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다 보면, 언어로 딱 정의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 영화를 보며 느껴지는 것도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굳이 말로 정의해 본다면, ‘시작의 순간’이라고 해야겠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오직 시작점에서만 살아있는 그 무언가의 존재감을 카메라로 담아내었다.
<4월 이야기>
<4월 이야기>는 대학에 새로 입학한 새내기의 대학 생활을 그린다. 우즈키(마츠 다카코 분)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새로 입학한 대학 생활에 적응하며 여러 일들을 겪는다. 동아리에 처음으로 가입하기도 하고, 같은 과 친구를 사귀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가 입학한 이 대학에는 그녀의 고등학교 시절 짝사랑 야마자키 선배(다나베 세이치 분)가 있다. 선배가 일하는 서점 주변을 배회하며 그녀는 떨림을 느낀다. 말을 걸어보지도 않았고, 선배가 본인을 기억할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서점에 매일 들러야 할 것만 같다. 오늘은 선배가 나를 알아볼지도 모른다.
카메라는 첫 순간을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에 집중한다. 그녀는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하기에, 섣부르게 행동할 수 없다. 조심스럽게 상황을 지켜보며 용기를 내야 하는 순간을 위해 숨을 고른다. 시점 쇼트와 핸드핼드 기법을 통해 촬영된 영상을 보며 관객은 그녀의 순간들을 응원하게 된다.
이 영화에는 복잡한 서사나 전사가 없다. 이 영화는 스즈키와 그녀를 둘러싼 풍경을 담아내면서 그 상황을 설명할 적절한 이야기를 충분히 제시하지 않는다. 화면에 남는 것은 첫 순간들을 경험하는 우즈키라는 이름의 대학 신입생과 풍경뿐이다. 감독은 그 이상의 정보가 화면에 개입되는 것을 꺼리는 듯하다.
특히나 주목할 지점은 이 영화가 남아있는 최소한의 서사마저도 영화의 막바지에, 필요에 의해서 나레이션으로 풀어낸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우즈키를 움직이는 것은 야마자키 선배에 대한 짝사랑의 마음이다. 그녀의 감정을 더 잘 전달하려면 그녀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우즈키가 좋아하는 선배가 있다는 사실을 모든 장면이 지나고 나서야, 몽타주로 따로 떼어서 제시하고 있다. 그런 방식으로 제시되는 영상에는 우즈키가 느꼈을 감정보다, 그 감정이 일어나는 상황 자체가 더 집중되어 담긴다.
그렇다면 감독은 첫 순간들을 박제해 보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감독에게 시작이란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감독이 이런 화법을 사용한 것은, 이 영화가 담아내려 하는 지점이 이야기 속에서 정의되는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 그런 감정이 피어오르는 순간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나비같은 존재감
나에게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게 다가온 장면은 오프닝 이후에 집에 짐이 들어가기 전에 빈 공간을 담는 씬이었다. 우즈키는 아무것도 없는 빈방에 들어가 옆으로 풀썩하고 눕는다. 비어 있는 방 안에 햇빛이 드리운다. 작은 방 안에서 누워있는 그녀의 모습이 퍽 아름다워 보였다.
그 방 안에서 공간을 채우는 것은 가능성이다. 앞으로 이 공간을 채워 갈 시간을 상상하는 것으로 그 가능성은 은은한 존재감이 되어 방안을 돌아다닌다.
오프닝 이후의 저 장면에서, 방안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 나비 같은 존재감을 관찰할 수 있다.
시작을 대하는 자세
스즈키가 마침내 선배와 고대하던 대화를 나누는 시퀀스는 이 영화의 서사적 하이라이트일 것이다. 스즈키는 우연한 계기로 선배와의 대화를 나눈다. 선배가 자신을 기억한다는 것을 알고 기뻐한다. 카메라는 그 시퀀스를 스즈키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에서부터, 위에서 내려다본 스즈키의 알 수 없는 표정으로까지 담아낸다. 이 시퀀스에서 카메라가 담아내려 하는 것은 첫 시작의 순간을 체험하는 스즈키 그 자체이다.
스즈키는 좋아하던 선배와의 대화를 몇 번이나 상상했을까. 그녀가 그 순간을 고대하다가 돌린 지난 발걸음에서는 비단 쓸쓸함이나 외로움만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기대를 돋구는 산뜻함이 깃들어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고대하던 순간이 예상치 못한 때에 현실로 다가올 때. 잔뜩 기대하고 그리던 가능성이 마침내 현실로 정착할 때. 4월을 가득 채운 상상들이 앞에 놓인 현실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이상야릇한 아쉬움이 남는다.
직후, 벅찬 마음을 안고 길에 나서려는데 비가 온다. 우즈키는 선배에게 우산을 빌린다. 부러진 우산을 받았다. 우산에 빗소리가 울려 퍼진다. 비를 다 막아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충분하다. 잔잔히 빗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런 빗소리는 부러진 우산만이 낼 수 있는 소리일 것이다.
영화는 떨어지는 벚꽃잎의 분분함과 때리는 물방울의 명료함으로 시작을 대하는 자세를 알려준다. 가능성의 세계를 유영하며 느낀 충만함은 단일한 현실의 사건으로 수렴된다. 우즈키가 잔잔히 올려다보는 물방울은 그렇게 탄생한 ‘시작의 순간’의 생경함이다. 그 차갑고 독특한 감각. 나비잠에서 깨어나는 그 감각은 혼자만의 상상과 연정으로 보낸 지난 시간을 추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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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샤랄라해지는 것이 마냥 벚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한 해를 시작하는 것에 대한 떨림. 시작이 마련해준 빈자리들은 각각의 가능성을 품고, 환상적이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그 가능성이 현실로 전환되는 순간을 영상으로 담아내었다. 들키면 안 되는데 배어 나오는 미소를 볼 수 있고, 눈이 마주치면 어쩌지 싶으면서도 시선을 거두기엔 너무 강렬한 순간의 마법을 관찰할 수 있다.
아마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첫술에 분분하지 않은 침착함일지도 모른다.
부서진 우산만으로 괜찮다며, 잔잔히 우산을 울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마츠 다카코처럼.
4월이 가기 전에 <4월 이야기>를 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