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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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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어느 날 잠에 들려는데 옆방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필자는 현재 하숙집에 살고 있는데, ‘응답하라’ 시리즈 속 하숙집과는 달리, 2025년의 하숙집은 철저히 분리된 삶의 공간이다. 같은 학교 학생들이 대부분이지만 서로를 모르는 체하고, 인사도 하지 않는다. 복도에서 누군가의 소리가 들리면 문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서로 어색해서 그렇기도 하고, 내가 살아가는 공간에서 타인과 마주치는 상황이 불편한 것도 이유 중 하나이다.

 

옆방의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니 그 울음소리를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외로움과 무력감을 느꼈다.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영역을 지키기 바빠 위로의 한마디도 건네지 못한다니, 문득 그 공간이 너무도 비좁고 고립된 곳이라 느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개인의 공간, 프라이버시를 존중한다는 이유로 인간 간의 소통 부재를 합리화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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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이야기>는 벤치가 덩그러니 놓인 공원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피터는 뉴욕시에 건설된 거대한 ‘숲’인 센트럴 파크에서 책을 읽으며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있다.

 

극의 초반부터 제리라는 인물이 난데없이 나타나 피터의 고요한 삶에 침입한다. “동물원에 갔었다”라는 이상한 말부터 시작해 온갖 맥락 없는 말을 늘어놓다가 이내 벤치에 앉겠다며 억지를 부린다. 다시 말해, 그는 피터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침범한다.

 

둘의 대화는 조각난 형태로, 매끄럽지 못하지만 어쨌든 진행된다. 둘은 서로를 의식한 채 억지로라도 얼굴을 맞대고 날 것의 감정을 표출하며 심심한 이 공터는 이내 피 터지는 영역다툼의 현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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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는 피터 쪽으로 몸을 밀어붙이며 “옆으로 비키라”고 말한다. 피터는 거부하지만, 제리는 영역을 나눠가지자며 제안, 아니 강요한다. 피터가 차지했던 벤치 위 영역은 점점 줄어들지만, 제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나 영역을 지키라고, 자리를 얻어내기 위해 당장 자신과 싸우라며 덤빈다.

 

이 장면에서 피터는 자신을 사냥하듯 접근했던 제리에게 처음으로 ‘야생동물’처럼 맞대응한다. 철창 속에 존재했던 두 인물이 엉키면서 철창의 합일이 일어나고, 모든 분리가 무력화된다. 이내 둘은 우리에 갇힌 순종적이며 격리된 존재들이 아니라, 초원 위 치열하게 싸우며 생존을 쟁취하는 동물들 그 자체가 된다.

 

피터는 모든 사회적 체면을 벗어던지고, 타인에게 처음으로 분노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벤치를 누군가에게 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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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제리는 흥분한 피터에게 칼을 쥐어주고는 그를 향해 달려든다.

 

그는 피터의 눈 앞에서 죽음을 통해 동물원을 완전히 탈출한다. 그리고 숨을 거두기 전 피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철창을 뛰어넘어 자신과 싸워준 이, 자신의 존재와 그 의미를 평생 기억하게 될 이에 대한 감사, 또는 둘 다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는 피터에게 도망가라고 애원한다. 뉴욕 중심부의 가장 자연적이면서 인위적인 숲을 벗어나, 치열하게 계몽을 지향하고 삶을 질문하라는 염원으로 들렸다.

 

피터는 평생 제리의 유언을 잊지 못할 것이며, 그가 증명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끝없이 고민하게 될 거라는 점에서 이 죽음은 상징적이고 파괴적이다. 진정 텍스트 위에 둥둥 뜨는 박진감과 공포를 지닌 작품이었다. 올비는 우리가 각자의 영역에서 느끼는 평온이 철창 속의 일시적 안주이지는 않은지 질문한다.

 

<동물원 이야기>는 독특한 방식으로 인간의 무관심과 고립이라는 두터운 벽을 관통해 ‘각성의 순간’을 나타내는 유일무이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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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 수업에서 만난 작품 중 가장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초현실적인 <동물원 이야기>는 현대판 인간 동물원 속 모두를 비꼬고 파괴하면서, 종국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위로한다. 그날 밤 옆방 누군가의 울음소리를 들은 후 “진정한 대화를 하고 싶었다”는 <동물원 이야기> 속 제리의 말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올비는 인간의 고립과 무관심에 대해 처절하게 저항하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 감정의 불규칙한/자연적인 폭발과 해소의 순간을 세세히 전시한다.

 

각자의 인생을 일구는 데 바빠 갈등의 순간조차 가지지 않는 무신경한 인간들, 실제적 소통을 두려워하는 인간들, 현실에 안주하며 스스로 가두는 인간들, 누군가를 배척할 때마다 자기 자신을 격리하게 된다는 사실에 ‘무감한’ 인간들에게 올비는 그 ‘무감각함’을 지금, 당장 타파하라는 계몽적 경고를 던진다. 당장 깨어나서 그 철창을 지금, 당장 허물라는 올비의 명령은, 근본적 고립에 괴로워하는 모든 ‘제리’들과 그것을 아직 인지하지 못한 모든 ‘피터’들에게 수필로 적어 보내는 분노의 편지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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