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죽음에 임박하는 경험 ① [도서/문학]

성동혁의 『6』과 김혜순의 『죽음의 자서전』 속 시세계
글 입력 2023.11.2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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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죽음은 우리의 삶에 밀접하게 관련된 주제이자, 모든 인간이 필연적으로 경험해야만 하는 숙명이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뉴스 등의 매체를 통해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고, 책이나 학위 논문 등 다수의 텍스트는 타자의 죽음을 심도 있게 분석한 내용을 기반으로 서술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관해서는 열심히 논하면서도 정작 우리 자신이 언젠간 죽는다는 사실을 자주 망각하곤 한다. 이러한 ‘죽음과의 거리두기’를 O.F. 볼노오에 입각해 설명하면, 우리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기를 회피한다고 유추할 수 있다. 결국 타자화된 죽음만을 분석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저해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이러한 논의의 한계는 타인의 죽음을 관찰함으로써 죽음을 경험하는 것과, 자신이 직접 죽음에 근접하는 경험을 하여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상이하다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경험적 한계로 인하여 대다수의 텍스트는 자신의 존재가 상실되는 경험을 다루기보다 타자의 죽음을 조명하며, 이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떨쳐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편 문학작품은 읽는 이로 하여금 작가의 이야기를 독자 자신의 이야기처럼 체화시킬 수 있는 힘을 지녔다. 그렇기에 죽음을 경험했던 작가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은 독자가 책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죽음을 간접적으로 체험해보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물론 책을 읽는 행위도 타자의 죽음을 관찰하는 것에 불가하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 텍스트에서는 제3자의 입장으로 죽음을 전달받는 한편, 이러한 문학작품에서는 1인칭의 서술 시점을 통해 죽음에 대한 경험을 전달받기에 독자가 작가의 경험과 더 큰 연결성을 느낄 수 있다는 의의가 존재한다.

 

이러한 이유로 몸소 죽음을 체험했던 시인들의 시세계를 논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사회의 재인식에 의미 있는 논점을 제공할 수 있다. 자신이 죽음에의 존재임을 선취한 선존재는, 자신의 일상적 존재에서 벗어나 자신이 빚지고 있는 또 다른 존재와 만나게 된다. 단지 관찰자의 입장에서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죽음에 임박했던 경험을 나누는 텍스트는, 공동체가 죽음의 주체로서 죽음을 바라보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이는 결국 죽음에 대한 오해나 막연한 불안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해당 연재물에서는 죽음에 임박하는 경험이 각 시인의 시세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비평하고자 한다. 더불어 두 시집이 독자인 우리에게 전달하는 죽음에 대한 교훈을 찾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였다.

 

 

 

시인과 죽음


  

성동혁 시인은 대수술을 5번에 걸쳐 수행한 후 6번째 몸으로 시집 「6」을 썼다. 그는 소아 난치병으로 인해 오랜 시간 투병 생활을 겪어왔고, 그 과정에서 느꼈던 자신의 감정들을 시에 풀어냈다.

 

「죽음의 자서전」의 저자 김혜순 시인은 삼차신경통으로 인해 전철역의 승강장에서 쓰러지는 경험을 했다. 당시 그녀는 ‘죽음이 정면에, 뒤통수에, 머릿속에 있었다’고 표현하며 ‘죽음의 세계를 떠도는 몸이 느껴졌다’고 할 정도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이들은 둘 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죽음에 임박하는 경험을 겪은 뒤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상이한 양상을 보인다. 아래의 비평을 통해 이를 구체화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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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편부터 차례대로 성동혁의 『6』, 김혜순의 『죽음의 자서전』

 

 

 

Ⅰ 삶과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죽음을 직면한 두 시인은 죽음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히기보다, 역설적으로 삶을 되새긴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그 과정에서 삶이 지니는 부정적인 면모를 재인식하며 삶에 회의를 느끼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때 각 시인은 삶이 고통스러운 원인을 서로 다른 요인에서 발견한다. 성동혁 시인이 삶의 고통을 느끼는 지점은 사회적 약자와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삶이 모두에게 공평한 여건을 제공하지는 않으며, 그러한 불평등이 고통을 불러온다는 정서가 그의 시세계에 드러난다. 이는 「동물원」에서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지구가 반으로 잘린다면 내가 너희와 같은 곳에 서 있을 거야

 

피리를 불던 날

바구니를 든 소녀들은 사라졌다

 

