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리 퍼진 화려함
뒤로는 기둥을 가득 채운 포스터들, 손에는 포장한 선물을 든 채 바삐 이동하는 모습. 화가 장 베로가 그린 19세기 말 유럽의 풍경이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대중의 소비문화가 빠르게 성장하던 시기다. 철도망이 넓혀지고, 백화점이 하나둘씩 존재감을 드러내며 '나를 위한 지출'이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형태로 자리 잡은 모습이다.
필요에 응하는 일상의 부품처럼 여겨지던 것들도, 브랜드를 만나는 순간 경험의 영역으로 변모했다. 같은 리큐어일지라도 향과 맛, 고풍스러운 이미지를 살리는 제품이 조명 받고 담배를 피우는 행위는 연출에 따라 여유롭고 세련된 분위기를 오가는 식이다.
알폰스 무하는 이러한 일상의 변화를 이끈 결정적인 인물이다. 평면적인 포스터부터 입체감을 살린 패널, 일상의 영역에 깊숙이 다가간 일상용품까지 무하만이 새길 수 있는 장식의 미를 그려냈다.
전시장에서 단번에 시선을 빼앗은 모엣 샹동 샴페인과 리큐어 베네딕틴의 틴케이스는 대표적인 예시다. 화려한 천에 둘러싸인 채 고혹적인 표정과 포즈로 서있는 여성은 샴페인이 주는 고급진 축하의 이미지를 한껏 끌어올렸다. 이어 리큐어를 사이에 두고 꽃과 잎으로 채워진 의상을 입은 두 여인의 모습은 여유를 즐기는 여신을 연상시킨다.
도시의 풍경을 상징하는 포스터 미술부터 이러한 상업적 작품들까지, 무하의 작품들은 미술을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당겼다고 평가받는다.
달리 쓰인 섬세함
언뜻 선명한 선과 색감이 전체를 좌우하는 듯한 무하의 포스터 미술이지만, 작품을 자세히 보면 '섬세함'이 작품의 특색을 살려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자연으로부터 받은 영감과 흔적은 무하가 이끈 아르누보 예술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이는 동시에 자연물 특유의 곡선과 다채로움을 고스란히 담아냈음을 의미한다.
전시장 벽면 한가득 걸린 무하의 습작에서 어렵지 않게 그 흔적을 확인해볼 수 있다. 자료집으로도 여러 차례 출간한 바 있는 그의 그림들에서 꽃잎 한장을 두고도 각도를 달리하고, 흩날리는 꽃잎이 보여주는 형태의 변화를 고집스레 포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무하만이 가진 섬세함은 손을 떠나 시각에서도 극명히 드러난다. 인생의 말미를 바쳐 헌신한 '슬라브 서사시'에 그 면모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하자 ,무하는 이러한 정신이 담긴 포스터 작품을 비롯해 국가 지폐와 우표까지 자신의 손으로 그려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품 '제 6회 소콜 축제'에서 숭고한 정신을 작품에 담아낸 무하의 섬세한 접근이 잘 드러나 있다. 소콜은 체코어로 매를 의미하며,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위해 힘쓰던 운동 단체의 이름이기도 하다. 소콜 축제는 전국 체육대회를 표방하며 애국심을 다지는 주요한 행사로 쓰였다.
해당 작품 속 소녀가 들고 있는 화환과 지팡이는 현실, 매와 뾰족한 고리를 든 채 그 뒤를 지키고 있는 여성은 그 이면의 바람을 상징한다.
이어 대부분의 관람객이 발걸음을 멈추는 곳은 프라하 성비투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앞이다.
체코의 성인과 위인을 빼곡히 그려낸 이 작품은 슬라브 민족 간 연대를 보여주며, 고국을 향한 무하의 애절한 감정을 담고 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국민 영웅으로 불린 알폰스 무하, 그의 포스터 미술이 자랑하는 화려함 이면에는 작가의 섬세함이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화가 한명의 장례식에 10만명의 군중이 몰린 것은 생전에 앞장서 보여준 미덕을 증명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