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속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던 생활기록부를 꺼내 든다. 색이 바랜 종이를 한 장씩 넘기며 고등학교 시절부터 초등학교 시절까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등학교 3학년의 나는 제법 성실했던 모양이다. 몇 장을 더 넘기면, 그보다 훨씬 전인 초등학교 1학년의 기록이 보인다. 활발하고 발표도 곧잘 하는 아이였다니 지금의 나와는 다소 다른 모습이다. 나이가 들고 키가 자라면서 성격도 조금씩 변했다. 좋아하는 과목도, 잘하는 과목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단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장래희망란에 적힌 단어 ‘영화’뿐일 것이다.
대통령, 과학자, 운동선수, 선생님... 주변 친구들이 장래희망을 계절처럼 바꿔 달고 살던 시절에도 (그게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오로지 영화만을 붙들었다. 이는 때로 웃지 못할 에피소드로 이어지곤 했다. 이를테면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를 고등학교에서 다시 만났는데, 그는 내게 여전히 영화 일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하자 친구는 너도 참 지독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그 말만큼 나의 고집을 설명하는 데 정확한 표현도 없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지독한 꿈을 지켜준 건 몇몇 영화들의 공이 크다. 사람마다 인생영화를 정의하는 방식은 다르다. 나에게 인생영화란 크든 작든 삶의 방향에 영향을 미친 작품들을 말한다. 이번 글에서는 인생영화에 얽힌 추억을 하나씩 되짚어보려 한다. 나는 왜 영화라는 예술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Part 1. <괴물>

2006년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개봉했다. 이듬해였을까. 친구 집에서 우연히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영화 한 편을 보게 되었다. 어른들은 거실 한쪽에서 수다 삼매경이었고, 꼬맹이 둘이서 소파에 앉아 반강제로 괴수 영화를 보게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해 두 자릿수도 채 되지 않는 나이에 보기엔 너무 벅찬 영화였다. 괴물이 사람을 집어삼키는 장면이나 피 묻은 손들이 컨테이너 밖으로 뻗어 나오는 장면은 차마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웠다. 콩알 같은 심장이 작은 북처럼 동동거렸고,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밀려오는 공포감에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눈은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긴장과 쾌감이 묘하게 중독적이었다. 도파민이 마구 분출되는 느낌이었다.
그 후로 한동안은 한강만 보면 괴물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왜 어린아이에게 그런 영화를 보게 했냐고 부모님을 원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다. <괴물>은 내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세계를 처음 접하게 해준 작품이었고, 지금도 그의 필모그래피 중 탑3 안에 꼽을 만큼 좋아하는 영화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애니메이션이 아닌 영화를 반복해서 보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해에만 비디오테이프를 여섯 번은 돌려보았다.
생각해 보면 그때가 시작이었다. 영화에 재미라는 것을 붙인 순간이.
Part 2. <아바타>

<괴물>이 단순히 영화라는 매체를 좋아하게 된 계기였다면, <아바타>는 재미에서 동경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었다. 2009년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신작이 개봉했다. 이미 <터미네이터> 시리즈와 <타이타닉>으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그가 내놓은 첫 3D 영화이자 국내에서 외화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였다. 당시 3D라는 기술이 처음 공개된 작품이라 3D 상영관 예매는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결국 우리 가족은 일반 상영관의 맨 뒷자리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극장에서 처음으로 애니메이션이 아닌 영화를 관람했다. 판타지라면 환장한 어린 시절의 내가 푹 빠질만한 세계관이었다. 큰 스크린에 펼쳐진 판도라 행성에 나도 모르게 흠뻑 빠져들었다. 그러다 영화가 하이라이트를 향해 달려가는 순간 무심코 고개를 들어 관객들을 둘러봤다. 갑자기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다만 예매에 실패한 덕분에 맨 뒷자리에서 극장에 빽빽이 들어찬 관객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스크린을 향해 있었다. 슬픈 장면에서는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고, 유쾌한 장면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날 상영관에 있는 모두가 같은 스크린을 바라보며 같은 감정을 나누었다. 극장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묘한 동질감과 소속감이었다. 엄마는 지금도 가끔 그때 이야기를 꺼내신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빠져나오는 길, 반짝거리는 눈을 하고서는 이렇게 물었다고.
“엄마, 이런 건 누가 만드는 거야?”
“영화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거야.”
“그럼 나 영화감독 할래!”
나에게도 처음으로 꿈이라는 것이 생겼다.
Part 3. <라라랜드>