바구니 안 포도송이와 함께 출렁이며

신맛을 내는 그림자와 함께

마구간 뒤로 흩어졌다

 

땅을 핥으며 파열음을 잃은 건 초식의 가축들뿐이라 추측했다

 

계곡의 온통

고개를 못 드는 물이끼처럼

폭포 밑에서 고개를 박고

등을 물 밖으로 꺼낸

무지개

 

너무 많은 약속을 어긴 후

높은 곳으로 올라간 자들에겐

모음만 들려왔다

 

반대쪽 지구에서 소녀들에게 자음을 던져도

메아리엔 모음만 날아들었다

 

가축의 가면을 쓰고 방주를 넘으려는 소녀들은

울타리 안으로 떨어졌다

 

주일을 거두어들일수록 사육사들은 말이 줄어들었다

구원이 지연되는 것들은 소녀들뿐인걸

칠 일 후

사십 주야 동안 비가 반대편 지구에서 내린다

방주 위에 올라 소녀들의 정수리를 본다

 

- 성동혁, 「동물원」

 


시인은 성경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 사례를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재해석한다. 시인이 설정한 시의 제목은 ‘동물원’이다. 울타리 너머에서 자신과는 다른 존재들을 구경하는 장소가 바로 동물원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동물은 가축이 아니라, 가축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는 소녀들을 상징한다.

 

기존의 성경에서는 노아의 방주에 탑승해서 생존할 수 있었던 존재들에 초점을 맞추지만, 시인은 그 방주도 모든 인원을 수용할 수 없다는 한계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남겨진 자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력을 발휘한다. 이렇게 남겨진 자들에 속한 소녀들은 방주에 탑승하기 위해 가축의 가면을 쓰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타자의 무관심, 그리고 자음들이었다.

 

시에서는 자음과 모음의 대립 구도에 초점을 둔다. 자음은 공기의 흐름이 막혀 나는 소리로, 모음에 비해 거센 소리를 유발한다. 그렇기에 자음, 그 중에서도 시에 언급된 파열음은 욕설이나 어감이 강한 어휘에 자주 활용된다. 배에 탑승하고 싶지만 이것이 공동체 내에서 허락되지 못한 소녀들은 사람들로부터 자음, 다시 말해서 욕설만을 듣게 된다. 그러나 높은 곳으로 올라간 자들, 다시 말해서 소녀들의 형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권력자들은 소녀들이 자음을 듣던지 말던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듣고 싶은 대로 메시지를 왜곡해서 전달받는다. 그렇기에 이들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 난무하는 사회 분위기를 무시하기만 한다.

 

타자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는 성동혁의 시세계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그의 시세계에서 폭력의 가해자는 약자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무관심하거나 또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 채 웃는 모습을 보인다.


 

나는 그런 친구가 많다

던진 칼을 온몸으로 받는

(중략)

친구는 하얗게 칼을 받았다

곡예를 하지도 멍청하게 웃지도 않았다

서 있었다

사람들끼리 박수를 치고 사람들끼리 웃었다

우리만 심각한 표정으로 죽어 갔다

 

나는 그런 친구가 많다

나는 그런 친구가 된다

 

- 성동혁, 「서커스」 (부분 인용)

 


서커스 속의 친구는 다른 사람들이 던진 칼을 거부하지 못하고 온몸으로 받아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직면한 상황에 고통을 느껴 생명력을 잃어간다. 그러나 칼을 던진 자들, 그리고 칼을 맞는 친구를 보는 방관자들은 그의 고통에 웃음을 터뜨린다.

 

이는 약자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다. 폭력의 가해자와 방관자인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의 소통에 집중한다. 그들은 자신들끼리 박수를 치고 자신들끼리 웃는 행위에 이미 초점을 맞춘 상태이기 때문에, 친구의 심각한 표정을 자세히 관찰할 그 어떤 노력도 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양상의 무관심이 「동물원」에서는 상하 계층이 분류된 사회로 나타난다. 이때 상층의 사람들은 하층의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그들의 영역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리에 ‘올라와서 머물러있는’ 상태로 상황을 전달받기에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구원에서 소외된 소녀들은 사십 주야의 비를 가축 울타리 안에서 맞게 된다. 배에 타지 못한 약자가 발생한 원인은 사회에 불평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동혁 시인은 이러한 사회의 불평등을 다른 시들에서도 묘사하는데, 이때 그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결정된 불평등에 주안점을 둔다.


