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치 고개를 모래에 처박고 숨은 채 아무도 날 못 볼 거라 믿는 타조처럼”
타조는 위기의 순간마다 고개를 처박고 숨는다는 말이 있다. 머리와 눈을 모래에 파묻어 시야를 차단하면 남들도 자신을 못 볼 거라 판단하는 타조를 우리는 어리석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가끔은 진실을 알고 있지만 이를 마주하기 두려워 회피하는 것들이 존재한다. 가령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마주한 순간이 그렇다. 한때 가장 가깝다고 자부하던 가족 혹은 친구 사이에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진다. 오히려 가까운 사이일수록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진실한 마음은 더욱 이 털어놓기 어려운 법이다.
약 두 달 반 전, 나는 대학로의 극장에서 한 뮤지컬 공연을 접했다. 뮤지컬을 예매한 지인이 급작스레 생긴 일정으로 인해 공연을 볼 수 없게 되어 나에게 표를 넘겨주었다. 당시에는 공연이 개막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나에게 주어진 관련 정보도 거의 없었다. 평소 ‘폐막하기 전에는 한 번 정도 보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흘려보낸 작품이었는데, 정말 운이 좋다는 생각도 잠깐 했던 것 같다. 오랜만에 새로운 작품을 접해본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익숙한 듯 오랜만이었던 극장으로 들어섰다. 예정에도 없었던 관극이 그렇게 나의 이번 연도 가을과 겨울을 바꿔놓았다.
뮤지컬 <타조 소년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친구 로스의 제대로 된 추도식을 열기 위해 모험을 떠난 세 아이(블레이크, 케니, 심)의 여정을 담은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세 사람들에게는 로스를 괴롭힌 (혹은 그들이 괴롭혔다고 믿는) 어른에 대한 반항심이 내재해 있으며, 작품은 이를 역동적인 신체 움직임으로 표현한다. 이 작품을 표현하는 가장 큰 키워드는 ‘죄책감’이지만, 후반부의 서정적인 감정선만큼이나 밝은 장면도 많은 편이다. 전체적으로 열일곱 살 청소년기 아이들을 향한 섬세한 배려심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혹여라도 아이들이 다시 무너지진 않을지 객석에 앉아 노심초사하며 지켜봤던 지난날들이 떠오른다. 나 역시도 17살의 청소년기를 지나온 사람이지만, 무대 위 아이들의 이야기를 마주했을 땐 더욱이 생경하고 낯선 기분이 들었다. 그렇기에 조심스러웠다. 내가 거쳐 온 청소년기 시절을 빗대어 인물들을 함부로 속단하지 않도록.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 휴대전화 메모장을 켜서 후기를 적을 때마다 다짐했다. 고통은 무대 위에서 힘들어하는 아이들에게 내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으로부터 왔다. 이러한 무력감이 나를 잠식하려고 들 때마다 아이들의 첫 여정을 도와주는 조력자 캐릭터들이 등장했다. 이 어른들이 있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순간들도 여럿 존재했다. 나는 그저 주체적으로 나아가는 아이들을 묵묵히 지켜보는 수밖에. 동시에 나도 위기의 순간마다 기꺼이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여러 번 다짐했다.
<타조 소년들>을 보며 가장 내 마음에 깊이 와닿은 깨달음은 ‘어떤 상황에서든 타인의 아픔의 깊이를 함부로 가늠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내가 처한 환경에서는 온전히 이해한다는 게 불가능할 뿐더러 이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누군가에겐 그저 오만함, 때로는 폭력으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신 약 두 달 반이라는 시간 동안 차근히 블레이크, 케니, 심 그리고 로스에게 다가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남들이 봤을 때 그 걸음은 조금 느린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다. 단지 아무도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만약 블레이크, 케니, 심, 로스, 이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긴다면 지난 시간 동안 너희와 함께 걸을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다고 전해주고 싶다.
*
너희들은 아마 다신 볼 수 없는 그 사람을 가끔
떠올리고 또 웃다가 다시 그렇게 일상을 살아가겠지.
그런 날들이 겹겹이 포개어져 몇 년이 흐르겠지.
훗날 오랜 친구들이 같이 모여 그날의 이야기를 들춰보는 일,
그러다 누군가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면 그 웃음을 동력 삼아
또 다시 일어서는 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일이라고.
…
너희들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