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관람은 순진한 행위가 아니다 - 인 더 하우스 [영화]

관음인가 관람인가
글 입력 2024.04.16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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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에는 영화 <인 더 하우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주의 연극에는 ‘제4의 벽’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무대와 객석 사이에, 두 세계를 분리하는 가상의 벽이 하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 벽에 난 구멍을 통해 무대 위 재현되는 세계를 몰래 엿보는 것이 관객이다. 신기하게도 인물들이 관객을 엿볼 것이라고는 잘 가정하지 않는다. 관객은 극에 관여하지 않고, 극 중 인물들은 벽 너머 존재하는 관객의 존재를 알지도, 보지도 못한다. 이론화된 개념으로 인지하지는 못할지라도, 제4의 벽이 상정하는 관객의 태도는 너무도 당연하게 학습되어왔다. 영화의 스크린은 또 어떤가. 촬영이 완료된 후 관객에게 공개되는 영화의 특성상, 영화 속 인물들과 관객의 물리적인 분리는 필연적이며, 영화 속 인물들은 관객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다. 영화를 보는 것은, 마치 인물들의 삶을 스크린 또는 모니터라는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엿보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들을 실제 사람이 살고있는 집의 한쪽 벽면과 유리창이라고 가정해보면 어떨까. 집 안의 생활을 몰래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별거 아니었던 일이 한순간에 섬뜩해진다. 지금껏 양심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 비도덕적인 일을 해왔던 것처럼.

 

영화 <인 더 하우스>(프랑소와 오종 감독, 2012)에는 위대한 문학작품을 가르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일을 시작했던 고등학교 문학 교사 제르망이 등장한다. 하지만 실상은 상당한 나이가 될 때까지 해마다 맞춤법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학생들을 상대하는 중이다. 권태와 냉소로 가득한 그의 앞에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진 학생, 클로드가 등장한다. 클로드의 작문 과제는 몰입력 있고, 세계를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놓으며, 무엇보다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한다. 클로드는 헤르만이 찾아 헤맨 미래세대의 희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클로드의 글이 같은 반 친구인 라파의 집 안에서 벌어지는 사생활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묘사는 사뭇 외설적이며 조롱의 뉘앙스를 띠고 있기도 하다. 클로드는 늘 라파의 집에 찾아가 그의 가정을 관찰하며 글을 쓴다.

 

수업을 계속 진행하기 위해 헤르만은 선택해야 한다. 그저 제4의 벽 너머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이 되어 클로드의 글을 독려할 것인지, 유리창으로 타인의 집 안을 들여다봄에 죄책감과 분노를 느끼는 이가 되어 클로드를 제지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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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끝줄 소년에서 집 안의 관망자로


 

영화는 스페인 극작가 후안 마요르가가 2000년 발표한 희곡 <맨 끝줄 소년>을 원작으로 한다. 고등학교에서 진행되는 문학 교습 상황을 바탕으로, 작품의 창작과 향유에 있어 ‘재현’과 ‘대상화’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단순하게는 작품에서 재현되는 대상의 ‘동의’에 관한 윤리부터 시작해, 타인에 대한 존중보다 흥미와 작품성을 먼저 생각하는 데에서 파생되는 모순들을 폭넓게 다룬다. 클라우디오(영화에서의 클로드)의 작문을 낭독하는 형태로 제시되던 이야기는 ‘개연성과 흥미 유발’을 위한 헤르만(영화에서의 제르망)의 지도, 그리고 클라우디오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편집되며 점점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모습을 갖추어 실제 배우들의 대화 형태로 제시된다. 그렇게 관객들은 라파 부모님이 겪는 부부간의 갈등과 사생활을 속속들이 지켜보게 된다. 헤르만이 강조하듯 이야기의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사실처럼 보이기에’ 관객은 흥미와 궁금증을 가지고 그것이 진짜인 양 몰입하게 된다.

 

희곡에는 어떠한 무대 세트나 이야기의 장소, 장면의 전환, 인물의 등, 퇴장이 표기되지 않는다. 연출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상황이 벌어지는 배경을 백지로 남겨두고, 보는 이가 상상으로 채워 넣으며 이야기를 따라가게끔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야기에 몰입하는 관객들은 그저 제4의 벽 너머 수동적인 관찰자로만 남을 수 없다. 관객은 클라우디오, 헤르만과 마찬가지로 자의적 상상을 통해 장면을 적극적으로 구성하고 조작하는 ‘공범’이 되는 것이다. 

