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근 몇 년 연꽃을 가까이하는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그다지 연꽃을 들여다보지 않은 사람이다. 여름에는 더위와 지침으로 연못을 쉽게 지나쳤고, 겨울에는 꽃이 없다는 이유로 그 허전하고 스산한 연못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 피는 연못이 백련인지 홍련인지 황련인지 모른다.
여기 백련이 피는 저수지 근처에 사는 부자(父子)가 있다. 아들 철수와 그의 아버지 용재는 매일 같은 삶을 반복한다. 철수는 가만히 서서 저수지를 지키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고, 집에서는 노트북으로 글을 쓴다. 온라인에서 만난 같은 습작생 영희와 함께 서로의 글을 피드백하며 말이다.
하지만 집에 가면 아버지가 있다. 매일 같이 소파에 앉아 하루 식사량을 컵라면 대여섯 개로 채우고 자연에 관한 TV 프로그램과 뻥튀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는 아버지. 철수는 그런 아버지가 답답하기만 하다. 살찐 거대한 몸을 소파에 묻은 채 죽을 날만 기다리는 무기력한 아버지가, 이 작은 집에 갇혀 지내면서도 창밖의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철수에게 전해주는 아버지가 말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반복할 뿐이다. 한숨, 권유, 거절, 말다툼, 다시 한숨.
대사 중 백련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백련은 갇혀있어야만 핀다는 것. 저수지의 고인 물에서 피고 지는 꽃을 보며 철수는 ‘흙탕물에 갇혀있는 것 같은 아버지’와 연결한다. 꽃이 피면 그 꽃은 그저 죽기만을 기다린다는 아버지와 달리 철수는 꽃은 언제든 다시 피어난다며, 아버지가 변하기를 원래의 아버지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아버지는 원래 자신은 이랬다며 그저 아닌 척, 살아왔을 뿐이라고 한다. ‘현실감’. 철수는 아버지에 대한 응어리진 분노를 터트리며 ‘현실감’이란 단어를 꺼낸다. 아버지는 현실감이 없다고 그저 소파에 앉아 창밖을, 아니 허상을 보고 있다고 말한다. 나 또한 연극을 보며 정말 아버지 용재가 현실을 살지 못하는 건 아닐까,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 매일 자연인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철수의 글 속에서는 비슷함에도 두 부자의 상황이 다르게 다가왔다.
철수는 부자(父子)의 이야기를 쓴다. 이는 철수와 그의 아버지가 반영된 이야기다. 이때 영희는 조금 색다른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이를 토대로 철수는 ‘인어’ 부자의 이야기를 쓰게 된다. 작살로 인어를 죽이는 사냥꾼들과 오염된 바다로 인해 더는 바다로 갈 수 없게 된 인어 부자의 육지 생활을 말이다. 정착할 곳 없는 인어 부자는 도망친다. 계속 도망친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본 채 말이다.
인어 아버지는 바다의 위험함과 잔혹함을 겪고 다시는 바다에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다짐하지만, 그 아들은 바다에 가고 싶어 한다. 바다에서 숨을 쉬고 싶어 한다. 어느 날 아들은 인어들이 살기 좋은 바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며 그곳으로 가고 싶다고 한다. 아버지는 강하게 아들을 막지만, 아들도 더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곳으로 향한 인어들이 다시 돌아온 것을 본 이가 아무도 없음에도 아들은 그곳으로 가서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 한다.
아들은 마치 명확하지 않은 허상을 좇는 것 같다. 오히려 아버지가 현실감이 뚜렷해 아들의 도전이 무모해 보인다.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껴안으면서까지, ‘바다’가 무엇이길래. 철수는 영희와 대화할 때 ‘성질’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이게 내 성질이라고. 성질은 운명과 맞닿아 있다는 듯한 그 대화를 떠올리다 보면 인어에게 있어 ‘바다’는 운명, 혹은 꿈, 외면했던 마음 그러한 것들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인어 아버지는 결국 아들을 바다로 떠나보낸다. 이러한 철수의 글을 본 아버지 용재는 철수에게 하루를 끝마치고 돌아오면 자신이 마중 나가겠다고, 그렇게 약속한다. 창밖에는 비가 오지만 구름이 걷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아버지 용재는 집 안에 갇혀있던 것이 아닌, 집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잠시 월동한 것은 아닐까. 그 밖의 세계는 사실 저수지보다 깊고 바다보다 넓을지도 모른다.
이 연극의 결말이, 용재가 내밀 그 한 발짝이 연꽃 봉오리의 기지개 같아서 좋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맑은 물을 흐리게 만든다는 말보다, 흙탕물 속에서도 맑게 피어나는 꽃이 있다는 말이 더 좋다. 희망이 있다면 그 틈이라도 들여다보라고, 얕은 물에는 덫이 많으니 깊게 헤엄치라고 이 연극이 내게 나지막이 속삭여준 말이 좋다. 나는 이제 그 황량하던 겨울의 연못도 더는 삭막하지 않게 바라볼 수 있다. 다시 피어날 저 연꽃의 맑음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