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일리야 밀스타인, 한 작품 안에 이야기거리가 와글와글 [전시]

일러스트레이터 일리야 밀스타인의 국내 첫 대규모 특별 기획전 - [일리야 밀스타인 : 기억의 캐비닛]
글 입력 2023.10.10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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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Evening in Soho, Summer 1983.jpg

Evening in Soho, Summer 1983ⓒ Ilya Milstein

그림 속에 앤디 워홀이 숨어 있다.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일러스트레이터 일리야 밀스타인. 그의 일러스트레이션 작품은 독특하고 독보적인 화풍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 워낙 다양한 브랜드의 커미션을 받고 콜라보를 진행해 왔기 때문에 SNS 등의 광고에서 몇 번 봤었을 수도 있다. 이번 전시에서도 LG전자, 구찌, 뉴욕 타임즈 등 거대 기업들과의 커미션 작품을 볼 수 있다.

 

나의 경우에는 작품들이 마틴 핸드포드의 <월리를 찾아라>나 에르제의 <땡땡TinTin>이 자연스레 겹쳐 보여서 더 친숙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같다. (실제로 땡땡이나 월리랑 똑같이 생긴 캐릭터를 그림 속에 의도적으로 넣은 것 같은 작품들도 보았다!)


전시는 일리야 밀스타인의 내면세계에 밀접한 작품으로 시작해서 더 큰 외부세계로 확장되고 자연에까지 이르는 구성이다. 관람객은 총 4부로 나뉜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전시는 단독 인물 혹은 2명이 등장하는 <1부 티레니아해 옆 서재>, 3명 이상의 인물이 등장하는 <2부 리비에라에서의 추억들>, 군중 혹은 번화가 등을 그린 <3부 1983년 여름 소호의 저녁>,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4부 캐비닛 속 분실된 초상화>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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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intners, ⓒ Ilya Milstein

 

 

일리야 밀스타인의 작품은 한눈에 봐도 느껴지는 따스함, 공간감 그리고 기가 막힌 색감과 패턴이 특징이다. 사실 그는 밀라노에서 태어나 호주 맬버른에서 자랐고, 뉴욕을 베이스로 활동 중이다. 따로 떼어 놓고 봐도 저마다의 특색이 뚜렷한 도시들을 3개나 거쳐온 셈인데, 신기하게도 그의 그림들에도 그 사실이 티가 난다. 작품들이 그가 거쳐온 지역들만큼이나 개성이 뚜렷하고 쨍하다.

 

또, 그의 작품은 유난히 영화 속 한 장면 같아 보이는 그림들이 많다. 그의 작품은 동영상이 아니라 그림이다. 그런데 동적인 그림이다. 작품 속 인물이 빠르게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던가, 주변에 햇빛이 반짝거리는 듯이 보인다던가, 배경이 왁자지껄 시끄럽다던가 한다. 분명 멈춰있는 그림인데 그 속에서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고 소리가 들린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셉션>에서 디카프리오가 앨리엇 페이지와 처음으로 꿈을 공유하는 장면이 있다. 파리의 테라스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가 꿈이라는 걸 인식하는 순간 주변의 다른 것들은 폭파되며 파편이 날리는데, 두 주인공만 그걸 쳐다보며 가만히 앉아있는 장면이다. 일리야 밀스타인의 작품은 그런 장면을 포착한 것 같이 그림에 스토리를 표현해서 앞뒤 상황이나, 그림 속 인물 하나하나의 행동을 유추하는 재미가 있다. 또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이는 그림들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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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Incident in the Vineyard, ⓒ Ilya Milstein

 

 

이번 전시는 시네필인 친구와 함께해서 서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더욱 즐거웠다. (그는 영화를 보면 아름답다며 꼭 눈물을 한 번씩 흘리는 사랑스러운 시네필이다)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의 원작자로 유명한 영국의 추리소설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를 주제로 그린 그림도 몇 점 있었고, 영화 <부다페스트 호텔>로 유명한 웨스 앤더슨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작품들도 많았다. 쨍한 색감 하며, 좌우 대칭을 이루는 배경, 패셔너블한 옷을 입은 인물들까지.

 

특히 [3부 1983년 여름, 소호의 저녁]에서 만나볼 수 있는 <과학의 정밀성에 대하여>라는 작품은 동명의 소설을 차용한 작품이었는데, 공간 배치가 신기해서 눈이 갔다.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 무절제, 쾌락, 탐욕, 폭력 등 인간 군상을 한 그림에 담아둔 그림이다. 자세히 보면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풀밭 위의 점심 식사'나 세계영화사에 중요한 영화인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 감독의 <전함 포템킨> 속 명장면(유모차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것을 몽타주 기법으로 담았다. 1925년 작)도 발견할 수 있었다.

 

친구와 그림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장면으로 보이는지 서로 신나게 공유했다. 어떤 작품은 친구와 나의 해석이 완전히 달랐다. 친구는 로맨스 영화 중 한 장면으로 보았는데, 나는 싸우는 장면으로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함께 하고 싶은 사람과 함께 전시를 관람하는 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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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migrants, ⓒ Ilya Milstein

 

 

위의 작품의 제목은 <이민자들>. 그림 속에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가 공존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마냥 행복한 일상만을 조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어두운 면도 함께 떠올리고 골똘히 생각할 거리들을 만든다는 점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이민 정책을 포함하여, 어린이 학대 사건, 예술사에서의 수동적 여성상 등을 조명하는 여러 작품을 전시에서 볼 수 있다.


