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에게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현재 나이 일흔일곱. 스크린을 장악하는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스타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메릴 스트립에게도 나이 마흔은 험난했다.
“제가 마흔이 됐을 때, 세 번 연속으로 ‘마녀’ 역할을 제안받았어요. 그때 직감했죠. 우리 업계에서는 여배우에 대한 오랜 편견이 있었거든요. ‘여배우는 마흔까지만 매력적이고 그 뒤론 끝’이라는 식이죠.”
- 메릴 스트립의 유퀴즈 인터뷰 (2026)
당시 할리우드가 마흔이 된 여배우에게 주는 역할이라고는 마녀와 악당, 기괴한 캐릭터, 그리고 엄마였다. 여배우를 섹시 심볼 정도로 여기던 이들이 많았던 시절이었으니 ‘연기할 맛 나는’ 중년 여성 배역을 얻기란 지금보다 더 어려웠을 것이다. 메릴 스트립은 빛나는 연기력으로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도록 살아남았다. 하지만 많은 여성 배우가 마흔 무렵 사라지고 잊혔다.
메릴 스트립이 데뷔하기도 전인 1950년 흑백영화 시대에 제작된 영화 <이브의 모든 것>의 주인공 마고 채닝은 이제 막 마흔이 된 스타 연극배우다. 네 살부터 무대에 선 마고는 생의 대부분을 무대 위에서 보냈다. 언제나 스타였기에 배우가 아닌 자신을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런 마고가 마흔이 되었다.
마고가 연기하기로 한 다음 작품의 배역은 스물네 살의 젊은 아가씨 코라. 연기력으로 살아남은 배우이기에 어떤 나이의 역할이든 충분히 해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젊음을 연기할 수는 없다. 언젠가는 주역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해하던 마고의 앞에 이브가 나타난다.
스물네 살의 아름다운 여인, 이브 해링턴은 마고의 열렬한 팬이다. 마고의 연극을 매 회차 관람하고, 극장 앞에서 매일 같이 기다릴 정도로 열정적인 팬. 마고는 순진하며 열정 많은 이브에게 마음을 열고 곁을 내어준다. 그렇게 이브는 마고의 비서가 되어 함께 살게 된다.
그런데 무대에 선 마고를 바라보는 이브의 시선은 팬의 시선과는 달랐다. 이브는 마고가 받는 박수가 자신에게 향하기를 꿈꾸며, 커튼콜을 하는 마고를 열망에 찬 눈으로 바라본다. 마고의 드레스를 거울에 비춰보며 무대 위의 주인공이 자신인 듯 황홀경에 빠지기도 한다. 이브는 마고의 곁을 맴돌며 그녀의 모든 것을 흡수하고 삼킨다. 어떻게 말하고 생각하는지, 걸음걸이며 행동거지 습관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이브의 존재가 껄끄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때부터다. 마고는 자신을 집요하게 관찰하는 이브에게 경계심이 들기 시작한다. 내가 가진 개성을 모두 빼앗아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나라는 존재가 대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번져간다.
다음 작품의 오디션을 도와주기 위해 극장에 간 마고는 모두에게 분노한다. 늦어버린 마고 대신에 이브가 ‘언더스터디’로 스물네 살의 아가씨 코라 역을 연기한 것이다. 마고의 친구인 극작가도, 연인인 연출가도 이브가 그녀의 언더스터디가 되었음을 알려주지 않았다. 뒤늦게 알게 되어 배신감을 느낀 마고는 “스물네 살의 배역을 스물네 살의 배우가 연기하니 그렇게 좋냐”며 극작가에게 따진다.
마흔이 되어 불안하다는 고민을 털어놓아도 극작가는 마고의 불안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당신은 나이 들지 않는다고, 당신이 원하는 만큼 관객들에게 젊어 보이게 연기할 수 있지 않느냐고 되물을 뿐이다. 연인도 친구들도 '대스타께서 순진한 팬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거냐'며 마고를 비난한다.
언더스터디가 된 이브는 기회를 얻어 마고 대신 연극 무대에도 오른다. 한 번의 무대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이브는 대역이 아닌 자신만의 역할을 얻기 위해 계략을 꾸민다. ‘스타 배우가 신인인 자신을 경쟁상대로 생각하고 밟으려고 한다’라는 기사까지 내며 마고를 압박하고, 마고의 연인인 연출가를 유혹하기까지 한다. 극작가의 아내에게 ‘코라 역을 자신이 연기하게 해달라’고 협박하기도 한다.
배역을 따내려는 이브의 그 모든 시도가 무색하게도, 마고는 스스로 주역에서 내려오기를 선택한다. 스물네 살의 아가씨를 연기하기보다, 마흔이 된 자신에게 어울리는 배역을 맡겠다고 선언한다. 그렇게나 두려워했건만 마고의 얼굴은 오히려 후련하다.
마고를 연기한 배우 베티 데이비스는 자신이 연기한 마고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마고 채닝은 못된 여자가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가는 배우였고, 그 사실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을 뿐이다.”
그토록 원하던 배역을 맡아 연기력을 뽐내며 스타가 된 이브는 언제까지 여배우로 살아갈 수 있을까. 영원한 젊음은 없고, 이브에게도 마흔은 온다. (흥미롭게도 영화에서 이브를 연기한 배우 앤 백스터는 1970년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제작된 《Applause》에서 이브가 아닌, 마흔의 마고를 연기했다.)
여배우의 나이가 그렇게나 문제가 될까. 연기할 맛 나는 중년 여성 배역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나이 듦은 그렇게 불안할 일도 아니다. 세월이 배우에게 적인 것은 아니다. 배우를 쓸 줄 모르는 작가와 감독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