누군가 내게 인생 영화를 묻는다면, 지금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작품은 단연 <라라랜드>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한창 입시 준비에 몰두하던 시기였다. 영화감독의 꿈을 막연히 품고는 있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을 때였다. 꿈을 밝힐 때마다 앞에서는 멋있다는 칭찬을 들었지만, 돌아서면 듣기 썩 좋지 못한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영화 일은 힘들다더라.” “잘못하면 빚더미에 오른다더라.” 아직 시작도 못 해봤는데, 이제 막 싹을 틔운 꿈이 한순간에 짓밟히는 기분이었다.
잦아들던 불씨에 다시 불을 붙여줄 무언가가 절실했을 무렵에 만난 작품이 바로 <라라랜드>였다. 엔딩 크레딧이 끝까지 올라가서 검은 화면이 스크린을 가득 채울 때까지 극장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쫙 풀려 도저히 좌석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라라랜드>는 내 짧은 인생을 통틀어 가장 많이 돌려본 영화다. 누가 툭 치면 다음 장면에 이어질 대사를 줄줄이 읊어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n차 관람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처음의 감정이 퇴색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볼 때마다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10대에 처음 본 <라라랜드>는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이별한 연인의 마지막이 씁쓸하게만 느껴졌지만, 20대에 다시 본 <라라랜드>는 영화의 중반부, 즉 서로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해 줄 수 있는 건강한 사랑과 견고한 꿈에 더 눈길이 갔다.
<라라랜드>는 영화가 가장 절실했던 시기에 나를 찾아온 작품이다. 이후 영화라는 꿈을 놓고 싶지 않았다. 더 많은 영화를 보고, 더 좋은 영화를 찾아보고 싶었다. 그 뒤로 매년 적게는 수십 편, 많게는 백 편이 넘어가는 영화들을 보았다. 관람의 폭도 넓어졌다. 한때 블록버스터만 즐기던 내가 이제는 아트하우스 상영관을 더 자주 찾는다. 어떤 유형의 영화를 좋아하고, 어떤 유형의 영화는 아쉽게 느껴지는지 스스로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영화에 취향이라는 것이 생겼다. 그래서 이제는 영화를 나의 가장 확실한 취미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P.S. 여전히
지금까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과정을 이야기했다면, 이번에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아트인사이트 지원서를 작성하며 문화예술은 ‘우리의 삶에 발을 붙이고 타인과 함께 살아 숨 쉴 수 있게 돕는 자양분’이라 표현한 적이 있다. 앞에서 말한 경험들이 ‘우리의 삶에 발을 붙이’게 해준 부분이었다면, 이어서 다룰 내용은 ‘타인과 함께 살아 숨 쉴 수 있게 돕는 자양분’에 관한 것이다.
영화는 음악, 미술, 문학과 같은 다른 예술 장르보다 공동체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 여기서 말하는 영화는 단편이나 개인 작업이 아닌 영화관 스크린에 걸리는 일반적인 장편 상업영화를 의미한다. 수십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인원이 함께 참여하는 영화는 기본적으로 투자와 제작비 회수가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완성된다. 이에 기획, 촬영, 편집, 배급, 상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시간과 노력이 모여야 한 편의 영화가 관객 앞에 설 수 있다.
이 지점이 바로 내가 여전히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다. 완성된 작품을 스크린에서 마주하는 순간 작품 이상의 것을 느낀다. 극장에서 낯선 사람들과 한 공간에 앉아 같은 장면에 울고 웃을 때 나는 영화가 지닌 공동체적인 힘을 새삼 실감한다. 영화라는 매체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다. 모종의 이유로 현재는 제작이 아닌 다른 분야를 생각하고 있지만, 여전히 영화는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다. 나의 삶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일깨워주는 소중한 친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