 

작품에는 또 다른 예술가가 한 명 등장한다. 미술 갤러리를 운영하는 헤르만의 아내 후아나(영화에서의 쟝)이다. 클라우디오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면서도, 그 윤리성을 지적하는 복합적인 인물이다. 비슷한 상황이나 대화 키워드를 중심으로 헤르만-후아나, 헤르만-클라우디오, 라파 부모님의 장면은 짧은 호흡으로 교차된다. 그렇게 인물들의 서로 다른 입장은 겹쳐지고 ‘잘 팔리지만 덜 윤리적인 예술과 윤리적이지만 외면받는 예술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 ‘어디까지가 파격적인 표현의 자유이고 어디까지가 외설인가’ 와 같은 입체적인 딜레마를 생성한다. 또한 이러한 장면 배치는 어떤 것이 가상의 이야기이고, 어떤 것이 실제 사실인지, 그 이분법적인 구분을 흐린다. 관객이 보고 있는 것도 결국 연극이라는 예술 작품으로서 ‘이야기’이며, 그들도 헤르만과 같이 어느 재현된 수업 장면을 보며 말과 생각을 얹고 있는 입장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관객들은 헤르만과 클라우디오를 향해 보낸 비판에서 그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무대는 상상력이 활발하게 작용하는 공간이다. 모든 사실적인 사항들을 전부 구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연극은 이 관객의 ‘상상’이라는 요소를 극대화하여 메시지 전달에 활용했다. 관객이 극을 보는 자신의 행위 자체에 불쾌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영화는 시공간 표현에 있어서 제약이 적으며, 그렇기에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을 주로 사용한다. 따라서 희곡이 영화화됨에 따라 효과적인 관객의 체험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맨 끝줄 소년>에서는 ‘맨 끝줄’의 의미를 설명하는 대사가 나온다. 클라우디오가 앉는 자리이자, ‘아무도 거기를 못 보지만 거기선 모든 걸 볼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이다. ‘맨 끝줄 소년’은 클라우디오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클라우디오와 함께 라파 가족을 바라보는 제4의 벽 너머 객석의 관객들을 의미한다. 영화의 제목은 <인 더 하우스>로, 프랑스어 원제 역시 으로 같다. ‘집 안에서’ 또는 ‘집 안으로’라는 의미이다. 관객이 보는 것이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설명과 함께 관객을 인물들의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느낌도 준다. 영화는 ‘집 안’이라는 최대한 구체적인 배경 아래 인물들의 생활의 단면을 노출한다. 집은 ‘허락 없이 들여다보면 안 된다’는 의식이 확실하게 감각되는 사적인 장소이다. 그러한 집 안에 함께 위치하며 인물들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영화는 때때로 관객의 거북함과 불쾌감을 유발한다. 또한 ‘본다’는 행위를 적극적인 침입 행위와 연결지음으로써 보는 행위가 단순히 결백하고 수동적인 행위만은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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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예술이 행해진 이유


 

희곡과 영화의 가장 다른 점 중 하나는 클로드(희곡의 클라우디오)의 가정사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지 여부이다. 희곡에서 클라우디오의 가정사는 확실한 증거를 갖추어 등장하지 않는다. 아들이 밤새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걱정해 줄 따뜻한 분위기의 가정이 없다는 것, 클라우디오가 어릴 때 어머니가 떠났다는 것, 이러한 단서들로 인물의 유복하지 않은 가정환경을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클라우디오의 입을 통해서만 드러나기에 그것이 모두 진실인지, 대화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전략적 발언인지 제대로 알 수는 없다. 이 역시 클라우디오의 배경을 유추하고 상상하며 인물이 누구인지를 정의하려는 관객을, 실제 사건에 상상을 가미해 라파 가족 이야기를 쓰는 클라우디오와 같은 층위에 두고자 하는 전략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클로드의 가정사가 ‘학생 기록부’라는 정확한 증거를 통해 드러난다. 어머니는 안 계시고, 아버지는 공장 사고로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클로드가 단란한 정상 가족처럼 보이는 라파의 집에 왜 그토록 들어가 보고자 했는지, 그리고 글쓰기 그 자체에 대해 왜 그렇게 집착하게 되었는지, 그 열망의 배경과 양상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낸다. 클로드는 ‘학교를 다 그만두고 싶었으나 제르망이 자신의 가능성을 보아준 덕에 그만두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영화는 글쓰기라는 예술교육이 클로드에게 위안이 되었고, 제도권 안에서 삶의 질이 보장될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한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영화가 보는 사회와 예술의 역할은 카메라가 클로드를 비추는 방향에서도 드러난다. 영화의 초반, 카메라는 클로드의 얼굴을 비추지 않은 채, 등교 중인 그의 뒷모습을 쫓는다. 그마저도 곧이어 군중 속에 가려지고 만다. 클로드의 얼굴이 처음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제르망이 그가 낸 첫 작문 과제 때문에 그를 불러세웠을 때이다. 그렇게 문제적인 과제를 냈기 때문에 교사는 군중 속 한 명의 학생에 불과했던 클로드의 얼굴을 알아봐 준다. 그가 누구인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 비로소 학생 기록부를 요청할 정도로 궁금해하는 것이다.

