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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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는 사라지지 않는 흉터를 간직한 채 걷기 시작하는 청년의 이야기이다. 자아가 형성되기 전부터 동굴 속에서 ‘그것’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되며, 족쇄와 쇠사슬에 억압당한 소년은 족쇄와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란 발상 자체를 하지 못한다. 끔찍한 어둠과 공허, 그리고 ‘그것’의 폭력을 버텨내며 유년기를 보낸다.

 

어둠과 폭력, 공허 외엔 몰랐던 유년기를 거쳐 살아남으며 소년은 청년으로 육체적인 성장을 겪는다. 자신을 묶어두던 쇠사슬이 짧아졌다고 느끼기도 하고, 그것이 소년의 몸부림에 휘청거리는 체험을 겪기도 한다. 바깥을 나갈 가능성을 탐색하기 시작한 순간 소년은 청년으로 성장한다. 우발적인 사고였지만, 무심코 휘두른 쇠사슬에 청년은 예상치도 못하게 그것에서 벗어나, 어두운 유년기의 동굴에서 밖으로 내던져진다. 청년은 끝이 끊어진 쇠사슬과 족쇄를 단 채 처음 세상으로 발을 들이게 된다.

 

그러나 그가 알게 된 새로운 세상은 그가 무력하지 않다는, 육체적 성장만을 확인시켜줄 뿐 그를 폭력과 착취에서 해방해주지는 않는다. 그의 세계를 온통 차지하던 근원적인 폭력 속에서 벗어나 혼돈 속에 빠진 청년에게 손 내민 것은, 다름 아닌 또 다른 폭력이다. 다만 이쪽은 조금 더 은근하다. 두께는 똑같으나 가볍고 반짝거리는 쇠사슬이 이를 은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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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속에서 청년은 여전히 폭력에 노출되는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폭력의 주체로 그 위치가 바뀌게 된다. 깊은 곳에 내재 된 폭력성은 그를 제한하던 사슬이 사라지고 누군가 그에게 폭력을 퍼붓는 순간 그를 방어하듯 밖으로 표출된다. 청년은 자신 안에 침잠한 폭력성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남자의 밑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지만 그 폭력성이 결국 자신을 갉아먹으며, 지금의 생활이 동굴에서 그것에게 시달리는 일과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는다. 청년은 벗어나고자 하지만 이미 망가진 그는 남자가 청년을 스스로 버릴 때까지 무엇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서술되었듯, 자신을 데려온 남자가 사라진 방향과 반대 방향을 ‘선택’하여 걷기 시작한다.

 

폭력을 버텨내는 것, 혹은 폭력을 휘두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전무한 청년이 삶을 구걸하는 방식은 또다시 누군가에게 자신의 족쇄를 쥐여주는 일이다. 어딘지 익숙한 마을에 도착한 청년은 이번엔 여자의 집 헛간에 묶여 살아가게 된다. 그가 묶여 생활하게 된 헛간은 가로대가 쉽게 빠져 도망칠 수 있으나 청년은 도망가지 않는다. 여전히 폭언과 폭력이 존재하나 먹을 것이 제공되고, 더이상 폭력을 휘두르며 망가질 일이 없고, 그가 처음으로 아름답다 생각한 맹인 여자가 있는 나름대로 평화로운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 평화로운 폭력 속 청년은 안주하려 하지만 여자의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깨달아 평화를 위협받은 순간, 이곳에 머무를 수 없음을 자각한다. 동시에 평화로운 시간을 가지며 잠시 뒷전으로 밀려났던 자아 또한 다시금 되살아난다. 여자는 청년에게 모든 진실을 이야기해주며 묻는다.


“그게 당신인가요?”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여자는 잠시 기다렸다. 그가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가 물었다.

“아직도 거기 있나요?”

그는 간신히 사슬을 흔들어 쇠가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239p)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에 청년은 대답할 수 없다. 다시 여자가 아직도 그곳에 있냐고 묻자 그는 사슬을 흔들어 자신의 위치를 알린다. 여기서 그는 여자의 앞에 있지만, 동시에 아직도 그 동굴 속에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자가 한 번 더 같은 질문을 하자, 청년은 여태까지 제 행동반경을 제한했던 쇠사슬을 집어던지고 각성한다.

