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이 시작될 즈음 처음 느낀 것은 우울감이었다.
고도비만에, 늘 같은 자리에 목석처럼 앉아 티브이만 보는 아버지를 둔 철수의 집을 들여다본 내가 느낀 감상은 아픈 가족과 함께 지내본 사람은 누구라도 느꼈을 만한 미묘한 우울과 고독이었다.
흐르는 바다가 아닌 탁한 저수지에 빠져드는 듯한 기분을 주었던, 그래서 더 특별했던 공연 [저수지의 인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릴 적부터 키우던 강아지가 병에 걸려 앓던 적이 있었다.
집에 와도 이전처럼 현관문까지 나와 반겨주지 않았고, 되려 내가 강아지가 머무는 쿠션 앞까지 가 강아지의 상태를 살피고, 토하거나 설사한 흔적이 있으면 그것을 닦아주어야 했다. 아픈 몸으로라도 나와 오래 함께해주길 바랬으면서도, 이기적이게도 이렇게 지내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불쑥 찾아올 때도 있었다. 당시 입시를 치루며 바삐 지내었던 상황이었기에 더욱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이처럼 병든 가족과 살아가는 일은 이처럼 무력감과 우울을 낳는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그의 상태를 살펴야 한다는 피로감, 그리고 이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불쑥 찾아왔다.
언제 큰 병이 찾아올지 모르는 몸을 가진 아버지를 둔 철수의 상황도 그러했으리라.
그 상황에서 그가 찾은 돌파구는 글을 쓰는 일이었다. 랜선 친구인 '영희'와 소통하며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을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철수의 얼굴에서는 생명력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그의 꿈은 쉽게 좌절된다. 하루종일 일하며 느끼는 몸의 피로감, 그에 더해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세상에 널려 있다는 아버지의 말이 댓가 없이 오랜 시간 꿈만을 보며 달려왔을 그의 마음을 쉽게 꺾어버렸으리라 생각했다.
특히 예술인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누구든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아버지의 그 말이 내 가슴 속에도 깊게 박혔다.
나 또한 아버지로부터 들은 적이 있는 말이었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현재까지도 종종 생각나는 말이었기에 공연을 보면서도 잠깐이나마 회상에 잠겼다. 물론 지금의 나는 '널려 있는 사람들 만큼 하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데?' 하는 생각으로 쉽게 넘겨버릴 수 있지만서도, 예술인을 오랜 시간 꿈꿔오고, 한창 그것만을 위해 달려갈 시점의 이들에게는 이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 잘 알았다.
나 또한 내가 그리는 그림은 특별해지리라 생각했고, 남들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결국 자식을 이해하고, 변화하려고 노력하는 아버지의 모습마저 조금은 야속하게 느껴졌다. 누군가는 그러한 말들을 쉽게 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재능의 깊이를 의심하게 되는 말들이 바다로 나아가려는 발걸음을 늦추거나, 때로는 포기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이렇듯 개인의 경험과 얽혀있는 공연 속의 사건들 때문에 공연을 잘 보고 나오면서도 여운이 깊게, 오랫동안 남아있던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주변의 이들에게, 혹은 꿈을 향해 걸음을 딛으려는 이들에게 주저하지 말고 말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악조건 속에서도 결국 바다로 나아가는 철수의 이야기 속 인어처럼, 무언가를 좋아하고 바라는 마음 자체로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갈 자격은 충분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