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문화예술의 파편이 떨어진다

문화예술은 나의 삶과 궤를 같이 했다.
글 입력 2023.10.22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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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나의 삶은 문화예술과 궤를 같이했다.

 

꼬마 펭귄 핑구는 비언어적 소통에 적응시키면서 눈치라는 걸 길러주었고 딩동댕 유치원은 원시적 존재이던 나를 인간으로 변모하는 데 일조하였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984년 등은 사회 문제를 처음으로 마주하게 한 창문이었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할 때 매일 반복해서 듣던 노래는 삶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목발이었고 소설은 세상을 피해 도망칠 수 있는 도피처였다. 둑이 터질 듯 가슴이 답답하던 때 시를 읽으며 이유 없이 울었던 순간, 모든 걸 비뚜름하게 보던 어린 나는 세상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다.

 

부모님 손을 잡고 보러 간 공연은 끝났는데도 아직 극장에 앉아있는 듯 깊은 여운을 주었다. 꼭 존재하던 하나의 세계가 사라진 것 같아 공허했다.

 

문화예술이 없었다면 나는 옳고 그름을 이해하는데 조금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꼭 나의 통증처럼 아프게 느끼진 못했을 거다. 애초에 살아있기는 했을지도 의문이다. 살아있어도 세상을 여전히 비뚜름하게 보고 있을 확률이 농후하다. 이성과 감성의 시작점인 문화예술은 나를 지탱하는 지지대 역할을 했다. 선악을 구분하는 지표였고 옳은 걸 옳다고 말할 용기의 근원이 되었다.

 

그렇지만 문화예술은 나의 삶 그 자체라고 표현하는 건 너무 광범위하다. 삶과 궤도를 같이 하였지만 삶 자체는 아니었다.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행성이 모두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듯이. 문화예술은 차라리 삶이라는 자갈돌 사이에 세세하게 스며든 모래알에 가깝다.


신형철의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문학은 본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본래 난쟁이였고, 더 작게는 ‘짱돌’이었으며, 더욱더 작게는 바이러스일지도 모른다. 가장 ‘협소한’ 영역 안에서 가장 ‘깊게’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 문학이라 하면 어떨까.

 

“문학의 지위가 높아지는 것과 문학이 도덕적 과제를 짊어지는 것은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 과제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다면, 문학은 그저 오락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시 층위에서 문학이 윤리와 무관했던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그것이 진정한 문학이라면 “지푸라기 하나에서도 큰 싸움을 찾아내는” (햄릿 4막 4장) 일을 늘 해왔다. 문학은 본래 그런 것이 아닌가. 정치를 보족하는 윤리가 아니라 정치를 창안하는 윤리를 말해야 한다.

 


문장을 읽을 때마다 전율을 느낀다. 머릿속에만 맴돌고 말로 설명하지 못했던, 설명은 못 해도 몸 어딘가에 자리 잡고 기다리던 무언가를 끄집어낸 것 같았다. 내게 문학, 문화예술은 그런 것이다. 가장 협소한 영역에 가장 깊게 침투해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것. 늘 도덕적인 질문을 던지면서도 설교가 되지는 않는 것.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뒤틀어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것.

 

사우디아라비아를 배경으로 한 “와즈다”라는 영화가 있다. 여성은 남자 후견인의 허락이 없이 취직 등 법적 활동을 할 수 없고 치료를 받을 수도 없는 ‘마흐람’ 제도 아래 심지어 여성 혼자 자전거를 타는 것도 불법이다. 와즈다는 그런 법에도 불구하고 돈을 모으며 자전거를 사기 위해 노력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타고 싶기 때문이다. 덤덤하게 흘러가는 영화를 보고 있자면 고작 자전거 하나 타는 게 이렇게 어려운 현실을 곱씹게 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여성 인권을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는 개봉 후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여성도 공공장소에서 자전거를 탈 수 있도록 율법을 수정한 것이다. 2018년 6월부터는 마흐람 없이 여성 혼자 운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엔딩 장면 후 영화가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말하는 몇 줄의 글에 소름이 돋았다. 제대로 된 내용이 흐릿해질 정도로 시간이 지나도 영화 제목과 영화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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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문화예술의 의의다. 영화, 드라마, 음악, 소설, 공연, 그림 등 모든 문화예술은 주제를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지녔다. 그러므로 예민할 수 있는 화제를 거부감 없이 던질 수 있고 세상을 바꿀 불씨가 되기도 한다.


