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잊힌 몸, B의 역사 - 연극 '괴물 B'

글 입력 2023.10.18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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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음의 일이라 생각하는 것의 대부분이 사실은 뇌세포, 즉 몸의 영역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기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몸을 공유하지 않는 한 상대방의 고통에 공감하는 순간은 찰나일 뿐, 곧바로 밀려오는 내 몸의 부름(졸음, 배고픔 등) 앞에서 타인은 희미해져 간다. 직접 대면하는 사람의 고통도 그러하니, 뉴스나 기사로 접하는 누군가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내 몸을 스쳐갈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약 우리의 몸이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무작위로 바뀐다면 어떨까? 장애인이동권 보장 시위에 함부로 말을 얹기 어려울 테고, 키오스크 앞에서 불편을 겪는 노인의 이야기도 가벼이 여길 수 없을 것이다. 그 몸이 실제로 ‘되어보는’ 것만큼 강력한 공감은 없다. 몸을 공유해야만 비로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극단 코끼리만보의 연극 <괴물B>는 그런 상상에서 출발한다. 찰나의 공감을 넘어서 타인의 고통을 함께하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말이다.

 

 

 

B의 몸'들'이 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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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 폐공장으로 보이는 장소는 배달노동자인 연아가 배달과 배달 사이 짬이 날 때 쉬러 오는 비밀장소다. 혼자만의 아지트였던 이곳에서 연아는 스스로를 ‘B’라 부르는 미지의 존재와 조우한다. 사람도, 유령도 아닌 B는 노동자들이 노동 현장에서 잃거나 손상된 신체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신체 조각에서는 지나간 사고의 순간이 몇 번이고 재현되고, 그때마다 B는 엄청난 고통에 휩싸인다.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B의 여정에 연아와 관객이 합류하며 극이 진행된다.


왜 이름이 B냐는 질문에 그는 ‘정상’이라 할 수 있는 'A'에 대조되는 존재라 그렇다며 자조적으로 답한다. 그 말처럼, 기록된 역사와 기억되는 이야기가 A라면 B는 그 반대편에 있는 것들의 총체다. 우리나라 1인당 GDP가 과거와 비교해 얼마나 극적으로 증가했는지 말하는 자리는 많지만, 같은 기간에 몇 명의 노동자가 노동 현장에서 목숨을 잃거나 다쳤는지 말하는 자리는 드물다는 점을 떠올려 본다. 지난 몇십 년간 우리나라 ‘산업역군’들이 이루어낸 빛나는 성취 앞에서 산재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묻히곤 했다. B는 지금껏 우리가 외면해 온 오래된 이야기들의 증거이며 잊힌 몸의 역사다.


일제강점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노동 현장에서 다치고 병들고 죽는 사람이 늘 존재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는 기업을 상대로 산재 피해를 입증하기까지 과정이 험난할 뿐더러, 노동자 스스로도 개인의 책임으로 여기는 것이 속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미 생겨난 고통까지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 고통을 말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염원이 모여 B가 탄생했다. 그래서인지 B가 무대 위에서 표현하는 고통은 매우 생생하고 직접적이다. B는 산재 피해자들의 대신해 소리치고 아파하는 대변인이기도 하다.


B가 온몸으로 표현하는 고통이 산재 피해자의 심정을 직관적으로 전달한다면, 무대 위에서 인물 간 오가는 대사는 숫자와 법률로 덤덤하게 산재 피해자의 이야기를 전한다. 1953년 처음 제정되었다는 근로기준법부터 시작해 김용균법이 탄생한 이야기, 그리고 2021년부터 시행된 산업재해중대처벌법까지. 법률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늘 노동자의 희생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탄생한 법률에도 사각지대는 여전하다. 기사조차 되지 못한 개인의 이야기는 수없이 많을 것이다.

 

 

 

B와 연아의 연결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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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를 돕는 연아는 처음에는 B와는 완전히 관련 없는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 한창 우리나라에서 산업화가 진행되던 1960~80년대와 달리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많은 공장이 인건비가 더 저렴한 나라로 이전했다. 게다가 배달기사인 연아는 시간과 공간 제약 없이 ‘원할 때만 달리는’ 플랫폼 노동자다. 그가 산재를 자신과는 거리가 있는 ‘역사’로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연극은 연아가 현재 하고 있는 배달 노동을 돌아보며 연아와 B 사이 연결고리를 발견해본다.


