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일상에서 마주친 아연함

'존재들'에 대한 기록
글 입력 2024.01.23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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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이 질문에 단순히 ‘사진’을 떠올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상징’이라는 가치를 생각한 이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사람들 사이에서의 ‘평판’을 이르는 동의어로도 연상할 수 있겠다. 정확히 무슨 단어인가, 그 사전적 정의가 궁금해 찾아보았다. 새삼 ‘이미지’라는 것이 정말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기표임을 깨달았다.


‘이미지’를 번역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는 바로 ‘상’이다.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떠한 현상으로부터 얻은 감각과 생각을 투사한 ‘수용자만의’ 것이 바로 ‘이미지’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는 ‘이미지’라는 것을 소비한다. 오가지 않고도 소통할 수 있게 된 시점부터,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을 접할 수 있게 된 순간부터. ‘소비’할 수 있는 것의 종류가 늘어날수록 세상은 다채로워졌다. 당장 지금의 우리가 사용하는 인스타그램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가 보지 못한 곳을 알고, 만나본 적 없는 이를 알고, 해본 적 없는 놀이를 안다. 그리고 그 ‘앎’을 소비한다.


그러나 생각해 본 적 있는가. 그 속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존재들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빛나는 화면뿐인 상황에서, 정형화되지 않은 무한의 공간 속에서. 스쳐 가는 모든 것들과 우리는 대체 어떠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말이다. 우리는 ‘이미지’의 바닷속에서, 과연 주체를 가지고 헤엄치는 것인지, 그저 부유할 뿐인지. 관심을 가지고 시선의 날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그 여부조차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지 자본주의’ 사회 속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만들고자 하는, 유아연 작가님을 만나 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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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5.~2024.01.27. 유아연 개인전 'Outlet' 포스터

 


▶ 안녕하세요, 작가님. 인터뷰를 통해 처음 작가님을 접하게 되실 분들을 위해,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유아연입니다.

 

조각을 전공했습니다. 예고 시절부터 홍익대학교, 최근 졸업한 RCA(이하 Royal College of Art)까지 10년 정도 조각을 했고요. 현재는, 영국과 한국의 속도감을 맞춰서 작업하고 있어요.

 

저는 ‘신체’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조각’과 ‘퍼포먼스’라는 매체를 통해서 발화하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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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유아연'

 

 

▶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바빴죠! 작년 9월쯤에 RCA 졸업식이 있었고, 졸업식을 하고 나서 바로 귀국하고 개인전을 준비하게 되었네요.


이번 개인전에서 보여드린 작업들 중 ‘의상’에 해당하는 조각들은 영국에서 완성해서 한국으로 가져온 것들이었어요. 쉽핑한 작업들과 함께 이번 신작들을 급히 만드느라 정신없이 작년 한 해를 보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조금 더 여유롭게, 신년을 맞이하는 자세를 가지고 새로운 프로젝트들을 구상하고 있어요. 전시장에 찾아와 주시는 손님들도 편안하게 맞이하면서, 지금 제 작업이 어떤지, 어느 방향성을 가지고 흘러가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고민하는 중인 상태인 것 같아요.



▶ 이번 개인전에 대한 준비가 반년 정도 이루어졌던 거군요.


그쵸. 그런데 기획을 한 건 1년 반 전인 것 같아요.


2022년도 중후반쯤, 그러니까 1학년 때 논문을 썼어요. 그리고 그 논문이 가진 결론이 제대로 역할을 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론을 취할지에 대한 생각이 있어서, 그걸 토대로 개인전을 구상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논문을 완성한 후, 22년 후반부터 기획을 구체화했고, 그 과정이 23년에 마무리가 되었던 것 같아요. 



 

'Outlet'


 

▶ 논문의 결론을 토대로 전시의 구상과 기획이 이루어졌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래서인지 이번 전시가 담고 있는 주제가 명료해요. ‘플랫폼’에서의 ‘소비주의’, 그리고 ‘인체’에 대한 관심이 돋보인 작품들이 많았어요.


