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각자의 ‘모양’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겉모습은 중요하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다루는지의 관점에서 그렇다.
슬리퍼를 신은 사람과 구두를 신은 사람의 걸음걸이는 다르고, 그 걸음걸이는 내 안의 리듬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터벅- 터벅- 걷는 리듬은 나를 더 여유롭게 만들 수도, 게으르게 만들 수도 있고. 또각- 또각- 걷는 리듬은 나를 더 예민하게 만들 수도, 더 당당하게 만들 수도 있다.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변화는 분명히 일어난다.
어떨 때 우리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 내면을 속이려는 듯, 또는 깊숙이 감춰둔 무언가를 끌어올리려는 듯 겉모습을 파격적으로 바꾸기도 한다. 기분 전환이 필요하면 머리를 자른다든지, 자존감이 낮아질 때면 다이어트를 시작한다든지 하는 것처럼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언젠가 드랙(drag)을 한 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나를 몰라볼 정도로 짙은 화장과 화려한 의상이라는 모양이 어쩌면 나를 좀 더 당당하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아니, 내가 나를 좀 더 믿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러니 가면이나 퍼펫(puppet)에 이끌리는 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본래 가진 모양의 제약을 벗어나 내가 원하는 모양을 아무렇게나 고를 수 있는 방법이니. 처음으로 가면에 대한 환상을 느꼈던 건 어느 페스티벌에서 BABO라는 밴드를 보고 나서였다. 그 가면을 벗으면 어떤 얼굴이 나올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나를 홀렸던 것은 그저 커다랗고 흰 동물의 얼굴에 죄수복을 입고, 한쪽 어깨에 기타를 두른 채 무대 위에 서 있던 그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번 여름, 뚝섬한강공원에서 열렸던 ‘서울거리예술축제’의 참가작 중 하나였던 ‘사라지는 나(Je m'évanouis)’는 퍼펫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그늘 하나 없는 강변을 걸어 도착한 공연장(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은 강렬한 햇빛이 그대로 내리꽂히는 광장 한복판이었다. 깔고 앉으라고 준 돗자리를 가리개로 쓰고, 아찔한 더위에 반쯤 혼미해진 상태로 인형 조종사 아그네 무랄리테(Agnė Muralytė)가 걸어 나오는 모습을 마주했다.
더운 날씨에도 몸에 달라붙는 검정 목티, 그리고 5부의 검정 레깅스를 입고 있던 아그네가 인사를 할 때까지만 해도, 그녀가 들고 있던 거대한 퍼펫은 영혼 없는 인형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그네가 바닥에 눕고, 공연이 시작하자마자 그녀는 사라졌다. 대신 붉은색 머리와 콧수염, 튀어나올 듯한 초록 눈과 자글자글한 피부를 가진 남자가 나타났다. 그가 시선을 옮기면 눈을 마주친 듯했다. 공연 중간 중간 아그네는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길 반복하고, 나중에는 남자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다. 남자도, 아그네도 살아 있지만 누가 누구를 움직이고 있는지는 쉽게 말할 수 없다.
나는 그 둘이 그렇게도 뒤엉킬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 남자가 아그네의 또 다른 모양이라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만약 내가 내 몸 밖에 또 다른 모양을 만들 수 있다면, 나는 어떤 모양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