 

여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청년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다. 청년에게 처음 아름다움을 가르쳐주었듯 그에게 또 다른 인생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진실을 통해 청년은 나아갈 계기를 가지고 정신적으로 성장한다. 쏟아지는 무수한 별빛을 보며 이제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과거와 달리, 청년은 이 굴레가 반복되지 않길 바라며 근원적인 공포의 실체를 마주하러 간다. 너무도 익숙한 쇠말뚝을 보며 그는 그가 성공한다면 영원히 누구도 갇히지 않게 될 자리라고 말한다.

 

그저 실수로 휘둘렀던 쇠사슬을 이제 청년은 완전히 다룰 수 있다. 쇠사슬이 제한하던 세상보다 그가 아는 세상이 더 넓어졌기 때문이다. 그를 붙잡아 매어두던 쇠사슬로 청년은 결국 ‘그것’을 죽이고 ‘그것’의 실체를 목도한다.


새가 죽었으니 그곳에는 더 이상 그가 얻을 것도 빼앗길 것도 없었다. 새가 그에게 남긴 것은 먹이로서 살았을 시절의 흉터뿐이었다.

그 사실이 그는 한없이 안타까웠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죽은 새가 다시 살아나기를, 이렇게 쉽게 죽어버리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그는 한참이나 그곳에 서 죽은 새의 푸른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는 여자가 기다리는 마을을 향해 절룩거리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248p)


서술되었듯 온통 ‘그것’을 두려워했던 청년의 과거는 그저 유년 시절의 흉터로 남았을 뿐이다. 청년은 여태까지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었던 ‘그것’, 새의 볼품없고 처참한 최후를 보고 연민을 느낀다. 이미 그는 그 새보다 한참 더 자라버린 것이다.

 

청년을 제외한 소설 속 등장인물, 인간들은 폭력과 누군가의 희생에 기생하며 살아가고 있다. 경기장으로 그를 내몰았던 중년의 남자, 청년을 제물로 바친 여자의 가족들과 그 원인이었던 여자, 대대로 사람을 바치고 그 풍습을 지켜오며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 청년은 자신의 세계를 넓혀준 여자에게 사람들의 그 선택은 원흉인 괴물의 탓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이 방관자이자 직간접적인 가해자임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돌아온 여자의 집에서, 여자는 증발하듯 사라진다. 언뜻 동화 속 권선징악을 마주하듯 저마다의 결말을 맞이하며 인물들은 사라진다. 그러나 이러한 보복이 피해자인 청년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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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을 데려온 남자가 사라진 방향과 반대 방향을 선택했다. 걷기 시작했다. (222쪽)

그리고 그는 여자가 기다리는 마을을 향해 절룩거리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248쪽)

그리고 마침내 눈물이 멈추었을 때, 세상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그는 해가 뜨는 쪽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252쪽)


쏟아지는 세계의 폭력 속에서 수동적인 동사로 휘둘리기만 하던 청년의 진정한 저항은,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거나 복수하는 것이 아니다. 흉터를 껴안고 이 모든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걷는 것이다. ‘걷기 시작했다’라는 문장은 이 소설을 통틀어 딱 세 번 등장한다. 자신을 버린 남자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갈 때, 새를 죽이고 여자에게로 돌아갈 때, 눈물을 멈추고 걷기 시작할 때이다. 모두 그가 스스로 선택한 순간이다.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와 주체적인 선택이 매번 올곧은 결과를 내지는 않는다. 중년 남자에게서 도망치고 나서도 청년은 또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제 족쇄와 사슬을 맡겼다. 그의 근원적인 공포와 폭력의 주체였던 새를 죽여 속죄양의 연쇄를 끊어냈음에도 청년은 여자의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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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끝까지 그의 남은 오른쪽 수갑이 사라졌다는 묘사는 어디에도 없고 여전히 그는 흉터투성이의 몸을 가지고 있다. 정보라가 인터뷰에서 밝혔듯 ‘세상의 불의나 부정을 저주해 나쁜 사람이 망했다고 하더라도, 생존자들이 그때 겪은 기억이나 감정을 싹 잊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가 걷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절망은 몸에 새겨진 120개의 흉터 자국보다도 훨씬 더 크고 깊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고 나서도 흉터로서의 자신을 안고 새로운 삶을 찾아 걷기 시작하였다.

 

희망은 그곳에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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