저는 이미지 자본주의 세대에서 우리가 ‘이미지화’되고 ‘타자화’되는 동시에 ‘소비하는 주체’가 되는 것에 대한 고민들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항상 양가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게 현대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보면 배반자의 위치에 놓여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착취당하는 자이기도 한 상태인 것 같아요.


이러한 상태가 전시장에서 조금 더 활성화가 된다고 생각이 드는데, 그 활성화된 상태를 어떻게 조명해내는지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숙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신체적 ‘동일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방법으로써 ‘퍼포먼스’를 전시의 주로 끌고 왔던 것 같고요.


‘이미지성’과 ‘신체’, 즉 우리가 어떻게 하나의 ‘이미지’로서 ‘흡착’되는지에 대한 고민이 ‘표피’에 대한 아이디어로 이어졌어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체의 ‘표피’와, ‘제2의 표피’가 되는 ‘의상’이 결합된 형태를 통해 ‘소비주의’에 대한 조형을 하기 위해서 ‘아울렛(Outlet)’이라는 컨셉을 가지고 오게 됐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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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let', '쇼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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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let', '피팅룸'

 

 

▶ 전시의 구성도 독특했어요.


전시를 보면 ‘쇼룸’ 파트와 ‘피팅룸’ 파트로 나뉘어져 있어요.

 

‘쇼룸’ 파트는 실제로 타인을 ‘소비’할 수밖에 없는 구조예요. 전시장에 들어오자마자 쇼룸에 진열된 ‘마네킹’을 보듯이 타인의 신체를 마주하게 되거든요. 앞면에서는 한 패널당 두 명의 신체가 뒤섞이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세 개의 군상을 볼 수 있는데요. 그 군상의 이미지를 목도하고 뒷면으로 넘어오게 되면, 그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동하는 노동자의 본체가 등장해요. 


예쁘고 깔끔하게 꾸며진, 빛나는 모니터의 이면. 본체 속에서 어지럽게 뒤섞여 작동하는 퓨즈들의 형태를 보게 되는 듯한 느낌을 연출하고자 했어요. 그래서 실제로 뒷면의 구조물들을 보시면 신체의 뼈대, 즉 구성물이 뒤엉킨 형태로 조형화가 되었고요. 바디수트를 입고 노동하는 신체와 뒷면의 구조물들이 뒤섞인 형태로 하나의 흡착된 이미지가 된다고 볼 수 있겠죠.


사실, 타인의 신체를 너무나 당연하게 ‘소비’하는 체제인 ‘쇼룸’의 퍼포먼스는 불편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보는 분들이, ‘직시’하라고 만든 신체를 ‘직시’하지 못하시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리고 저는, 타인을 소비하려고 했다는 그 사실에 대한 불편한 감정들이 드는 것 자체를 ‘강제적 관계성’이라고 생각했어요. 


‘피팅룸’같은 경우는 좀 더 프라이빗한 공간이 되어요. 보통 ‘쇼룸’에서 언캐니함을 경험하고 ‘피팅룸’으로 피신을 가는 분들이 많은데요. 피팅룸에 가서 해방감을 느끼시지만, 동시에 그곳에서 마주하는 ‘의상’들은 사실 타인의 신체를 캐스팅한 거거든요.