 

어쩌면 라파의 어머니, 에스더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단란해 보였던 라파의 가정 안에는, 물론 클로드의 작문을 통해 드러나기에 그게 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위태로운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다. 클로드의 글이 없었더라면 가부장적 분위기 속에서 억압과 불만을 겪던 에스더의 아픔도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의 시작 부분, 교장은 교사들 앞의 강단에 서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모두가 동일한 ‘교복’을 입도록 교칙을 바꾸었음을 역설한다. 하지만 이는 본질적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피상적인 방안일 뿐이다. 또한 가까이의 누군가가 겪고 있을 불우한 상황을,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모두 동일한 옷’ 아래 가려 두는 방침이다. 이렇게 모순된 사회제도 속에서 클로드가 목소리를 낼 기회를 얻고,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문제적 예술 작품’이 기능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클로드의 작문이 가진 문제점을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으면서, 예술의 기능과 정당성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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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또는 이야기의 대상


 

제르망은 클로드에게 말한다.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쓰라고. 그렇다. 글을 쓸 때 우선시되는 것은 등장인물로 다루어지는 대상이 아니라, 그들을 보고 글을 쓰는 창작자의 마음이다. 영화에서 라파 가족의 이야기는 클로드의 시선에서, 그의 해설이 덧입혀지며 진행된다. 클로드에 의해 묘하게 사실과 재해석의 경계에서 제시되는 듯하던 라파 가족의 이야기는, 중간 부분에서 새로운 갈등 양상을 보인다. 클로드가 점점 라파 가정에서 ‘아들’의 위치를 차지하는 듯하자, 라파가 질투 어린 시선으로 클로드를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라파 가정의 이야기가 더 이상 라파의 이야기가 아니라 클로드의 이야기가 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클로드의 글이 제르망의 지도를 받으며 변해가는 과정이다. 라파와 부모님의 욕망과 갈등, 라파의 성 지향성까지도 이야기의 개연성과 흥미를 위해 자의적으로 편집된다. 그리고 클로드 이야기를 보고 듣는 이에게, 그렇게 편집된 사실은 라파가 살아가는 진짜 사실을 대체할 것이다. 

 

누군가를 재현해 이야기를 만들고, 소비하는 과정에서는 확연한 권력구조가 작동한다. 창작자는 관찰과 상상, 편집을 통해 인물들을 마음껏 다루지만, 등장인물들은 반박할 기회도 없이 ‘대상화’된다. 실제 사람과 이야기의 대상은 다르다. 다른 사람의 집을 들여다보는 것에는 죄책감이 수반되지만, 이야기 대상의 집을 들여다보는 것에는 죄책감이 없다. 전자는 관음이지만 후자는 관람이다. 상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실제 사람을 보고 그의 사생활을 상상하는 건 반사회적 행동으로 여겨질 정도지만, 이야기의 대상을 보고 그의 삶의 감춰진 부분을 상상하는 건 창의력이다. 사람은 그 인생을 ‘재미와 흥미’로 평가할 수 없지만, 이야기의 대상은 작품성을 위해 그렇게 평가되어야만 한다. 그럼 누군가를 이야기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건 괜찮은 행위일까? 

 

흔히 ‘예술’이라는 이름이 주는 면죄부가 있고, 작품 속 인물들은 제4의 벽이라는 견고한 수단으로 관객과 거리를 두어 왔으므로 이 논제는 쉽게 감춰져 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품은 친구 사이 혹은 교사와 제자 사이같이, 심리적으로 가까운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논제가 관객의 피부에 닿게 만든다.

 

이야기의 탄생은 마치 소재가 되는 대상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느 정도는 사실인 것도 같다. 앞서 언급했듯, 이야기가 없었다면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을 삶도 많기 때문이다. 클로드가 쓰는 이야기 역시 최후에는 가정에서 남몰래 불행을 겪던 에스더를 ‘구하겠다’는 열망으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관객도, 클로드 자기 자신도 이야기의 기반이 ‘대상을 향한 선의’였다고 받아들이기 쉽다. 그 외에도 이야기를 쓰기 위한 모든 과정은 선의의 가면을 쓴다. 클로드가 라파의 머무르기 위해 라파의 수학 공부를 도와주는 것도, 제르망의 부당한 대우에 맞서도록 라파를 설득하는 것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실 이야기 그 자체, 또는 이야기에서 파생된 욕구를 위한 것이다. 클로드가 자신과 에스더 사이에 발생한 묘한 관계들을 ‘마술 같았다’고 이야기하며 함께 집을 벗어나자고 설득할 때, 에스더는 거절하며 이렇게 말한다.


