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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바람 한 점, 강물이 굽이치는 소리, 장식품 가게에 진열된 인형 하나, 잠들기 전후의 고요한 숨소리, 아주 사소하여도 많은 걸 암시하지 않는 게 하나 없다. 모든 암시를 의식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 그 이야기를 오롯이 이해시키고 싶다면, 이런 암시들이 듣는 이의 감각을 깨우도록 인도해야 한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Small Things Like These)’은 서사를 위해 잘 솎아낸 사소한 것들에 대한 묘사로 말미암아 시공간이 인물에게 주는 암시를 오감으로 경험하게 하는 소설이다.

 

*이 글에는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 (Small Things Like These)’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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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암시하는 과거 현재 미래


 

소설은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기는’ 11월부터 크리스마스 시즌까지의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한다. 석탄 야적장의 배달 일을 하는 빌 펄롱은 아내와 함께 얼마를 벌고 또 아껴서 언제 무엇을 살 수 있을지 고민하고, 날이 다르게 커가는 다섯 딸을 새삼스러워하는 하루하루에 머무르고 있다.


하지만 펄롱의 회상으로 시점은 과거로 자주 회귀한다. 펄롱의 엄마는 미시즈 윌슨의 집에서 가사 일꾼으로 일했는데, 남편을 먼저 보내고 혼자 살고 있는 미시즈 윌슨은 곤란한 상황에 처한 펄롱 모자를 내치지 않고 끝까지 거두어 주었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의 베풂에 대한 감사함, 가난으로 놀림당하던 수치심과 서러움, 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끝없는 의구심 등으로 둘러싸인 어린 시절의 기억을 늘 머리맡에 둔다. 자꾸만 떠오르는 그때가 현실에 꿈처럼 개입하여 들어온다.


펄롱은 기본적으로 정이 많은 사람이다. 작은 도움을 받은 이웃집에 보답으로 땔감 한 자루를 보내는 것을 잊지 않으며, 가게에서 원하는 물건은 못 찾았지만 그냥 나가기가 뭐해서 사탕 하나라도 사가는 사소한 행동들에서 알 수 있다. 소설의 전체 분량이 짧아서인지 이런 묘사 한 문장 한 문장이 그냥 있지 않다는 걸 더 의식하게 된다. 그러니, 습관처럼 주는 정이 그의 과거를 암시하고 있음을, 이해타산에서 벗어난 것들로 결속되었던 어린 날은 펄롱의 오늘을, 더 나아가 내일을 암시함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과거, 현재, 미래는 시점이지 시간은 아니다. 시간은 본질적으로 이어져 있다. 회상에 잠긴 펄롱은 현실에 사는 아내 아일린의 걱정을 받는다 : 이상적인 것을 싫어하는 성격의 아일린은 펄롱의 현실에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과거와 현재를 겪어낸 자기 자신이 이끄는 미래에 도착한다.


수녀원에서 마주한, 여기서 나가게 한 번만 도와달라 부탁하는 남루한 모습의 아이. 그 아이의 현실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동안 펄롱은 고뇌한다. 아내의 반대, 마을 사람들의 시선, 수녀원의 영향력이 닿을 딸들의 교육, 재정적 부담 등 닥쳐올 미래가 지금까지의 시간과 마땅히 충돌한다. 그럼에도 미래는 역시 정해진 것처럼, 운명처럼 시작된다. 서로 돕지 않으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펄롱은 삶이 자기에게 암시한 깊고 단단한 뜻을 거역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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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는 행복한 날이 아니라 행복을 확인하는 날이다


 

책에 나온 수녀원은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의 이름 아래 행해진 끔찍한 인권유린 사건인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여성을 보호하고 교화한다는 명분으로 세워진 막달레나 보호소는 매춘부, 미혼모를 비롯한 젊은 여성들과 아이들을 데려가 은폐 및 감금하고 강제노역을 시켰다. 여기서 많은 아이들이 사망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종교와 국가에 의해 자행된 이 참혹한 역사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시선 너머로 짐작하게 한다. 그것도 다섯 딸이 각자 산타에게 받고 싶은 선물을 편지로 쓰면 아침 일찍 우편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하는 아빠의 시선을 통해서 말이다. 나는 생일이나 크리스마스가 오면 기쁘면서도 이상한 위화감을 느끼곤 한다. 특별한 날이라고 1년에 딱 하루만 정해놓는 건데도, 다른 날과 다를 게 거의 없어서랄까. 크리스마스든 생일이든 똑딱똑딱 시계 침은 제때 12시를 넘긴다.


크리스마스에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원래도 누리고 있던 것들이다. 크리스마스 트리와 장식, 케이크와 포장된 선물들, 이 모든 것들이 이미 그들의 행복을 암시한다. 수녀원 아이들의 크리스마스는 어째서 그 불행한 현실을, 쇠창살과 자물쇠와 깨진 유리를, 거듭 확인하는 날일 수밖에 없을까. 크게 여유롭다고도 할 수 없는 펄롱 가족의 딸들이 그래도 매년 겨울 행복을 확인하는 동안,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현실에 놓여야 하는 진정한 조건이라는 것이 있는 걸까.


조건 없이, 혈육인지 아닌지조차도 따지지 않는 미시즈 윌슨의 보살핌을 받았던 펄롱이 그의 생에서 가장 중시하는 가치는 인류애이다. 남을 돕고, 안심시키고, 단단한 지붕과 매일 먹을 밥을 줌으로써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왜냐하면 그가 미시즈 윌슨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그의 어머니가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세상은 너무 쉽게 이 모자의 현실을 박살 내버렸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펄롱은 새까만 맨발로 걷는 아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우연이 설명도 없이 앗아간 행복을 우연으로 되돌려준다. 그 어떤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사소한 것들이 계속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은 몰라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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