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내가 선택하는 우주 -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

글 입력 2024.11.09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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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무대 위에는 곳곳에 야광으로 표시된 점들이 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어둠 속에서 무대를 치우고 채울 때 기준점이 되어주는 곳들이라고 알고 있다. 어느 무대에나 그것이 보이는데, 이번에 본 연극 무대에서는 유난히 그 점들이 눈에 띄었다. 돋보이는 점들이 우주의 별 같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면서 연극이 시작하길 기다렸다. 곧 배우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조명이 밝아지고 그 별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데 배우가 입을 열더니 ‘야광 버섯’이라는 단어를 말했다. 그러면 저게 무대의 보조 도구도 아니고, 별도 아니고, 야광 버섯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연극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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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은 여러 시공간이 중첩되며 전개되는 SF 연극이다. 야광 버섯 동호회 회원이자 물리학도인 ‘차연’, 그리고 스스로에 관한 기억마저 흐려진 채 경찰서에 와 있는 노파. 이 둘이 다른 시공간에 있지만 결국 같은 사람이라는 암시가 극 전체에 걸쳐 드러난다. 야광 버섯 동호회의 회장 ‘서 회장’을 찾는 목소리와 야광 버섯 서식지에 매겨놓은 번호를 계속해서 되뇌는 목소리가 두 시공간을 연결한다. 둘은 또 다른 우주에 존재할 뿐인, 하나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중우주라는 설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면 이 두 상황이 서로 ‘다른 세계(우주)에서’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젊은 차연과 노파가 등장인물이 되어 그 점이 덜 드러난다. 그러다 보니 이 둘의 관계가 다중우주의 여러 차연이 아니라 그저 한 우주 속 과거와 미래의 연결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쉽다. 극을 마지막까지 보고 나면 다중우주 설정은 잘 느껴지지 않고 그냥 젊은 시절의 자신을 꿈속에서 다시 그려보는 노파만 남는 것 같다.


다중우주 장르의 매력은 한 시퀀스에서 짧고 굵게 드러난다. 극의 앞에서 나왔던 대사들이 다른 인물과 인물 사이에서 발화되며 앞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세계도 여러 우주의 여러 상황 중 하나일 뿐임을 보여주는 이 씬은 빠른 속도로 코믹하게 연출된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재밌게 본 사람이라면 반가움이 일 만한 장면이다.


내가 하는 말과 처한 상황이 바뀐다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되는 걸까? 나를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둘러싸는 것들이 바뀌어도 나는 여전히 나인가.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다니던 학교로 가는 길과 그 주변 건물을 하나하나 짚는 노파에 경찰은 한숨을 쉰다. 그렇게 애매하게 설명하지 말고 정확히 말하라는 것이다.


사실 노파는 충분히 정확하게 말하고 있었다는 게 내 의견이긴 하지만, 어쨌든 연극 안에서 이 장면은 주변이 아닌 주체를 알고 있어야 함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굳이 다중우주까지 나가지 않아도, 나의 소속과 관계는 수시로 변하고, 변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나의 존재만이 홀로 변하지 않는다.


다만 야광 버섯의 존재가 계속해서 강조되는 것이 의아하다. 관계보다 홀로 선 자신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노파, 그러니까 서 회장이 개체수를 늘린 야광 버섯들은 구획이 나누어지며, 소속이 생기면서 번성했다. 노파 또한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렸지만 그 야광 버섯들의 구획만큼은 끊임없이 되뇔 수 있을 만큼 명확하게 알고 있다. 이걸 보면 초점이 다시금 관계와 주변부에 맞춰지는 것 같다. 결국 나를 쌓는 것은 내 주위라고 말하는 듯한.


하지만 저 문장을 반대로 말해보기로 했다. 내 주위를 쌓는 것은 결국 나라고. 내 주위가 만들어지고 변하는 것은 내가 여기저기 옮겨져서가 아니라, 가만히 있는 내가 다른 것들을 선택하고 끌어모으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선택을 하는 나는 누구인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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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질문에 관한 답을 얻지 못한 채로 극장을 나왔다. 연극을 보기 직전에 서점에 들러 샀던 책이 아직 가방에 그대로 있기에, 카페에 들어가 그 책을 펼쳤다. 김겨울 작가의 시집, <우화들>인데, 첫 장에 시인의 말이 나온다.

 

 

모든 지점으로 향하는 장력은 자기 확인의 

또 다른 이름이다. 모든 곳에 존재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데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혹은 아무데도 존재하길 원하지 않는 

사람이 모든 곳으로 끌려가려 한다.

 

그러나 실은 하나의 점일 뿐이다.

점에는 부피도 길이도 무게도 없으므로, 

오로지 허공의 모든 곳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된다.


허공에 고향을 지을 수 있다.

정말로 그렇다.

 

 

연극과 시집 모두 사전 정보 없이 선택한 것들인데 어쩐지 겹치는 구석이 있다. 시인의 말과 목차만 읽었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말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사실 시집을 다 읽어도 뜻을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고. 하지만 이것까지 읽고 나면 연극의 뜻을 조금 더 헤아려볼 수 있을 듯한 기분. 그날의 내가 이 연극과 이 시집을 내 곁에 두길 선택했기에 또 새로운 곡해의 우주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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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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