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삼천원 김밥 한 줄 [사람]

혜자로운 한끼가 주는 생각 한 줄
글 입력 2023.12.02 17:48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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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사장이 나를 알아본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면서도 머쓱하다.

 

누군가 나를 기억한다는 사실이 싫다기보다는 나를 기억할 정도로 이곳에 자주 왔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부끄럽다. 더 솔직히 말하면 이전에는 편의점 김밥에 관심도 없었는데 지금은 수시로 찾아 먹고 있다는 생각에 괜히 작아진다. 김혜자님을 가족보다도 자주 본다. 어느새 정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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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점 먹고 출근하여 밤늦게 귀가하면 녹초가 된다. 일할 때는 몰입하여 아무 느낌이 없지만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현실로 돌아온다. 멍한 상태로 편의점 구석에 앉아 김밥이 데워지길 기다린다.

 

음식점에 가도 되지만 가성비가 좋은 편의점 김밥에 맛 들인다. 간혹 『가녀장의 시대』 복희님을 따라 쌀을 씻기도 하지만 주중에는 정말이지 차려먹을 힘이 없다. 가끔 한숨이 나온다. 세르주 블로크의 빨간 실처럼 길고 짙게.

 

푹 자고 리셋하여 출근한다. 다시 우리 중학생 친구들을 만난다. 단어 시험 점수를 공개하며 어깨가 처지거나 높아진다. 여기서 멈추면 다행인데 서로 비교하거나 무안을 주거나 비꼬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Stop and listen. 60점 받으면 그 사람은 60점짜리 사람이니? 100점이면 100점짜리일까? 점수는 너 자신이 아니야, 너의 한 ‘부분’이야. That’s why we call it YOUR test score. 낮다면 일어설 힘을 기르고, 높다면 넘어질 것을 조심해. 지나친 칭찬도 비난도 패스한다. 이제 숙제 검사하자.”

 

미래 능력을 나타내는 will be able to로 써온 문장을 검사하던 중에 유난히 자신의 책을 가리는 학생이 있다. “May I?” 살짝 물어보니 슬쩍 보여준다.

 

I will become an adult. I will be able to die.

 

고마웠다. 툭하면 내게 가시 돋친 말을 뱉고 나와 힘겨루기 하는 친구가 숙제에 속마음을 쓴 것 같았다. “팩트를 적었구나. 그치, 어른이 될 거고 후에 죽을 능력이 있을 수 있지. 굳이 두 문장으로 나누지 말고 접속사로 합쳐봐.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인다. “오래 살아. 네가 없으면 세상이 슬퍼해.”

 

동그래진 눈이 귀엽다.

 

엘에이 거리를 활보하던, 뉴욕으로 출장 가던, 칸쿤으로 휴가 가던 때를 떠올리며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할 때도 있지만, 학생들을 만나면 하늘이 왜 나를 이곳에 보냈는지 알 것 같다. 언제까지 티칭을 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당장 내일 일도 모르니. 그러나 맡겨진 날까지 너희를 보고 듣고 돕고 싶다.

 

밤 10시, 20초 돌리고 혜자로운 김밥을 먹는다. 편의점 안에는 캐럴송이 울린다. 옆에서는 열심히 라면을 먹고, 밖에서는 발동동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국물에 얼굴이 빨개진 대학생도, 추위에 얼굴이 벌게진 직장인도, 입가에 묻은 김을 닦는 나도 뭔가 웃프다.

 

<이상한 나라의 괴짜들>전시에서 읽었던 김잔디 작가의 말이 생각난다. “평범하면서도 미치도록 위대한 매일을 온전히 살아내는..” 사람들.

 

문을 나서며 피식 웃음이 난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위대하게 살고 있다. 

 

 

 

김윤 에디터 명함.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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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에델바이스
    • 잘 모르지만.. 에디터님은 어떤 일을 하든 에디터님의 한마디 한마디로 누군가를 살리실 것 같네요.
      지친몸으로 김밥을 데워먹는 에디터님 앞에 조용히 앉아 저도 같이 컵라면 먹고 싶습니다!!
    • 0 0
    • 댓글 닫기댓글 (1)
  •  
  • yoan
    • 2023.12.23 23:59:57
    • |
    • 신고
    • 에델바이스에델바이스님의 한마디는 저를 살리네요. 같이 식사하는 상상만으로 벌써 즐겁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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