* 언캐니(Uncanny): ‘낯익은 불편함’을 이르는 심리학 용어


피신을 위해 넘어왔지만 오히려 ‘토큰화’된 신체들을 교환하는 장에 있게 돼요. 그래서 동시에 본인 또한 흡착될 수 있음을 직접 목도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소비함’과 동시에 ‘가시화’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전시 전반에서 좀 더 강하게 어필하고 싶었던 지점이 바로 그 ‘관계성’에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야외 조각에서부터 물꼬를 트고자 했어요. 딱 들어서면서부터 광고적 이미지가 엄청나게 많이 드러나잖아요. 전시 전반에 대한 컨셉을 강한 중력감으로 가지고 있기도 하고요. 전시장 입장과 동시에 당신은 소비될 것이며, 이렇게 전시를 볼 수밖에 없음을 강제하는 것이죠. 그래서 다른 전시장과는 다르게, 직렬적으로 방향성이 설정된 전시인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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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let' 야외 조각

 

 

▶ 관람객에게 소비자라는 역할이 ‘부여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그래서인지, 전시장임에도 전시장에 온 것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맞아요. 관객으로서 ‘소비자’라는 관계가 설정된 상태로 들어오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위치적 강제성’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죠. 그저 편안할 수 있는, 관객으로서의 ‘자율성’이 박탈당한 채로 전시장에 입장하게 되니까요.


전시를 구상하면서도, 다른 전시장과는 다른, 어쩐지 ‘팝업스토어’를 보는 것과 같지만 동시에 그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불편함’을 전시 전반에서 가져갈 수밖에 없다고 느꼈어요. 


일반 화이트 큐브에서 구현되지 않을 법한, 강한 ‘현실감’을 전시장에서 구현하고 있는 동시에, ‘현실’에서는 절대 가져가지 않을 법한 ‘강제적 관계성’, 과소비에 대한 ‘가시성’을 전시에 덧입혔기 때문에 더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서 발견한 듯한 이야기가 전시 전반에 묻어 있는데, 이와 같은 ‘매체’에 관심을 두고 계신다고 이해해도 좋을까요?


‘플랫폼’이나 ‘소셜 미디어’를 다루기는 하지만, ‘매체’라는 측면에서 관심을 두고 있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아요. 저는 그것을 ‘징후’적인, 어떠한 ‘상태’라고 생각해요. 


제가 관심을 둔 곳은 ‘사회 구조’예요. ‘플랫폼’이나 ‘SNS’는 사회 구조 속 하나의 ‘꼭지’로 바라보고 있어요. 그것이 때로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규정하는 것이 될 수 있잖아요. 우리가 어떠한 이미지나 소비 체제에 동조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창구’를 통해야만 하는 구조가 되었고요. 


미시적으로는 ‘소셜 미디어’가 될 수 있겠죠. 확장한다면 ‘공간’ 자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더 넓게 본다면 한 국가가 타 국가로, 그들의 컬처를 어떠한 방식으로 판매하고 있는지까지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소비 체제에 동조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도가 있다 보니까, 말씀해주신 것처럼 느끼게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 제가 이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 같고요.



인터뷰 준비 과정에서 작가님의 이전 작업들도 살펴 보았었는데요. 작가님의 견해를 듣고 나니, 이전부터 이어져 왔던 작가님의 작업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돼요.


사실, 저는 제가 하는 작업들이 다 다르다고 생각했는데요. 보신 분들이 작업이 이어지는 것 같다는 말씀들을 많이 해주시네요.ㅎㅎ (작가님이 가져오신 시선의 변화가 작업 안에서 확연히 드러나기에 만들어질 수 있는 관객들의, 일종의 관람평이 아닐까요?)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죠! 그래도 말씀을 드리자면, 소비 체제에 대한 생각의 확장이 이루어짐에 따라 작업의 주안점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이전 작업, 즉 초기 작업들 같은 경우에는 말씀하셨던 방향성들(플랫폼을 활용하는 등), 미시적인 측면에서의 구현도가 확연히 드러났던 것 같아요. 개인으로서, 한 사람의 발화자로서 퍼포먼스를 진행했던 것과도 닿아 있고요. 점점 더 군상화되고 익명화되는 지금, 개인이 ‘작동 체제’로서 이에 기꺼이 동조할 때, 그가 조형해내는 것이 매체일 수도 있겠죠. 그러한 미시적인 작용과 반동을 구현해내기 위해서 개인 하나의 발화자가 퍼포머로서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던 작업들이 초기에 있었던 것 같아요. 