 

클로드    그건 마술 같았죠.

에스더    마술은 현실이 아니잖니.

               (...)

에스더    네가 사랑하는 건 내가 아니야. 환상일 뿐이야. 네가 만들어낸 내 모습.

 

 

그렇게 탄생한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는 재미를 얻었을지라도 끝내 어떠한 현실도 구원하지는 못한다. 다만 상처와 파멸을 불러올 뿐이다. 클로드의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 시험지를 훔쳤던 제르망은 학교에서 해고당한다. 클로드는 에스더에게 보인 태도를 들켜 라파에게 폭행당한다. 교복이 문제를 감추는 수단이라면, 서사는 문제를 왜곡해서 드러내는 수단이다.

 

제르망과 클로드의 수업 장면은 예술의 윤리성을 이야기하는 쟝의 갤러리 상황과 연달아 제시되면서 더 심화된 생각을 유도한다. 쟝은 갤러리에 자극적인 상상과 왜곡이 아닌 자연의 ‘존재’ 그 자체를 나타내거나, 가상의 서사보다 매일 실제 겪고 있던 일상을 새롭게 돌아보도록 유도하는 현대미술 작품들을 들여다 놓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작품들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결국 쟝이 들여온 작품들은 한 점도 팔리지 않아 갤러리는 문을 닫는다. 그 의도와 방법이 선하다 해도 대중에게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작품이라면, 모두가 궁금해하는 문제적 작품보다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할 수 있을까. 또한 갤러리에 걸린, 성적인 풍선 인형에 독재자의 얼굴을 덧붙여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던지는 ‘예술적’ 작품과 ‘외설’처럼 취급되는 클로드의 작품은 어떤 점이 다른가. 영화는 해답을 내리기보다는 그 어딘가에서 관객이 스스로 고민하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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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은 순진할 수 없다


 

영화는 관객을 묘한 불쾌감으로 이끈다. 우선, 영화는 인물을 비추는 데 있어서 문과 창문의 이미지, 창문 너머로 인물을 바라보는 구도를 많이 사용한다. 이는 관객에게 관음에서 시작해서 공간으로 직접 침범하는 듯 발전되는 감각을 불러일으키며, 집이라는 사적인 공간을 비출 때면 더 극대화된다.

 

더 나아가, 작품은 라파 아버지의 샤워 장면, 라파 부모님의 성관계 장면 등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에스더 또는 쟝의 발과 다리를 성적인 함의를 담은 듯한 배경음악과 함께 아래에서 위로 훑어보는 구도로 비춰주며, 관객에게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는 거북함을 주기도 한다. 동시에 그 당시 발생하는 ‘보고 싶지 않다’는 감각은, 관객이 더 이상 ‘보지 않기’를 선택할 수도 있음에도 자신의 호기심과 선택에 따라 멈추지 않고 영화를 계속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본다’는 것이 단지 제4의 벽 너머의 수동적인 행위인 것만이 아니라, 얼마나 주체적인 동조이고 참여인지를 실감하게 하는 것이다. 

 

영화는 관객과 같은 모순을 가진 이를 아예 인물로서 제시한다. 클로드의 글이 비윤리적이라는 것을 맹렬히 지적하면서도 그의 이야기가 ‘궁금하기에’ 계속 읽어 내려가는 쟝이 바로 그 인물이다. 영화의 중반부로 접어들면서, 영화관 객석에 앉아있는 제르망과 쟝의 이미지가 직접적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소비 또는 향유하는 두 사람은 클로드의 이야기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작품은 영화를 보는 행위를 곧바로 타인의 삶을 대상화시켜 바라보는 태도와 연관짓는 것이다. 이어 빛이 뿜어져 나오는 영사기를 비춰주며, 관객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 역시 영화라는 사실을 일깨워줌과 함께. 관객은 인물의 이중성과 비윤리성을 알지만, 이에 대한 비판은 영화를 소비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즉각적으로 귀결되기에 주저한다. 그 고민과 불편함 속에 영화 속 문제의식은 관객의 일상 속으로 확장된다.