일리야 밀스타인의 작품은 그림 하나에 소설 한 작품, 영화 한 작품이 다 녹아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한 그림이 담고 있는 스토리의 양이 이토록 방대하다. 신기한 점은 디테일이 그렇게 다양한데도 조잡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시에서 그의 인터뷰를 짧게 볼 수 있는데, 미드센추리 프랑코-벨기에 만화 스타일, 르네상스 시대 네덜란드의 세밀화, 그리고 일본의 목판화에서 영감을 받는다고 이야기했다. 그림이 조잡하지 않아 보이는 건 그 와중에 정돈된 구도와 경계가 뚜렷한 사물들 때문인 것 같다.

 

일단 한 작품 앞에 서면 3번 정도 감탄사를 내뱉게 된다. 처음엔 색감과 기분 좋음에 반해서 감탄하며 작품을 본다. 오? 그러다가 처음엔 안 보였던 요소가 눈에 들어온다. 1분쯤 뒤에는 엇! 저기에 이거 있어! 하고 또 새로운 요소가 보인다. 나처럼 상상이 특기인 이들이라면 더없이 신나는 작품 감상 시간일 것이다. 이러다 보니 그림이 내는 퀴즈를 맞히는 듯한 느낌까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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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ouple on the Floor of an Abandoned Church, ⓒ Ilya Milstein

 

 

마이아트 뮤지엄의 전시 공간은 몰입감을 위해 세심하게 기획되어 있었다. 특히 일리야 밀스타인의 작품을 훨씬 더 돋보이도록 만드는 벽 페인팅 색감이나 곳곳에 놓여있는 소품들 덕에 전시 내내 쾌적하고 기분 좋은 에너지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마지막 전시 공간인 <4부 캐비닛 속 분실된 초상화>는 심지어 인공 잔디가 깔려있어 자연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스토리 몰입형 오디오 가이드도 준비되어 있다. (어플 ‘큐피커’에서 3,000원에 만나볼 수 있다) 작품에 맞는 노래와 효과음 앰비언스가 흘러나오며 해설이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전시 후에 이어지는 굿즈 샵도 놓칠 수 없다. 소장하고 싶은 굿즈가 한가득이라 함께 한 친구도 나도 한참을 고민하다가 한가득 안아 들고 굿즈샵을 나왔다. 선물하기도, 개인적으로 소장하기도 좋은 굿즈가 많아서 꼼꼼히 봐야 한다. (개인적으로 포스터는 색감이 너무 탁해져서 나오는 것은 아쉬웠다.)

 

*


10년 전쯤의 나는 동화 속 캐릭터를 구상하거나 만화풍 그림을 그리는 것을 (몰래) 즐겼다. 당시 미래 희망 직업 수백 개 중 하나로 일러스트레이터를 생각하던 나는 돈벌이도 사회적 지위도 바닥이라는 어떤 이의 이야기를 듣고 괜히 쓰라린 맘을 움켜쥐었더랬다.


일리야 밀스타인의 이름 앞에는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붙는다. 난 전시를 보고 나오면서 일러스트레이터와 화가의 급을 나누며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던 그때의 그 사람에게 이 전시를 들이밀며 ‘세상은 계속 바뀌고 있다’고 소리치며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주고 싶었다. 그런데 속이 시원하기보다 씁쓸한 이유는 그때 그 사람의 이야기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만큼은 아주 틀린 말이 아니었다는 것 때문이다.

 

2015년 기재된 우리나라의 일러스트레이터 난나(가명)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보면 우리나라가 일러스트레이션을 어떻게 대우해 왔는지 대충 감이 잡힌다. 기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러스트레이터 난나는 17년간 삽화가로서 커리어에 정점을 찍었다. 그러고도 생계유지는커녕 재료비나 인건비조차 나오지 않는 턱도 없는 그림값에, 논술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병행해야만 했고 그러면서도 생활고를 겪었다. 게다가 ‘화가’나 ‘작가’가 아닌 ‘삽화가’에 대한 편견과 내려치기-에도 시달렸다. 그녀는 전업 삽화가로 살아남은 롤모델이 한국엔 있지 않다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유리, “어느 일러스트레이터의 죽음”, 한겨레, 2015-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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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야 밀스타인은 1990년생인데, 18살이 되기 전까지 2,000장이 넘는 만화를 그릴 만큼 드로잉을 즐겨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도 역시나 일러스트레이션이 현실적인 직업으로 이어질 수 없겠다고 생각하여 순수예술인 건축과 조각을 전공했다. 그런 그가 지금 이국의 땅 한국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를 보면서 문화예술의 양상이 계속 바뀌고 있다는 생동감과 거기에서 나오는 해방감까지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전시를 많은 이들이 즐기면서 일러스트레이션이 갖고 있는 잠재력과 소통 능력을 느껴봤으면 좋겠다.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일리야 밀스타인 : 기억의 캐비닛] 전시는 2024년 3월 3일까지 개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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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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