‘퍼포먼스’라는 것의 당위성에 대한 고민을 더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때에 따라 한 명이 진행해야 하는 퍼포먼스, 군상을 표현하기 위한 퍼포먼스, 아니면 인간이 퍼포먼스에서 제외되거나 관객까지도 퍼포머로 참여하게 되는 역전의 순간들이 존재하니까요. 이러한 고민들을 통해 주제적인 측면을 확장해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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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ffies 〉 Series, 2023, MDF, stainless, polycarbonate panel, paint, bolts, nuts, human bodies, dimensions variable

 

 

▶ 그렇다면, 관객이 그들의 역할을 주지하고 본다고 할 때, 이번 전시의 ‘Stuffies’ 퍼포먼스의 주안점은 무엇일까요?

 

제가 다룬 것이 과연 ‘퍼포먼스’인가부터 이야기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사실, 관객분들 중에 그런 질문을 주신 분도 계셨거든요.


‘이것을 조각으로 봐야 하는지’

 

제가 하는 퍼포먼스가 사실은 수행성이나 해프닝의 요소가 엄청나게 많이 들어가는 퍼포먼스는 아니라고 생각이 돼요. 정지되어있는 시간이 훨씬 더 길고, 관객의 ‘외부자’적 관계성이나 ‘연극성’이 거의 부재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거의 ‘신체성’만이 드러난 작업이니까요. 그렇다 보니, 이것이 실제로 움직이는, 즉 ‘수행’을 하는 퍼포먼스인지, 아니면 진열되어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관객과 퍼포머 사이를 가로막는 제4의 벽이 구축된 상태의 ‘퍼포먼스’라기보다는, 미술관에 놓여진 조각을 보거나 팝업스토어에서 오브제를 만져보는 것처럼 관객과 관계 지어지는 작업으로서 이해되었으면 좋겠어요. 나와 같은 타인의 동등한 신체가 진열되어 있음에서 보이는 언캐니함과, 그로 인해 보이는 관계성을 중점적으로 조명하고자 했거든요.


정리하자면, 이 작업을, 어떠한 무대가 설정되어 있는 퍼포먼스라기보다는 진열되어 있는 상태로서의 ‘조각’으로 봐야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네요. ‘퍼포먼스’라는 것이 이번 작업에서는 그러한 형태로 작동했지만, 이후의 작업에서는 어떻게 다룰지 더 지켜봐야 하는 지점인 것 같고요.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관객 또한 퍼포먼스에 합류하는 거대한 무대를 건설하고 싶단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러한 일조로서, 앞서 말씀드렸듯이 관객에게 ‘역할이 부여되는 것’과 같은 현상들에 대한 ‘가시성’을 더 만들어 보는 방식으로 작업이 발전해 나갈 수도 있겠죠.


전반적인 무대를 더 견고히 구축해서 무대의 장을 역전하는 방식으로 작업이 일어난다면, 관객이 어느 순간 퍼포머의 역할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일상생활에서 지워져 있었던 주체성,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역할들이 전면부로 드러났을 때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번 작업을 통해서 더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번 ‘Outlet’에서 보여주신 ‘Stuffies’ 작업 또한, 익히 알고 있는 그 무대 위에서의 퍼포먼스가 아닌, 공간에 입장하면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는, 관객이 퍼포머가 된 ‘상황’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겠네요.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게, 관객과 작업의 관계를 드러냄으로써 ‘발화’하고 싶으셨던 측면이 있었는가에 대한 것 같아요.


우리 일상생활에서 지워져 있었던 주체성,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역할들이 전면부로 드러났을 때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번 작업을 통해서 더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종업원이라든지, 단순히 서비스를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역할’들이 많잖아요. 백화점에서 일하시는 분들이나, 주차를 안내하는 분들과 같은 분들이 실은 그들의 생활 속에서 어떤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모르는 상태인 거예요. ‘지워진’ 거죠. 그곳에서 그들에 대해 가지는 외부자들의 ‘니즈’로 인해서요.


