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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어떤 한 화가의 작품을 감상하면 어떤 글이 나올까?

 

이 순진한 질문으로부터 이 책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 화가가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사실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나에게 베이컨의 그림은 '외치는 고기'다. 그 고기는 양지에서도, 음지에서도, 사람이 많을 때도, 적을 때도 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소리는 들을 수 없다. 왜냐하면 베이컨의 그림에서 모든 몸이 뭉개져 있기 때문이다. 뭉개져 있다는 것은 모든 신체의 기능이 멈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뭉개져 있다고 표현한 것은, 그것이 구별할 수 없으므로 모든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벌리고 있는 입은, 발성함으로써 분출하는 기관일 수 있지만 그만큼이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된다. 고통의 외침은, 고통의 흡수를 보여준다. 그것은 입이 아니라 손, 항문, 아무튼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은 크게 외치면서도, 인식의 전환에 따라 들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아이러니한 베이컨의 작품이기에, 아무도 없는 밤에 그의 작품을 보는 것은 양지에서 다른 사람들과 보는 것과 다른 감상을 줄 것 같았다. 아참, 내가 마치 베이컨의 그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나? 나는 그의 그림에 대해 감상만 가지고 있을 뿐, 베이컨의 삶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사특한 생각이지만, 하룻밤 동안 베이컨을 만난 사람이 그것을 전달해 주리라 믿었다. 생각해 보라. '하룻밤 동안 그 화가의 세계를 탐험한다'라는 낭만적인 이야기에 누가 화가의 소개를 등한시할 것이라고 기대하겠는가?

 

책 '블루 베이컨'은 베이컨의 그림을 소개하는 데 관심이 없다.

 

정확히는 작가는 베이컨을 소개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지만, 관객들이 베이컨에게 '마법적으로' 이끌리는 것을 바란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여동생의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변형한 신체로 '생소한 음식'을 찾아 나서는 그레고르 잠자처럼, 독자들이 베이컨의 그림과 책의 기묘한 감상에 감화된 변형된 신체를 감각하고, 자라난 촉수로 그림을 인터넷에 검색하길 원한다.

 

게다가, 작가는 '베이컨'이 아니라, '베이컨을 감상하는 자신'을 중심으로 책을 전개해 나간다.

 

베이컨은, 그의 세계를 끌어내는 마중물의 역할을 할 뿐이다. 이 얼마나 사특한 생각인가. 이 또한 베이컨의 그림에 대한 인상을 대신 정립해 주길 바라는 지적인 게으름뱅이의 사특한 기대를 완전히 꺾어놓는다.

 

초반에 책을 읽으면서 자의식 과잉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작가의 흐름에 '언제 베이컨 이야기하지?'라는 심술궃은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사실 과장이 아닌 것이, 그림의 세계에 들어가는 초반에는 두통에서 시작된 베이컨의 과장된 영향력과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만들어진 상징물이 섞여 상당히 혼란스럽게 전개된다. '아프리카', '여우', '가면들'로 이어지는 일련의 상징은 짧게 제시된 일화만으로 그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워 독자 입장에서는 생생한 백일몽처럼 느껴졌다. 이름만 들어본 사상과 작가의 말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맥락의 흐름에 따라 몇 마디로 등장하기에 이 역시 혼란을 가중한다.

 

하지만 작가의 아름다운 필체와 흐름을 맞춰가다 보면, 묘하게 그 세계에 스며들어 간다. 작가의 의도대로 이 긴 밤의 여정을 내가 이해한 대로 거칠게 표현하면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작가는 맨 처음 베이컨의 그림이 유도하는 신체적, 정신적 감각의 과장에 고통받는다. 그는 복수의 여신으로부터 '제물로 뒤덮인, 성소로 들어가라.'라는 속삭임을 듣는다. 이 속삭임은, 작가가 감상한 베이컨에 대한 느낌을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다.


언제든 몰락할 수 있는 왕처럼 미술관을 헤매는 그를 베이컨의 수도꼭지가 그의 정신을 깨운다. 베이컨이 그린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파란색은 작가의 정신을 안정화하고 깨운다. 이는 글의 끝에서 짐작할 수 있는, 베이컨의 그림이 가지는 순수한 생명력을 대변한다.