몇 년 전 미투 운동이 화제가 되었다. 권력과 시선 때문에 쉬쉬하던 성추행 및 성희롱 사건을 고발하고 독려하는 움직임이었다. 그 시기 성 추문이 제기되었던 고은 시인이 2023년 다시 화제가 되었다. 고은 시인이 신간으로 비판 여론이 들끓자 시집을 공급한 출판사에서 설문조사를 하였다. 설문조사는 조사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것이었다.

 

“추문에 휩싸인 시인이 쓴 시를 출간한 출판사를 압박하는 것은 월권인가?”, "아흔이 넘은 고은 시인께서 현역으로 신간 시집을 발간하면 추행을 하고 2차 가해가 되리라고 생각하는가?", "평생 농사만 짓던 농부가 범죄를 저질러 5년간을 복역하고 나와서 다시 농사에 종사하는데 주위에서 평생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은 범죄인가, 정의인가?" 노골적이고 편파적인 질문은 설문조사에 참여한 사람을 오히려 부끄럽게 만들었다.

 

지난달에는 배우 김히어라의 학교 폭력 논란이 있었다. 이 사건이 충격적인 건 해당 배우가 학교 폭력의 심각성을 다룬 드라마 ‘더 글로리’에 출연했기 때문이다. 한 피해자는 드라마에서 배우가 욕을 할 때마다 연기란 걸 알면서 그때 기억이 떠올라 괴롭히고 말했다. 

 

배우는 SNS로 학교 폭력을 한 적은 없다고 단언하였지만, 디스패치에 따르면 총 3명의 피해자를 만나 7번 사과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사에 따르면 피해자는 학교 폭력을 한 사실, 악의적인 피해를 끼쳤다는 사실 등을 인정하기만 바랐다고 한다. 공개적인 가해 부정, 수많은 2차 가해, 모함과 압박, 조롱은 피해자는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다.

 

바로 며칠 전엔 성추행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배우 한지상이 ‘더 데빌 파우스트’에 출연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에 관객들은 “비윤리적인 배우를 원하지 않는다”며 X(과거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공식 계정에 하차를 요구하는 글을 올리고 있다. ‘더 데빌 파우스트’의 시놉시스에는 “선한 인간은 어둠을 오래 견디지 못하여 결국 빛을 향하리니…….”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아무래도 성추행, 성희롱 등을 고발을 독려하던 운동은 확장되어 2023년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모양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한 명도 없다고, 세상에 완벽하게 선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너도 부처는 아니면서 왜 그렇게 위선적으로 구냐고 물으면 말이다. 위 세 사람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사람이 음주운전, 뺑소니, 마약, 폭행 등 다양한 사건으로 기사를 채운다. 

 

그러나 ‘나만 나빠?’ 논리로 나아가게 된다면 ‘나만 아픈’ 피해자는 어디로 가야 하나.

 

가슴과 눈가를 울리던 시는 피해자를 생각하면 더는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 학교 폭력의 고통을 말하는 드라마는 주제가 흐려지고 인간의 선함을 말하는 공연에 집중할 수 없다. 그렇게 삶과 궤를 함께하던 문화예술의 파편이 자꾸만 떨어진다.

 

내게 문화예술은 목발이고 도피처고 아름다움을 알게 해준 존재다. 지지대며 지표고 용기의 근원이다. 난쟁이이며 짱돌이며 더 작게는 바이러스로 우리에게 침투하길 바랐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면, 누군가에게 목발을 선사한 원인이며 도피하게 만든 이유라면 문화예술이 내게 주던 의의는 전부 사라진다. 그렇기에 보지 않으려고 한다. 뛰어난 문장도 감동적인 연기도, 마음을 울리는 노래도 소비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의 삶이 문화예술 그 자체는 아니지만, 문화예술은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과제에서 해방된 문화예술의 삶은 그저 오락이 된다. 물론 오락 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만, 외면하여 얻은 오락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으니 와즈다가 그저 자전거를 탔듯 나도 그저 추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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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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