‘주체자’가 ‘주체자’가 아니게 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버’가 된 상황으로 보이고, 그러한 지점이 사회 구조 속 ‘여성화’라는 특성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모두 다 원주민이지만 주변부로 밀려나 있고, 그 밀려난 상태, 즉 ‘여성화’된 상태를 어떻게 재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요. 


주변부로 밀려났다고 해서, 그들이 약자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러한 상황 속 그들의 포지셔닝, 수동적 발화자로서의 위치가 ‘밀려난 이들’을 발화할 수 없는 상태에 두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즉, ‘주변부로 밀려난 원주민들이지만 발화함’이라는 상태에 대한 고민을 전반적으로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한 부분들에 대한 조명을 위해 이번 전시에서 ‘노동하는 신체’와 같은 지점들을 더욱더 가시적으로 끌고 온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일반인들이 어떻게 지워져 왔으며 동시에 또 지우고 있었는지. 이게 ‘플랫폼’이라는 구조 상태에서도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결과라고 보기도 하고요. 


당연히 ‘지워져야만’ 하는 상황들이 있다고 저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들에 대한 불편함들을 관객들이 전시장에서 직면하는 상황을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 ‘가시적’이라는 말이 와닿아요. 플랫폼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우리가 실제로 볼 수 있는 건 ‘플랫폼’ 그 자체일 뿐, 그것을 활용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어떠한 사람들인지는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잖아요. 활용하는 주체가 소비자이건, 생산자이건요. 관객도, 전시장 안에서 ‘관람자’일 뿐, 그들의 일상 속에서 실제로 어떤 사람일진 모르는 거고요. 그러한 것들을 눈에 띄게, ‘가시적’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작업인 것 같습니다.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다수의 ‘익명성’이라는 지점에 집중하게 되기도 해요. ‘기꺼이 익명을 취하는 행위’라고도 볼 수 있겠죠. 실명을 거론함에도 그 실명 자체가 익명이 되어버리는 압도적 ‘다수’의 상태가요.


초반의 작업들에서 모자이크된 상태에서 개인으로 발화했다면 지금의 작업에 이르러서는 다수여서 익명이 되는 상태들에 대한 지점들을 조금 더 가시화하고, 이제는 수동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지점들에 대한 고찰을 작업으로써 풀어내고 싶어요.

 


"퍼포먼스를 할 때,

그것의 퍼포머가 가지는 힘이 중요하지 않은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지만 그것이 ‘증거물’로서 제대로 역할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 초반 작업들에 대해 안 여쭤볼 수가 없는데요. 실리콘 ‘아바타’를 활용하셨던 작업들('White Mirror', 2019-2020/'The Triptych', 2022)이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어요. 특히 그 비주얼이 충격적이었던 것 같아요.


방금 말씀드린, 개인으로 발화하는 ‘모자이크된 익명성’이 바로 그 아바타예요. 과장된 여성적 신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 내부의 성별을 알 수 없잖아요. (오, 여성이 아니군요?) 큰 가슴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움직이는 주체가 꼭 여성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죠. 가면 속에 내재되어 있는 시선의 주체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어요, 추측만이 가능할 뿐. 그 ‘아바타’ 자체가 성별을 바꾸기 위해서 작동하는 걸 수도 있고, ‘부재’에 대한 반동으로써 그러한 신체를 취한 걸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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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ite Mirror >, 2019, performance, silicone body suit, cctvs, monitors, fake walls, dimensions variable

 

 

다만, 아바타의 형태를 여성의 과장된 신체로 형성했던 것은, 유통되는, 즉 ‘관음 당하는’ 스트리머의 이미지가 ‘여성적 신체’와 친화적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거였어요. 특히 화이트 미러 작업은 관객에 대한 시선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작업이거든요.


