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과학은 환상적이지만 환상이 아니다 - 과학 잔혹사

글 입력 2024.05.1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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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을 발명한 과학자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어야 한다는 진심 어린 우스갯소리가 있다. 매 여름이 돌아올 때마다 그 농담 아닌 농담에 고개를 끄덕인다. 이처럼 과학은 인류의 삶을 개선한다. 그리고 그것을 주도하는 사람은 과학자이니 과학자는 인류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인도하는, ‘좋은’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꼭 그렇듯, 꼭 그렇지는 않다.

 

 

 

과학의 선과 악




우리 사회에서 과학자는 좋은 사람이다. 대개는 그렇다.

 

(p.13)

 


굳이 따지자면 우리는 과학자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그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기보다는 그들은 객관적이고 이성적이기 때문에 ‘나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가까운 듯하다. 과학은 사실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학문이기에 이성적이고 정직할 수밖에 없으며 과학자들은 그러한 진리를 탐구하고 수행하여 모두를 이롭게 만든다는, 그런 어쩌고저쩌고.


<과학 잔혹사>는 이러한 환상을 허무는 책이다. 지금 우리를 둘러싼 과학이 어떠한 약탈, 살인, 고문, 그리고 거짓 위에 세워졌는지, 이 지하에 어떤 악행이 도사리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과학의 ‘악행’이라니, 생소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과학의 본질에 선과 악이 없음은 사실일지라도 ‘인간의 과학’에는 분명 선과 악이 있다. 과학을 행하는 게 결국 인간인데 어찌 선악을 배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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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얼마나 긴밀한 사회적 과정인지를 감안하면, 인권을 유린하거나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함으로써 사회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는 거의 항상 결국에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큰 대가를 치르게 한다-과학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심지어 과학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을 취약하게 함으로써.

 

(p.437)

 


그렇기에 과학의 발전 혹은 인류의 진보를 핑계로 과학에서 윤리적 잣대를 빼앗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표현이 너무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좋아들 하는 이성을 굳이 강조하자면, 이는 비이성적인 일이다. 선과 악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해서 이들을 한순간에 모두 극악무도한 사람들로 만들어버리려는 것은 아니다(그래도 대체로 극악무도한 것 같긴 하다). 어떤 이는 선한 의도를 갖고 있었는데 악한 결과가 나왔고, 어떤 이는 악의 흐름에 나름대로 저항했지만 결국 휩쓸렸다. 또 어떤 이는 당시의 시대상으로서는 그리 이상하지 않은데 지금의 눈으로 봤을 때는 제정신이 아닌 경우도 있다. 이 모든 사례의 결과물은 공통적이다. 피해자가 있지만, 발전을 이루었다. 


또는, 발전을 이루었지만, 피해자가 있다. 


그간의 편견과는 달리, 피해자의 존재는 과학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피해자들이 조명을 받으면 과학의 발목이 잡힐 것이라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애써 피해자들을 무시해 왔던 것 같은데, 그 반대다. 그들의 존재를 지우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과학의 본질을 지킨다. 


이는 흔한 문장,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말로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장은 저렇게만 사용될 때가 많으나 나는 이 연장선에서 나올 수 있는 말,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할 수 없는 만큼이나 ‘수단이 목적을 훼손할 수도 없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해자의 존재를 숨기고 과학과 관련이 없는 것이라 애써 선 긋는 것이 도리어 과학의 음침함과 잘못을 강조한다. 


책의 사례를 들어, 해부학은 과학, 특히 의학에 있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불법적으로 시신을 공수하는 시신 도굴꾼과 일부 해부학자 탓에 사람들의 불신과 적대감을 오랜 시간 받아왔다. 이는 해부학의 발전을 몇십 년, 어쩌면 몇백 년씩 늦췄을 것이다. 이런 저해가 해부학에서만 이뤄졌을 리 없다. 이런 일이 있을 때 과학이 불러온 불행한 결과를 가리는 데 급급할 게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에 적절한 조처를 하고 과학의 본질을 되찾기 위해 힘썼다면 어땠을까 의미 없는 만약을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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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사를 이야기하는 이유



부록과 주석 등등을 제하고도 400쪽이 넘어가는 분량의 책이 끝까지 잘 읽히는 이유는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서술 방식에 있다. 총 12장으로 이루어져 각각의 주제와 관련된 사건을 다루는데, 한 챕터 내에서는 그 주제에 충실하면서도 다음 챕터로 넘어가는 것만은 놀랍도록 능숙하다. 여러 챕터로 구성된 비문학의 경우 제각각의 주제를 다루느라 챕터에서 챕터로 넘어갈 때 뚝뚝 끊기는 경우가 많고 그런 책이 워낙 흔한지라 그러한 형식이 굳이 문제 되지도 않지만, 이 책은 예외다. 챕터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한두 단락만으로 갑자기 다음 주제를 자연스럽게 끌어내 꼭 다음 화를 바로 보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드라마 같을 정도다. 별개의 것처럼 보이는 두 주제를 구렁이 담 넘듯 연결하는 능력이 글을 다루는 저자의 실력, 그리고 주제에 관한 그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이 통찰력은 아마 저자의 지식이 방대하기 때문일 텐데, 꼼꼼하고 풍성하게 구성되어 전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주석이나 참고문헌이 그를 증명한다. 솔직히 참고문헌까지 살펴볼 일은 일반 독자 입장에서 잘 없겠지만 주석만큼은 재밌는 사실이 많아 흥미롭게 곁들여 읽어볼 만하다. 꼭 주석까지 가지 않더라도 본문에서 슬금슬금 달아놓은 트리비아도 꽤 황당하고 재미있다. 범인인 의사가 <지킬앤하이드>의 모델이 되었다는 것이나 사건의 재판장이 <모비딕>의 작가인 허먼 멜빌의 장인이었다는 것 등은 책을 이해하는 데 하등 쓸모없는 정보지만 괜히 더 호기심을 자극하고 이 책의 내용이 스릴러 소설이 아니라 실제 역사 속의 일임을 은연중에 강조한다. 


역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 중 하나인데, 잊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책의 부록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부록이라는 이름으로 달려 있지만 단순히 부록이라기에는 너무 중요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이 부분은, 미래에 걱정해야 할 과학의 윤리 문제 여러 개를 가볍게 언급한다. 

 

 

솔직하게 말하면, 위에서 언급한 범죄 중 일부는 좀 억지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미래는 항상 기이해 보인다. 만약 1900년에 살던 사람들에게 21세기에는 전자들이 든 상자를 사용해 은행에서 현금을 훔치고, 전 여자친구의 얼굴을 따다 리벤지 포르노를 제작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다.

 

(p.457-458)

 


이 부록 아닌 부록에 눈이 갔던 데에는 내가 SF 장르의 팬이라는 이유도 한몫할 것이다. SF는 환상적이지만 환상이 아니다. 분명 일어났던 일이거나 일어날 일이다. 그것을 이 책이 증명한다. 과학도 환상적이지만 환상이 아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역사로 남기 때문이다. 제목이 과학 잔혹’사’인 것처럼 이것은 과학이지만 그보다 역사다. 우리는 언제나 역사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마찬가지로 과학의 잔혹한 역사로 과학의 잔혹한 미래를 그린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들이 과학의 치부로 숨겨질 것이 아니라, 지하에서 끌어올려져야 한다. 절망적인 SF가 아닌 환상적인 SF를 살고 싶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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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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