비는 고통스러웠지만, 다행히 일자리를 얻어 돈을 벌기 시작한다.
Amit의 새로운 가족과 죽음
Amit은 몇 차례 연애하지만, 나는 그의 이른 결혼이 커리어를 망칠까 봐 망설였고, 그 과정에서 이별을 겪는다. Amit이 망설이는 것을 상대방이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나는 Amit이 자신이 좋아하는 디자인에 좀 더 집중했으면 했다. 무엇보다 자꾸 중매로 짝을 만나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거절하면 가족 관계가 나빠지는 것은 덤이었다.
결국 Amit은 41세에 연구원으로 일하는 ‘Rani’와 2년간 연애한 끝에 결혼한다. 이 과정에서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Rani의 직업이 연구원이 아니었어도 결혼을 결심했을까? 몇 차례 연애 끝에 결혼을 포기한 데에는 상대방의 직업도 영향을 미쳤다. 물론 시뮬레이션 게임이라 상대방에 대한 Amit의 애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배우자의 수입이 많다면 Amit의 삶이 좀 더 편해질 것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말았다.
43세에 첫 자식인 ‘Rakesh Kumar’가 태어난다. 나이가 든 Amit은 이제 건강을 위해 시간제로 일하기 시작한다. 아들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 같아 모른 척 웃어 주기도 하며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보낸다. 그러던 중 아들이 갑자기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내가 한 선택들이 Amit의 삶을 만들어 간다고 생각했지만, 그 삶의 모든 순간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들의 죽음으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Amit은 숨이 차서 병원을 찾았고, 폐 기능이 많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빚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도 돈 문제는 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누나가 67세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Amit도 생을 마감한다. 사인은 만성폐쇄성폐질환이었다. 인생의 마지막에 뜬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재산은 많지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곁에 가족이 있었습니다.
Amit의 삶을 돌아보며
게임 속 인물은 가상 인물이지만, 80억 분의 1이라는 확률을 뚫고 태어난, 어쩌면 실제 삶의 확률과도 닮은 나의 아바타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태어난 Amit은 수십억 분의 1의 확률로 태어난 나와 다를 게 없다.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올 때마다 고심해서 선택하고,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풍족한 미래를 그리며 나아갔다. 결혼도, 학업도, 하다못해 행인을 어떻게 대할지도 신중하게 골랐다. Amit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며 살아가고 소득 수준도 상위권에 들었으니 꽤 만족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행은 갑자기 찾아온다고 했던가. 아들의 죽음은 Amit도 나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뿐인 아들 Rakesh가 18세에 세상을 떠나자 Amit의 건강도 점차 나빠지는 듯했다. 그런데 돌아보니 건강이 나빠질 수 있다는 암시는 계속 나타났던 것 같다. 그때는 별일 아니라고 여겼던 것들이 뒤늦게 마음에 걸렸다.
좋은 삶을 판단하는 기준
Amit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인생 시뮬레이션이다 보니, 나는 Amit이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모든 선택지를 살펴봤다. 그러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의 기준을 발견했다. 어떤 선택지를 마주하더라도 내 판단은 결국 소득과 직업으로 귀결되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을 Amit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대학은 웬만하면 가는 게 좋고, 결혼 상대의 직업을 따지며, 남을 도울지 말지도 미래를 생각해서 결정했으니 말이다.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던 나는, 내가 정작 좋은 삶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인지 의문이 들었다.
플레이한 삶에 대한 소감을 적는 칸이 있었다. 한 단계씩 선택지를 골라 가며 꽤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는 예상했던 대로 허무하다고 적었다. 그리고 스크롤을 내리니 ‘Amit에게 남기는 말’을 쓰는 칸이 있었다.
이 부분에서 아차 싶었다. 나는 Amit의 삶에 너무 무례한 말을 남기고 만 것이다. 만약 Amit이 나였다면, 나는 이렇게 무례한 말을 스스로에게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을까? 내 삶에 대해서는 정성을 들이는 동시에 무감하면서, 제3자의 삶에는 예의를 차리는 모순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결국 Amit에게는 아무런 말도 남기지 못했다. 고생했다고 말하기에는 내가 직접 그의 삶을 플레이했고, 남의 인생이라고 생각하니 무슨 말을 남겨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Amit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세웠던 기준이 어느새 그의 삶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어 있었다.
80억 분의 1로 살아간다는 것
플레이를 마친 뒤 다른 플레이어의 삶을 볼 수 있는 ‘함께 나눈 삶’에 들어갔다. 돈을 많이 벌었다고 좋아하는 사람, 죽은 딸에게 다음 생에는 더 오래 함께하자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 꿈꾸던 일에 번번이 실패했다는 사람까지. 삶에 대해 누군가는 성취를, 누군가는 상실을 이야기한다.
무엇이 좋은 삶인지 더 알 수 없어진 게임이다. 만족할 만한 삶을 위해 계속 다시 태어난다면 바라던 대로 만족스러운 삶을 얻을 수 있을까? 다시 플레이한다고 해서 지나온 모든 삶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을 것 같다.
자극적인 후기만 접하고 회의적인 마음으로 게임을 시작했던 내가 우스워지는 순간이다. 내심 선진국에서 태어나기를 바랐던 마음도 다시 돌아보게 됐다. 나는 태어나는 조건만으로도 삶의 가능성을 가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른 플레이어들도 꼭 거창한 목적을 가지고 게임을 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80억 명 중 하나로 태어나 그 삶을 끝까지 살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나의 세상 속 삶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나의 선택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은 아니며, 내 삶이라고 해서 모든 순간을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임에서는 10분도 되지 않아 한 사람의 삶이 시작되고 끝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내 삶의 끝을 알지 못한 채 그 안을 살아가고 있다. 내가 어떤 죽음을 언제 어떻게 맞이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 번 태어난 80억 분의 1로서 내게 주어진 삶을 끝까지 살아 보는 일일 것이다.
* 이미지 출처: '80억 분의 1'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