 

폐광을 떠돌던 소녀

그렇게 태어난 건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죗값을 치르고 있다

 

- 성동혁, 「기억하는 악몽」 (부분 인용)

 


시인이 집중하는 불평등의 양상이 「기억하는 악몽」에서 ‘그렇게 태어난 건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다’라는 구절을 통해 확인된다. 그리고 해당 구절은 소아 난치병을 앓는 시인 본인과도 연결성을 지닌다. 병에 걸리는 여부는 개인의 의지로 조종할 수 있는 영역 밖의 행위이며, 이렇게 건강과 관련된 측면에서 시인은 사회적인 약자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지 밖의 원인에서 비롯되는 불평등으로 인해 시인은 사회에서 단절되었다는 느낌을 표현한다. 시인은 시 「유기」에서 이를 “나는 그곳에서 버려진 후 이곳을 고향이라 소개한다”라고 묘사한다. 그리고 시인은 이렇게 약자가 된 사람들이 사회로부터 도망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아래의 시 「바람 종이를 찢는 너의 자세」에서는 여린 눈이 태풍의 눈이 되듯이 화자의 내면에서 심리적으로 동요가 일어나는 상황이 서술된다. 그 속에서 화자는 자기 자신을 마주하기가 두렵다는 생각에 거울을 보지 못하고 어둠의 공간인 창고에 들어간다. 이후 그는 창고에 들어가야 하는 거짓 핑계를 만들어 창고라는 도피처에서 머물기를 희망한다.


 

여린 눈들이 태풍의 눈이 되어 갈 땐 거울 대신 창고에 들어가 먼지를 가라앉힌 적막을 마주봐야 했다

 

함부로 나부끼며 울어서도 안 됐다 창고를 두들기는 사람들에게 찾을 것이 있다고 말하고 창고 밖에서 잃어버린 것을 찾는 척해야 했다

 

- 성동혁, 「바람 종이를 찢는 너의 자세」 (부분 인용)

 


그럼에도 성동혁 시인은 약자들이 삶에 대한 의지를 다져야 한다는 생각을 밝힌다. 삶으로부터 고통을 받아 모든 것을 회피하고 싶어지더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삶을 영위하고자 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시세계에 표출된다. 「식빵」이 이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이다.


 

블라인드를 올리고 십자가에 걸린 토끼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이 병이 사라진다면 깡충깡충 회개의 어조도 귀여운 의성어 정도로 해결된다면 나는 오랫동안 일곱 살일 수 있어요

 

- 성동혁, 「식빵」 (부분 인용)

 


김혜순 시인 또한 성동혁 시인과 마찬가지로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부조리의 양상에 집중한다. 그러나 그녀는 삶의 부조리를 약자에게만 국한시키기보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조우한 일반적인 사람들도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 초점을 둔다. 이는 아래의 시 「출근」에서도 묘사된다.

 

 

지하철 타고 가다가 너의 눈이 한 번 희번득하더니 그게 영원이다.

 

희번득의 영원한 확장.

 

네가 문밖으로 튕겨져 나왔나 보다. 네가 죽나 보다.

 

너는 죽으면서도 생각한다. 너는 죽으면서도 듣는다.

 

아이구 이 여자가 왜 이래? 지나간다. 사람들.

너는 쓰러진 쓰레기다. 쓰레기는 못 본 척하는 것.

 

지하철이 떠나자 늙은 남자가 다가온다.

남자가 너의 바지 속에 까만 손톱을 쓰윽 집어넣는다.

 

잠시 후 가방을 벗겨 간다.

중학생 둘이 다가온다. 주머니를 뒤진다.

발길질.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소년들의 휴대폰 안에 들어간 네 영정사진.

 

너는 죽은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네 앞에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본다.

바깥으로 향하던 네 눈빛이 네 안의 광활을 향해 떠난다.

 

죽음은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쳐들어가는 것. 안의 우주가 더 넓다.

깊다. 잠시 후 너는 안에서 떠오른다.

 

그녀가 저기 누워 있다. 버려진 바지 같다.

네 왼발을 끼우면 네 오른발이 저 멀리 달아나는 바지, 재봉질도 없는 옷,

지퍼도 없는 옷이 뒹굴고 있다. 출근길 지하도 구석에.

 

가련하다. 한때 저 여자를 뼈가 골수를 껴안듯 껴안았었는데

브래지어가 젖가슴을 껴안듯 껴안았었는데.