 

정신을 차린 작가는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의 그림에 매료된다. 이 그림 앞에서는 글의 심상을 파란색보다는 분홍색이 지배한다. 여기서 작가는 손상되었지만, 발기된 성기를 연상하게 하는 발을 가진, 상처 입은 몸을 수수께끼 앞에서 드러냄으로써 패배 같은 승리를 얻은 오이디푸스와 그와 성교하기도, 죽이기도 하는 여자 스핑크스-스펭주-에 관해 오래 이야기를 서술한다. 나는 그가 이 그림 앞에서 상처 입은 몸의 고통과, 상처 입은 몸과 결합하고 섞이는 묘한 성적 긴장감을 생생하게 느꼈다고 본다. 베이컨의 그림이 주는 묘한 충동, 피학적 쾌락과 죽음의 생기가 집약적으로 서술된다.

 

스펭주의 끈덕진 시선을 지나면, 작가는 이제 눈먼 오이디푸스를 상상한다. 왜 오이디푸스는 눈이 멀었는가? 상처를 트로피처럼 휘두르는 그의 눈에는 인간만이 비인간이 될 수 있다는 오류가 들어있다. 눈에 들어간 오류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들고, 오류를 부정하고 싶게 만든다.

 

이러한 질문은, 왜 베이컨이 눈을 부정했는가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그는 무엇을 보았으며, 왜 눈이 멀었는가? 그 무엇에 대한 단죄로 눈을 찌른 걸까, 아니면 보기 싫다는 것을 표현한 것일까? 그는 이 시점에서 베이컨의 그림에서 재현된 '제물'이 가해자의 눈이 아닌, 피해자의 눈으로 그려진 것을 다시 떠올린다.

 

복수의 여신이 이 책의 초장에서 속삭였듯이,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주술사의 저주 대상이 자신 안의 악이 아니라 자신을 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듯이, 베이컨의 그림에 올려진 수많은 육체는 눈먼 오이디푸스가 바친 상처투성이의 고기를 제물로 바친 것이다. 그렇다면 제물을 통해 얻으려는 성스러운 것은 무엇인가? 베이컨이 눈을 바친 이유만큼이나 모호하지만, 생각하는 것조차 우리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무언가를 바쳤는지 모르지만, 작가는 무언가를 바친 남자가 되어, 가장 보기 꺼렸던 성소로 진입한다. 그곳에는 조지 다이어의 3부작이 있다. 베이컨이 자신의 연인의 죽음의 과정을 묘사한 이 그림은, 덤덤해 보인 것처럼 보이지만 뭐라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애정으로 가득 차 있다. 작가는 그 앞에서 베이컨의 삶의 연대기를 독자들에게 읊조린다. 격정적이고 화려한 문체가 이 작품 앞에서는 건조하게 바뀐다. 그가 마침내 마주한 3부작은, 미술관에서 그림을 홀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느끼게 해준 것 같았다.

 

그래서 작가는 아무도 없을 것이 뻔한 미술관에서 누구 없냐고 외치고, 베이컨의 그림을 쓰다듬고, 눈이 먼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한 철저한 고독 속에서, 그는 지금까지 감상했던 작품들을 다시 감상한다. 기묘하게도, 베이컨의 그림은 마치 불멸하는 푸른 새처럼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한다. 앞서 나를 자유롭게 느끼게 했던 '여우'가 다시 등장하면서, 책이 끝난다.

 

이 글만 읽어도 알겠지만, 작가의 자의식으로 가득 찬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묘하게 그 감상에 동조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기묘한 설득력을 가진 작가의 글솜씨도 있지만, 베이컨의 성소에 입장하여 고독과 구원을 얻는 과정이 어떤 서사적 완결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책의 초반에서 느꼈던 당혹감과 고통도 사라지게 된다. 작가 개인사에 대한 설명도 많고, 그림 40점 중 몇 점 안 되는 작품만 언급하는 데다가, 베이컨의 작품을 설명하려는 의지도 없지만, 놀라운 솜씨로 베이컨의 마력을 함께 느끼게 한다. 우리는 보통 책으로 어떤 작가를 알 때, 개론서나 입문서의 이름으로 알아가게 된다. 이 책은 그러한 의무를 완전히 방치한다. 하지만 가장 주관적인 언어로 작가의 세계에 끌어들인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예술이 가장 주관적인 세계와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그가 가장 적절한 방법을 선택하고 있지 않나 싶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정말 위대한 입문서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그와 함께 베이컨의 성소에 함께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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