처음의 관객들은 녹화된 스트리밍을 보는 위치에 있어요. 편안하게 관람을 하다가, 도네이션을 하는 등의 교류를 통해 스트리밍 화면 너머에 실제로 움직이는 자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거죠. 그러한 위치 변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충격’을 더 강하게 주었던 행위였던 것 같아요.



▶ ‘화이트 미러’의 후속으로 진행되었던 ‘화이트 미러: 프리퀄 버전’ 작업에서는 관객과 아바타의 관계가 사뭇 달랐던 것 같은데요. 작업을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마치 제 3자가 된듯한 인상을 받았어요.


프리퀄 버전 같은 경우에는, 관객이 스트리밍 영상을 마주하기 이전을 시점으로 둔 작업이에요. 말 그대로 ‘프리퀄 버전’이죠. 관객은 철저히 ‘카메라’의 시선인 채로, 스트리머의 행동에 관여할 수 없는 상태로 상황에 놓여 있는 거예요.


스트리머이기 이전의, 하나의 ‘객체’로서의 아바타가 자취방에 있는 모습을 녹화한 영상 같은 느낌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관객은 그 공간 안에 존재하는, 살아있는 ‘아바타’와 ‘닭’이 서로 구체적인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모습을 어떠한 개입 없이 바라봐야 해요. 그들은 춤을 춘다거나 하는 등의 육체적 움직임을 보이는데요. 그런 것들에 대한 거리낌 없는 진열이 이루어지는, 그리고 그 상황에 침투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관객의 위치가 설정되는 거죠. 말씀해주신, 제3자적인 위치에 대한 인상은 그런 지점에서 그렇게 보이지 않았나 싶어요.


 

White Mirror_Prequel Version.jpg
< White Mirror: Prequel Version >, 2020, performance, rooster, silicone body suit, cctvs, bean projector, wire mesh, cloth, dimensions variable

 

 

▶ 사실, 아바타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궁금했는데, 여쭤보지 않고 물음표인 채로 남겨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물론 다들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ㅎㅎ 그런데 그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제 작업 특성상, 퍼포먼스를 할 때 그것의 퍼포머가 가지는 힘이 중요하지 않은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지만 그것이 ‘증거물’로서 제대로 역할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주체가 가지는 ‘아우라’가 파괴된 형태로 남겨지는 ‘증거물’, 거기서 파생되는 언캐니함만 제 작업 안에 남아있게 되는 것 같아요.



“‘이미지 생산자’로서 우리가 이미지를 생산하는 방식에 대한

‘가시화’가 1차원적으로 고민되어야 하는 지점에 와 있다고 봐요.

그런 고민들을 담아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나갈 것 같습니다.”


 

▶ 작가님 작업만의 특징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첫 번째는 과시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광고적 이미지가 있고요. 두 번째로는 폭력적 몰입을 강요하는, 노동하는 신체라는 점이 있어요.


광고적 이미지는 ‘스펙터클’을 담당하고 있고, 노동하는 신체는 ‘스펙터클’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재현’하는 역할인 것 같아요. 이 두 가지가 사실은 모든 작업에서, 그 구현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철저히 반영되어 있고요.


이 두 가지의 키워드를 가지고 제 작업을 보시면, 제가 설계해 놓는 지점들을 더 꼼꼼하고 재미있게 가져가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 그 두 가지의 키워드가 가장 잘 보이는 작업을 꼽아보신다면요?


'The triptych'같은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네요. 아예 전면이 광고 패널을 취하고 있으니까요. 광고적 이미지의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작업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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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Triptych >, 2022, photograph, lightboxes, 170x340x10(cm)

 

 

‘노동하는 신체’ 같은 경우엔, 앞서 말씀드린 'White Mirror'에서 많이 보여요. 스트리밍되는 영상의 표면이 광고적 이미지라면, 그 벽 너머에 노동하는 신체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어요. ‘스펙터클이 벌어지는 상황을 재현’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White Mirror (3).jpg
< White Mirror >, 2019, performance, silicone body suit, cctvs, monitors, fake walls, dimensions variable

 

 

▶ 다음에 다루실 주제가 중요한 시점에 와 계신 것 같아요.


