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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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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김창열 회고전>을 다녀왔다. 김창열은 전쟁의 상처를 ‘물방울’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로 정화해낸 예술가이다. 이번 회고전은 김창열의 치유의 여정을 시간 순으로 따라가는 전시였다. 웅장하고 정돈된 국립미술관의 위엄을 느끼며 군더더기 없이 잘 연출된 작품들을 따라 천천히 공간을 걷던 중,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물방울을 집착에 가까운 정신적 강박으로 그려왔다. 내 모든 꿈, 고통, 불안의 소멸. 어떻게든 이를 그려낼 수 있기를 바라며."
 

 

"정신적 강박"이라는 단어를 읽는 순간, 자연스럽게 일본의 조형 예술가 쿠사마 야요이가 떠올랐다. 김창열에 대해서도, 쿠사마 야요이에 대해서도 그리 잘 아는 편은 아니었지만 작품을 보면 볼수록 어딘가 모르게 짙게 묻어나는 공허함이 왜인지 닮게 느껴졌다.

 

전시를 다 보고 난 후 미술관을 나와 찾아보니 두 사람은 국적도, 시대도 다르지만 평생 한 형상을 반복하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 있었다.

 

김창열이 50년 넘게 물방울에 몰두했다면, 쿠사마는 점(도트)이라는 하나의 형상으로 세계를 무한히 확장했다. 둘의 작품에는 형태의 반복을 통해 자기 자신을 붙잡기 위한 절박함이 응축되어 있다. 그렇기에 김창열의 물방울 앞에서 쿠사마를 떠올리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고향의 빛과 전쟁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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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 물방울, 1986, 캔버스에 아크릴릭 물감, 유화 물감, 73×50cm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김창열의 작품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에게 있어서 물방울이라 함은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는 1929년 평안남도 마양리에서 태어나 전쟁 이전의 고요한 농촌에서 평온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1949년, 그는 홀로 월남하며 삶의 첫 단절을 겪게 된다. 떠나온 고향과 가족의 부재는 그의 내면에 지울 수 없는 실향의 정서를 남겼다. 이어서 발발한 한국전쟁은 그가 겨우 붙잡고 있던 세계를 다시 파괴했다. 전쟁이 남긴 상실과 공포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깊었고, 전쟁의 생존자로써 살아남은 그는 평생에 걸쳐 상실의 무게를 견뎌야 했다. 이처럼 맑았던 어린 시절의 감각과 전쟁이라는 파열 사이의 거대한 간극은 훗날 그의 작품세계를 규정하는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그가 물방울을 평생 반복한 이유는 단순한 조형적 선택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내적투쟁에 가까웠다. 그 과정에서 투명한 물방울이 그의 내면을 매개하는 상징적 이미지로 자리했다.

 

따라서 김창열의 물방울은 떠나온 고향에 대한 기억, 전쟁의 파열을 견딘 흔적, 그리고 고통을 정화시키려는 노력으로 귀결된다.

 

 

 

확장의 강박: 쿠사마 야요이의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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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sama Yayoi, Aspiring to Pumpkin’s Love, the Love in My Heart, 2023. Bronze and urethane paint, 345.4x561.3x148.6 cm. Edition of 5, 1 AP ⓒKusama Yayoi/David Zwirner

 

 

반면 쿠사마 야요이는 '반복'이라는 부분에서는 김창열과 맥을 같이 하지만, 본질적 욕망과 세계관에서는 다른 방향성을 갖는다. 그녀는 일본 나가노의 가부장적 분위기 속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부터 환각과 공포 발작을 겪었다. 사물의 표면이 끝없이 증식하거나, 점무늬가 시야 전체를 뒤덮는 장면은 그녀에게는 끔찍한 공포의 형태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예술의 토대로 전환될 수 있는 내면의 양식이 되기도 한다. 쿠사마는 불안을 피하는 대신 그 이미지를 자신의 손으로 먼저 화면 가득 채워 넣음으로써, 공포가 자신을 잠식하기 전에 스스로 그 세계를 장악하려 한다.

 

그리하여 쿠사마의 점은 세계를 잠식하는 환각의 패턴이자, 동시에 그 환각을 통제하려는 의지, 자신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확장의 행위로 탄생한다.

 

따라서 김창열의 반복이 고요와 정화를 향해 수렴한다면, 쿠사마의 반복은 불안과 에너지를 외부로 밀어 올리는 확산의 이미지다.

 

 

 

반복이 향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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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스틸컷.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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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쿠사마 야요이 : 무한의 세계" 포스터

 

 

물방울은 고요하다.

멈춰 있고, 비어 있으며, 땅으로 스며들 듯 얇은 침묵을 품는다.

김창열에게 물방울의 반복이란 외부의 혼란을 정화하기 위해 안을 비우는 방식이었다.

 

점은 끝없이 이어진다.

작게 떨리며, 무수히 겹치고, 마치 공간 전체를 뒤덮어 사라질 틈을 남기지 않는다.

쿠사마 야요이에게 점의 반복이란 내부의 불안을 감당하기 위해 세계를 재구성하는 방식이었다.

 

두 사람의 생은 전혀 다르지만, 한 명은 전쟁의 폭력 속에서, 다른 한 명은 환각의 폭풍 속에서 반복이라는 동일한 전략으로 자신의 중심을 붙잡고자 했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비움과 침잠을 통해, 쿠사마의 점은 증식과 확장을 통해 개인의 아픔을 극복한다.

 

하나는 고요로, 하나는 열기로 나아갔지만, 두 예술가 모두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단 하나의 이미지를 평생 반복해 그렸다.

 

결국 그들의 반복이 향한 곳은 같았다.

살아남기 위한 예술, 자신을 지키기 위한 투쟁

그리고 그러한 고통 위에서 부유하는 흔적들을 예술이라는 아름다움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

 

오늘 우리가 그들의 작품 앞에서 깊은 울림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창열의 물방울이든, 쿠사마의 점이든, 그들의 반복은 예술이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다른 형태로 변환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작품을 통해, 한 개인의 사적인 감정이 예술이라는 형식을 빌려 어떻게 보편적 감각으로 확장되는지 그 현장을 또렷이 목도하게 된다.

 

두 사람이 만들어낸 이 반복은 시대가 달라져도 달라지지 않는 인간 감정의 본질을 비추는 작은 등불로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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