연아가 일하는 배달 대행사는 원하는 만큼만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일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언뜻 보기에는 자유롭고 혁신적인 노동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사고가 나는 것도, 콜이 밀려서 항의를 받는 것도 배달기사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실제로 연극에서 연아는 따로 휴식시간도 없이 계속 울리는 콜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끼니 챙길 시간도 애매해 바나나 우유로 떼우곤 한다. 60,70년대의 공장노동자의 상황과 2023년의 연아의 상황은 완전히 다른 듯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 최근 들어 새롭게 생겨난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권을 보호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지만, 아직 많은 부분이 회색지대에 놓여 있다.


연극은 또한 연아의 노동을 이야기하며 산재의 범위가 직접적인 신체 손상에만 한정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몇 주간 연속으로 야근을 하다가 심장마비를 겪는 것도, 고객 응대 중 지속적인 폭언을 경험해 정신질환을 앓는 것도 산재다. 그러므로 임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라면 B의 몸 조각 조각이 가진 사연은 ‘남의 이야기’나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B는 달라질지언정 사라지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몸을 공유해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았던 고통이지만, 연극이 진행될수록 이 이야기가 그렇게 멀리 있는 일도 아님을 깨닫는다.


게다가 이야기가 진행되며 오래 전 사라진 연아의 아버지와 B의 연관성도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 아버지는 과거 파업 중이던 한 공장에서 사측의 비밀스러운 제안을 받고 노조 몰래 공장 출근을 택한 노동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 버스를 탄 것을 마지막으로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만다. 연아는 행방이 묘연한 자신의 아버지도 B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생각한다. 산재가 아니더라도 노동자로 살아가며 갈 곳이 없어진 사람, 다른 동료 노동자를 마주할 수 없어진 사람은 점점 존재가 흐릿해져 B같은 존재로 흡수된 것은 아닐까. 노조와 파업을 와해시키려는 교활한 수법을 썼음에도 여전히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으로 남아 있는 공장의 이름과, 흔적도 없이 사라진 B의 아버지가 대조적이다.

 

 

 

반복되는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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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몸을 구성하던 수많은 신체 조각의 주인은 대부분 사망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비명을 지르던 몸의 마지막 주인까지 눈을 감으면 고통과 함께하던 B의 지난한 여정도 끝이 날 것이다. 하지만 B 다음에는 스몰B가 있다. B를 형님이라 부르며 늘 붙어다니는 스몰B의 고통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연극 말미, 그가 자신의 몸 곳곳에서 발생하는 고통에 몸부림칠 때,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B가 있을까 가늠해보는 것만으로 아득해진다.

 

어떤 고통은 과거가 되지 못하고 영영 반복된다. 우리는 극장 밖으로 나와 현실에서도 수없는 스몰B를 만난다. <괴물B>의 한현주 작가는 2018년 구의역 참사와 태안화력발전소의 노동자 사망 사건을 생각하며 이 작품을 썼다고 전한다. 그리고 5년이 지난 2023년 이 리뷰를 쓰는 오늘, 많은 사람의 공분을 샀던 한 빵 공장의 끼임 사고가 난 지 1년이 지났다는 걸 관련 기사를 읽으며 알게 됐다. 이 연극이 내년이나 내후년 재연을 할 때, 그때의 관객은 지금과는 또 다른 이름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막막하지만, 우선은 무대 위를 가득 채우던 비명과 신음을 피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연극은 가동을 멈춘 폐공장 컨베이어 벨트 위를 죽거나 다친 노동자들이 무표정하게 서 있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이익을 뽑아내야 하는 부품으로 간주되었기에 일터에서 다치고 죽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컨베이어 벨트 위 사람들은 공장에서 막 만들어낸 물건 같다. 그러나 눈을 돌리지 않고 이들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면 이들에게서 저항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한다. 늘 노동자를 통제하던 컨베이어 벨트 위에 두 발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을까.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믿고 싶어진다.



사진: 촬영 김솔, 제공 극단코끼리만보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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