맞아요. 다음에 다룰 주제들은 여러 가지 관례들에 대한 고민과 관련이 있는데요.

 

저는 아까도 말씀드렸던 ‘소비주의’에 관련된 지점에서, ‘한국 K컬처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와 ‘우리가 소비되고 있는 체제는 그와 얼마나 닮았는지’에 대한 고민들이 계속 있어요. 이건 제가 방금 막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그거에 대한 가시성이 조금 더 뚜렷해서 그런 거일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공간에 대한 고민들도 같이 하고 있거든요. 우리가 소비를 하고 있는 소비공간들, 이번 전시도 전반적으로 그런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팝업스토어’들에 대한 것인데요. ‘팝업스토어’는 비정형적이고, 일시적이잖아요. 


현대인과 공간의 성격이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은, 비어 있는 공간 자체를 보면, 그것이 가진 표피가 계속해서 바뀌는 거잖아요. 시즌별로 바뀌는 컨셉과 양상들로 인해, 공간이 착취당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는 거죠. 그 착취 당하는 ‘중간자’적인 형태가 지금의 현대인들이 가진 양상과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그러한 지점에서 공간에 대한 축소 과정을 진행해 보려고 해요. 우리가 공간을 작은 형태로 마주하게 된다면, 그 또한 우리와 같은 활성화된 주체로서 작동하고 있음을 재고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보고 싶어요.


아직 확정된 사항이 아니라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2024년도에는 말씀드린 지점들에 대한 고민을 구현한 작업을 다양한 공간에서 만나보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작업적 행보로는, 앞에서 말씀드렸던 지점들을 조금 더 꼼꼼하게 살펴보는 방향과 함께, ‘문화 충돌’에 대한 리서치를 하고 있어요. 아시아성과 한국성에 대한 이미지가 어떻게 구축되었고 우리는 어떤 사회를 살고 있는지에 대한 거시적인 연구를 개인적인 측면에서 지속하고 싶어요.


우리가 살고 있는 소비 사회가, 단순히 우리 스스로 자립한다고 말하기보단, 공동체, 즉 도시나 국가의 성격과 닮아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요. 그 정책들과도 닮았고요. 지금 우리가 만들어나가고 있는 ‘이미지’의 시장이, 이러한 부분과 닿아 있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래서, ‘이미지 생산자’로서 우리가 이미지를 생산하는 방식에 대한 ‘가시화’가 1차원적으로 고민되어야 하는 지점에 와 있다고 봐요. 그런 고민들을 담아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나갈 것 같습니다.


*

 

총, 부엉이, 기차.


작가님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여쭈었을 때 말씀해주신 것들이다. 이렇게 늘어만 놓았을 땐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것들이 ‘시야’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총의 강력한 위력을 적확히 활용하려면, 피사체를 직시해야 한다.

부엉이는 어둑한 밤, 숨겨진 것들을 본다.

기차는, 비행기보다 느긋하고 선박보다 주변과 친화적이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형태의 ‘관찰’은,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궁극적으로 무언가를 위한 ‘방어’를 목적으로 할 때 그것의 진정한 의도를 찾을 수 있다. 방어 뒤에 숨은 것이 자신이든, 약자이든, 밀려난 의견이든, 숨겨진 가치이든 말이다.


그저 보고만 앉아있기보다, 세심히 관찰한 것의 증거물을 남기는 행위. 언젠가부터 가치를 잃어버려야만 했던 것들의 잊힘을 방어하는 족적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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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유아연 작가

(촬영=조준용 작가) 뮤지엄헤드 ‘Outlet’ 전시 전경

(촬영=김해영 작가) 'The triptych' 작품 사진

 

 

[유서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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