 

저 오가는 검은 머리털들이 꽉 껴안은 것. 단 한 벌.

 

저 여자의 몸에서 공룡이 한 마리 나오려 한다.

저 여자가 눈을 번쩍 뜬다. 그러나 이제 출구는 없다.

 

저 여자는 죽었다. 저녁의 태양처럼 꺼졌다.

이제 저 여자의 숟가락을 버려도 된다.

이제 저 여자의 그림자를 접어도 된다.

이제 저 여자의 신발을 벗겨도 된다.

 

너는 너로부터 달아난다. 그림자와 멀어진 새처럼.

너는 이제 저 여자와 살아가는 불행을 견디지 않기로 한다.

 

너는 이제 저 여자를 향한 노스탤지어 따위는 없어라고 외쳐본다.

 

그래도 너는 저 여자의 생시의 눈빛을 희번득 한 번 해보다가

네 직장으로 향하던 길을 간다. 몸 없이 간다.

 

지각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살지 않을 생을 향해 간다.

 

- 김혜순, 「출근」

 


시의 화자는 일상적으로 직장에 출퇴근한다는 점에서 신체적 활동이 자유로우며 사회경제적 능력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그녀는 사회적 약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화자는 어느 출근길에 죽음을 맞이하면서부터 여태껏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한 사회의 부조리한 면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부조리의 기반에는 역시 무관심이 내재되어 있다. 사람이 쓰러졌음에도 방관자들이 화자를 못 본 척 지나치거나, 혹은 그녀를 범죄에 활용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에서 이러한 무관심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방관자들은 왜 죽은 화자에게 무관심했던 것일까? 그것은 사회가 산 자와 죽은 자를 분리된 실체로서 인식하기 때문이다. 시에 등장하는 남자와 중학생들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과 같을 수 없다고 인식한다. 그렇기에 이들은 그녀의 신체를 훼손하더라도 그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며, 오히려 ‘어차피 죽은 사람이니 괜찮다’는 식의 행동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비판하기라도 하듯, 김혜순 시인은 이후 등장하는 시들에서 죽음과 삶이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지를 강조한다. 그녀는 삶과 죽음을 분리해서 보는 것을 거부하며, 그렇기에 죽은 자에게도 예우를 지킬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탄생이란 항상 추락이고

죽음이란 항상 비상이라 하니

절벽에서 몸을 날려본다

 

- 김혜순, 「나비」 (부분 인용)


 

일평생 지하에 가뒀던

의붓딸 침묵이 너를 당긴다.

일평생 너의 가랑이 깊숙이 감췄던 침묵이

숨이 끊기자 비로소 보이는 어떤 세상이

바닥으로 너를 끌어당기며 땅속으로 와보라며 지하수처럼 경련한다.

진동하며 파고든다.

 

- 김혜순, 「딸꾹질」 (부분 인용)

 


위의 시들에서 볼 수 있듯이 김혜순 시인은 ‘죽음이란 항상 비상’이라고 이야기해 삶과 죽음의 경계가 불분명함을 강조하며, 죽음이 우리의 몸 속에 ‘깊숙이 감춰’져있어서 보이지 않을 뿐 항상 우리의 곁에 머문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렇게 인간과 밀접하게 존재하는 죽음을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다. 「출근」에서 시인은 죽음의 긍정적인 면을 두 가지 서술한다. 첫째, 죽음은 더 넓은 세계로 가는 것이다. 시인의 서술에 따르면 우리는 삶을 살아갈 때 외부 상황의 개입으로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지만, 죽음을 맞이할 때 비로소 자신의 안을 보게 된다. 둘째, 삶에서의 불행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시에서 묘사되는 삶이란 견뎌야 할 불행에 불과하다. 김혜순의 시세계에서는 이와 유사하게 삶에 대한 본질적인 회의감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데, 일례로 「달력」에서 달력을 거는 행위를 ‘토끼 귀처럼 냄새나는 울음을 벽에 걸었다’고 묘사하는 것이 그 사례이다.

 

이러한 점에서 김혜순 시인의 시세계는 성동혁 시인과는 다르게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김혜순 시인의 시세계가 죽음을 갈망한다고 해석하는 것 또한 무리가 있다. 시적 화자는 죽음의 문턱에서, 영혼만으로라도 직장으로 향하던 길을 가보며 삶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보이기 때문이다.

 

 

- 다음 편에 계속

 

 

[고은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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