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나는 주로 문화예술 관련 전시나 공연을 보러 갈때, 사전에 어느 정도 계획을 세우고 가는 편이다. 이 전시를 보러 가는 날 원래 나의 계획은 이러했다. 퇴근 후 점심을 먹고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으로 가서 2시 도슨트를 듣고, 미리 검색해 둔 근처 신상 카페에 가서 읽어야 할 책을 읽은 후 여유롭게 귀가한다.

 

그런데 계획대로라면, 점심을 먹고 전시장에 갔을 때 예상 도착 시간이 1시였기에, 도슨트를 듣기까지 1시간이나 비게 될 예정이었다. 그 남은 시간 동안을 먼저 작품들을 관람하고 도슨트를 들을까도 생각했으나, 나는 전시를 보는 데 그리 오랜 집중을 하지는 못하는 사람이기에 막상 고민이 되었다. 그렇다고 카페를 갔다가 전시를 보러 가자니, 1시간도 되지 않아 카페에서 나와야 했고 더불어 찾아 놓은 카페가 너무 좋아 보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그런데 문득, 평일 도슨트 해설이 2시 외에 이후 시간대에도 하나 더 개설되어 있던 것이 생각이 나서 찾아보니, 과연 정말 4시에 도슨트 마지막 한 타임이 더 있었다. 그렇게 되면 카페에서 꽤 오랜 시간을 머물러야 하고 계획도 조금 바뀌게 된 것이긴 하나, 책도 여유 있게 읽고 전시 또한 여유 있게 볼 수 있게 되겠다는 생각에 당장 카페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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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전시와 상관없어 보이는 나의 전시 관람 계획(그것도 과거의 계획)을 길게 설명하는 이유는, 그날 당일에 변경된 계획의 실행이 오히려 전시 감상에 대해 더 인상 깊은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계획이 조금 바뀌긴 했지만, 읽어야 할 책을 더 긴 시간을 할애해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책을 읽어내려갔다. 두어 시간 정도를 더 읽은 후에 가방을 챙겨 전시장으로 향했다. 입장하면서 직원 분에게 도슨트를 들으려면 어디에 있으면 되는지를 묻자, 보통의 전시에서 도슨트 해설이 전시장 초입에서 시작되는 것과 달리 전시장 한가운데에 있는 한 방으로 가면 된다고 안내를 해주시는 것이다.

 

도슨트 해설 시작까지의 10분 정도의 시간이 아직 남아 초입의 전시 작품들을 먼저 관람했다. 전시의 1관은 이 전시의 부제이기도 한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 컬렉션'의 컬렉터인 플로렌스 필립스 부인과 그의 남편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녀는 과연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이 컬렉션을 꾸려갔을지 기대가 될 즈음, 4시 정각이 다 되어 그 한 가운데의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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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장소는 평일 오후임에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로 인해 북적였고 마치 공개 강연이 진행될 것만 같은 분위기에 내가 잘못 들어온 것은 아닌지 몇 번을 다시 확인하던 찰나, 해설 장소가 맞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도슨트님이 가장 잘 보일 만한 자리에 앉았다.

 

도슨트는 전혀 지루할 틈 없이 1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나는 듣거나 읽는 것, 또는 활자를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그림 자체가 주는 느낌을 직관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편이다. 대신 작가에 대한 이야기나 그림에 담긴 배경을 들었을 때 더 와닿는다. 해설을 듣다가 '요즘 들어' 눈에 익었던 화가가 등장하기도 했다. 몇 달 전,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에 대한 에세이를 읽었었고 그 책을 읽음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의 그림을 찾아보았던 기억이 새록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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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분위기 속, 프란시스 베이컨이 그려낸 그림에서는 뭔가 몸속에서부터 근원적으로 끓어오르는 듯한 '역함'이 느껴졌다. 사실 역함이라는 감정을 작품에 떠올려도 되는 것인가 잠시 고민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도슨트 분이 설명을 듣고 있는 한 아이 관람객에게 이 그림을 보고 어떤 느낌이 드냐고 묻자 그 아이가 '괴물'이라고 답한 것에 대해, 이렇게 이 아이처럼 느껴지는 그대로 감상하면 된다는 직원 분의 설명을 듣고 나서는 그림에 드는 내 감정을 그대로 존중하기로(혹은 버텨보기로) 했다.

 

17세기 계몽주의에 접어들며 그 이후에도 계속 성장하고 진보될 줄 알았던 세상은 계속된 1차, 2차 세계대전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다. 이때 베이컨이 그려낸 일그러진 인간의 모습에서는 마치 '계몽을 외쳤음에도 왜 인류는 되려 야만의 상태로 귀결되었는가?'라고 비판했던 철학자 아도르노의 말이 생각나기도 했다. 얼굴이 마치 뒤섞이고, 그때 보이는 곡선의 느낌은 그 얼굴이 가진 흉측한 느낌을 한껏 더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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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슨트 해설이 끝나고 나서 다음 전시장으로 향하기 위해 옆면을 쳐다보다 보니, 이 전시장에서 전시되고 있는 화가가 무려 89명이나 된다는 것에 놀랐다. 아주 어렸을 적 살던 아파트 벽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그림적인 측면에서 표현의 욕구가 꽤나 컸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글쓰는 것을 전공으로 삼아 10년이 넘게 그 작업에 착수하다 보니 이제는 글이 주는 이미지나 글을 통해 표현하려는 욕구가 더 커진 것 같다. 글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익숙하고, 또한 글로 표현하려는 동력이 큰 사람에게는 이 89명, 그리고 지금도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무언가를 표현해내려는 동기 속에 그림을 그려내는 세상의 모든 화가들에 대한 존경심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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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들에 대해 존경심을 더욱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때는, DIY로 번호를 따라 유화로 색칠을 해 그림을 완성하는 상품을 사서 따라 색칠해보았을 때이다. 유화 물감은 그 생생한 질감을 표현해내기 위해서는 여러 번 덧칠해야 하고 물감도 많이 든다. 그때 번호를 따라 그저 색칠하는 것인데도 그 오밀조밀하고 섬세한 그림 도면을 따라 색을 칠하는 것은 굉장히 여러모로 고된 일임을 알게 되곤 화가들에 대한 존경심이 저절로 생기기도 했다.

 

끝으로, 전시장을 나오는 발걸음은 굉장히 가벼웠다. 우연히 듣게 된 색다른 방식의 도슨트 해설이 작품 전반에 대한 설명과 어우러져 그림들에 대한 나만의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다. 전시장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집에 가면서 감상의 여운을 다시금 되새겨보았는데, 새삼 장장 400년에 걸친 작품들에 대한 애정으로 큐레이팅한 플로렌스 필립스 부인과 그림에 대한 엄청난 애정을 가지고 해설해주신 도슨트 분에 대해서도 그 애정의 진정성에 대해 존경심을 느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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