 

영화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단지 작품을 ‘보는 것’에서 시작한 제르망의 행동은 클로드의 글이 진행될수록 점점 더 과감해진다. 이는 제르망이 라파의 집 안으로 들어와 라파의 이야기가 나아갈 방향성에 대해 직접적인 지시를 내리는 비사실적 장면들로 표현된다. 사실적 표현의 흐름 속에 끼어든 비사실적 연출은 관객이 지금까지 보던 것이 라파 집안의 이야기가 사실을 대체한 대상화되고 편집된 이야기임을 문득 깨닫게 한다. 또한 집 안에 들어와 클로드와 에스더의 키스 장면을 보면서도 말로만 조언을 건넬 뿐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못하는 제르망의 태도 역시 영화에서 관객의 입지를 떠올리게 한다. 제르망의 행위에서 관람이라는 행위는 침입과 연관되며. 영화를 소비하는 것이 가만히 순진하게 자리에 앉아있는 것보다 훨씬 적극적인 폭력과 연관될 수 있다는 섬뜩함을 준다.

 

또 하나의 돋보이는 점은 공간의 활용이다. 연극이 공간 묘사를 삭제함으로써 관객의 상상력을 극대화했다면, 영화에서는 서로 일치하는 구체적 공간을 이용한다. 클로드는 라파 가족의 집을 들여다본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관객이 들여다보는 것도 제르망과 쟝의 ‘집’이다. ‘인 더 하우스’의 ‘하우스’는 이 두 사람의 집 모두를 의미한다. ‘멀리서 라파의 집을 바라볼 때 객석에 앉은 기분이었어요.’라 말하는 클로드처럼, 관객들도 제르망과 쟝의 집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라파 가족의 ‘대상화된 이야기’와는 별개라고 생각한 제르망과 쟝의 이야기가 또 다른 서사를 가진, 대상화된 예술의 층위에 있다는 것을 전달한다. 후반부 클로드가 제르망과 쟝의 집에 방문해, 그들의 삶을 이야기화하려 시도하는 데에서 분명해진다. 연극이 관객의 무의식적이고 적극적인 ‘해석으로의 참여’를 이끌며 통해 메시지를 전달했다면, 영화는 관객의 다소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관람 태도를 유지하되, 그 안에 가려졌던 폭력성을 깨닫게 한다.

 

영화의 결말까지를 다 보고 나면, 비로소 첫 장면의 의미가 눈에 들어온다. 영화의 타이틀이 띄워지기 전, 수많은 학생들의 출석부 사진이 동시다발적으로 화면에 펼쳐진다.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특정 위치의 사진들을 카메라가 점점 클로즈업함에 따라 몇몇 학생들의 얼굴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 장면이 마치 작품의 프롤로그처럼 등장하며, 영화 관람의 전제를 말하는 것 같다.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한 사람을 인물로서 클로즈업해 바라보는 것, 이것은 결코 당연하거나 필연적인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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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제르망과 클로드는 함께 한 아파트를 바라본다. 두 사람은 한 방에서 격한 대화를 나누는 두 여성의 모습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며 그들의 다툼을 서로 다르게 해석한다. ‘유산 상속에 대해 다투는 자매’ 또는 ‘레즈비언 커플’ 이라며. 그렇게 또다시 이야기는 시작된다.

 

멀리서 보던 아파트를 점점 가까이 클로즈업하자, 창문에 비치던 일상의 풍경 같던 모습들이 총격전과 싸움 등 자극적인 모습으로 바뀐다. 그것이 사람을 이야기의 대상으로 다루는 상상과 재현의 양상이다. 뒤이어 창문의 커튼이 닫히듯 화면의 양 옆에서 밀려오는 어둠은 관객이 보는 화면을 완전히 어둠속으로 밀어넣는다. 스크린도 그렇게 누군가의 삶을 대상화하여 바라보던 유리창이었을지 모른다. 이 작은 스크린이 닫히고 마주하게 되는 관객의 커다란 삶은 일종의 무력감을 주기도 한다. 가상의 세계를 보며 발생한 치열한 몰입과 비판의식은 거대한 현실 앞에서 대체 어디로 가는가.


극 중 쟝이 운영하던 갤러리의 이름은 ‘미노타우로스의 미로’이다. 미노타우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 반수를 뜻한다. 예술 역시 그렇다. 선행과 악행이, 거대함과 초라함이 한 데 섞인 집합체 같다. 그리고 이 존재가 사회 속으로 나와 잘 살아가도록 풀어나가는 과정은 미로와 같다.


고민 속에 영화는 끝나지만, 클로드는 이러한 마지막 대사를 남긴다.

 

‘다음 시간에 계속’

 

 

[박보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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