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ge를 따라서] 모국어로써의 향

글 입력 2024.05.27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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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헬렌 켈러의 이야기를 읽었다.

 

[…헬렌 켈러는 숲 속을 한참 산책하고 돌아온 친구에게 무엇을 관찰했느냐 물었다. “별로 특별한 건 없었어” 친구의 대답에 놀란 헬렌 켈러는 깨달았다.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많은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일상의 대부분을 시각에 의지한다. 본다는 것은 얼마나 강력한지 다른 감각으로 느꼈던 정보도 시각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된다. 그러나 때론 이 맹목적인 믿음 앞에 다른 감각들이 얼마나 배제되는지 우리들은 잊곤 한다.


흐린 날 밖으로 나가보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은빛을 띈 하늘과 가려진 햇빛 때문에 정오에도 어둑한 세상이 보인다. 조만간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 뿐이다. 눈을 뜨고 있는 한 우리들은 자연스레 보이는 것을 통해 세상을 판단하고 확인한다.


이번엔 눈을 감고 공기 중의 냄새를 맡아보자.. 평소와 같은 공기 외엔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다 들숨, 날숨, 여러번의 바람이 숨구멍을 오가며 시간이 지나자 코의 감각은 점점 예민해진다. 마치 눈으로 보는듯 생생한 세상의 향기들이 콧구멍의 점막에 퍼져나간다.

 

시원한 바람 사이에서 흐릿한 물기운과 요동치는 흙내음이 코 끝까지 치고 올라온다. 곧 들이닥칠 비의 예보다. 콧구멍이 커지도록 진한 대지의 비옥함이 푸르고 생생한 풀잎의 향기와 만나 차가운 습기를 통해 전해질 때면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비가 내리고 있을테다. 굳이 보거나 듣지 않아도 후각만으로 알 수 있는 일이 있다는걸 깨닫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향기는 우리에게 말을 거는 언어이자 순간에 끼워넣어진 책갈피다. 살아가며 우연히 마주친 익숙한 향기는 우리에게 말을 걸며 순식간에 삶의 특정한 페이지로 안내한다. 향은 희노애락을 가리지 않고 늘 존재하기에, 때로는 우리의 삶 전체가 얇은 겹의 향으로 층위를 이루는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기억 속 향을 마주하는 일은 읽었던 책을 다시금 음미하며 펼쳐보는 일이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배운 이의 앞에는 광활하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내가 향을, 또 향의 언어를 사랑하는 이유이다. 먼 세계의 별천지로 떠나지 않아도, 근처 숲 속의 산책만으로 특별함을 찾을 수 있는 사람. 감각의 다중언어자, 이 문장이 나를 소개할 수 있을 그 날이 오길 꿈꾼다.


Smell is a potent wizard that transports you across thousand of miles and all the years you have lived. 냄새는 수천 마일 밖과 그 동안 살아온 모든 세월을 가로질러 당신을 실어 나르는 강력한 마법사다. - Helen Keller 헬렌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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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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