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196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서두이다. 소설을 읽지 않은 이들도 알 정도로 유명한 구절이다. [설국]의 첫 문장은 왜 이리도 칭송 받는 것일까? 아마 그것은 책을 펼쳐 든 우리를 단숨에 하얀 눈의 고장, 니가타현으로 데려가는 흡입력 때문일 것이다.
다시 첫 문장부터 읽어 내려가자. 오랜 밤처럼 길고 어두운 터널이 기차를 집어 삼킨다. 창에 비치는 어둠과 나 자신, 기차 내부의 모습들을 가만히 응시하던 때, 어느 순간 창의 화면은 어둠을 벗어나 흰 눈으로 뒤덮인 마을의 저녁 풍경으로 가득 찬다. 기차 안의 온기와 창 너머 바깥의 에는 듯한 추위, 바스락 거리는 사람 소리와 움직이는 기차의 묵직한 소음. 눈을 감은 것도 아닌데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겨울 풍경, 숨을 깊게 들이마신 것도 아닌데 생생히 맡아지는 겨울 내음이다.
상상하지 않아도 상상하게 되는 ‘설국’. 그것이 이 첫 문장이 주는 경이로움이다. 우리는 그렇게 문장 하나 하나가 그려내는 풍경과 그 너머의 세계로 상상을 펼쳐내며 소설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자연과 인간 운명에 내재하는 존재의 유한한 아름다움을 우수 어린 회화적 언어로 묘사했다.”
1968년, 스웨덴 한림원이 밝힌 [설국]의 노벨 문학상 선정 이유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실제로 소설의 배경이 되는 눈이 유독 많이 내리기로 유명한 니가타현 에치고의 유자와 온천에 머물며 글을 집필했다.
야스나리는 주인공 시마무라의 시선을 빌려 자신이 직접 두 눈으로 마주했던 니가타현 곳곳의 아름다운 정경을 회화처럼 묘사했다.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개울을 따라 이윽고 너른 벌판으로 나오자, 신기하게 깎아지른 정상으로부터 완만하고 아름다운 사선이 멀리 산기슭까지 뻗어 내린 능선 위에 달이 떠올랐다. 들판 끝, 단 하나의 볼 거리인 그 산의 온전한 모습을 엷게 노을 진 하늘이 짙은 남빛으로 선명하게 그려냈다. 달은 아직 흐릿하여 겨울 밤의 차고 깨끗한 느낌은 없었다.”
[설국]은 추운 어느 겨울 날의 어스름한 저녁,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읽길 권한다.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라면 더욱 좋다. 나는 지난 겨울, 류이치 사카모토의 ‘Railroad Man (Poppoya OST)’을 들으며 이 책을 읽었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을 오직 단 하나의 계절로 정의해야 한다면, 겨울이 아닐까.
처연하고 아름다운 ‘Railroad Man’의 선율은 야스나리가 그려내는 겨울 풍경, 그리고 잔잔하게 읊조리는 듯한 감정선과 어우러져 서정의 정수를 극대화한다.
[설국]은 오직 겨울 그 자체의 서정적인 계절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가 충분한 소설이다.
겨울의 끝자락으로 달려가고 있는 지금, 봄이 오기 전에 책을 펼쳐 함박눈이 쌓인 니가타현으로 여행을 떠나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