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향유자, 참여자, 생산자로서의 예술 [문화 전반]

글 입력 2023.10.07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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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향유자, 참여자, 생산자로서 예술을 접한다. 향유자로서는 클래식, 뮤지컬, 연극, 무용, 영화, 소설 등 다양한 종류의 예술을 감상한다. 참여자로서는 현대무용과 피아노를 취미로 하고 있다. 생산자로서는 영화도 제작해 봤고 꾸준히 글을 쓰기도 한다. 서로 다른 역할로서 예술을 접할 때 예술은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나에게 다가온다. 예술의 얼굴에 따라 나의 자세와 관점도 달라진다. 각자만의 매력도 있지만 고충도 있다. 이번 글에서는 세 가지 다른 역할로서 접한 예술의 다양한 얼굴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향유자로서의 예술 - 삶에 영감을 주는 동경의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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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자는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예술을 즐길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향유자는 돈을 지불하는 소비자이기도 하므로 예술을 마음껏 즐기고 평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좋은 예술은 향유자의 삶에 영감을 준다. 영감은 때로 구체적인 생각일 때도 있고, 그저 감정이나 느낌일 때도 있다. 무엇이든 답은 없다. 꼭 속속들이 분석하거나 해석하지 않아도 된다. 완전히 몰입하거나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향유자는 예술을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참여자나 생산자가 되어보면 향유자로서의 이런 권리가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 알게 된다.

 

향유자에게 예술은 약간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다.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을 잠시 벗어나 환기할 수 있게 해주고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이런 마법 같은 힘이 있는 예술을 만날 때마다 향유자는 예술이 가진 무한한 힘에 감탄한다. 이런 것을 창조한 예술가에 대한 관심도 생긴다.

 

적극적인 향유자는 미지의 영역이기만 한 예술을 좀 더 이해해 보기 위해 공부하기도 한다. 예술의 창작 과정이나 배경을 알아보고, 구조와 요소를 분석하는 법을 배운다. 예술가에 대해 아는 것도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알면 알수록 예술을 깊게 감상할 수 있게 되고, 더욱 사랑하게 된다.

 

 


참여자로서의 예술 - 동경하던 예술의 비하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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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을 정말 좋아하면 나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참여자가 된다. 나도 춤이 좋아서 현대무용을 배우기 시작했고, 음악이 좋아서 피아노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직접 춤을 추고 피아노를 치면서 접하게 되는 예술은 향유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우선 총체적인 모습으로만 접해온 작품의 세부까지 속속들이 알게 된다. 무용 동작을 배울 때도 몸이 어떻게 작용해야 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배운다. 어떤 동작들이 합쳐져서 하나의 안무가 탄생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음악도 듣기만 할 때는 모든 음이 합쳐진 하나의 곡으로서 즐겼다면, 실제 내가 피아노를 치면서 그 곡을 구성하는 선율과 리듬을 세세하게 보게 된다. 감상할 때는 잘 들리지 않았던 숨은 음들이 뒤에서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향유자로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작품의 구성과 요소를 이해하면서 그 작품에 대한 애정과 경외가 한층 더 깊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완성된 형태로만 접했던 예술의 지난한 탄생 과정도 체험해 보게 된다. 공연을 볼 때는 한없이 가볍고 쉽게 지나갔던 동작을 내가 직접 배워보면 어찌나 어려운지 모른다. 무용수처럼 가볍게 구르기 위해서는 반복된 훈련으로 단련된 코어 힘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음표가 많지 않고 템포도 느려서 쉬울 줄 알았던 곡도 실제로 배워보면 결코 쉽지 않다. (세상에 쉬운 곡은 없는 듯하다.) 수많은 음표 중에서 제일 중요한 음만 잘 들리게 하면서 내성도 놓치지 않고 살려내는 연주가 얼마나 어려운 건지 매번 느낀다. 그간 향유자로서 즐겨온 좋은 작품들 때문에 눈만 한없이 높아진 나는 연습실에서 자주 좌절하고 실망한다.

 

이렇듯 참여자로서의 예술은 향유자일 때보다는 좀 더 고되다. 그럼에도 내가 사랑하고 동경했던 예술의 비하인드를 알게 되는 것 같은 짜릿함이 분명 있다.


 

향유하는 사람보다 참여하는 사람이 그것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온몸으로 참여할 수가 없다. 혹은 온몸으로 참여하면 더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을 속속들이 싫어하고 낱낱이 사랑하게 된다. (…) 나는 피아노를 사랑하기 때문에 피아노가 두려운 것이다.

 

- <아무튼, 피아노>, 김겨울

  

 

‘속속들이 싫어하고 낱낱이 사랑’한다는 말만큼 참여자로서 예술을 대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는 말이 없을 것 같다.

 

 

 

생산자로서의 예술 - 창작의 고통 속에서도 타오르는 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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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자를 넘어 ‘생산자’가 되면 예술은 더욱 고달파진다. 여기서 정의하는 ‘생산자’란 예술을 창조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공유하는 행위를 하는 자를 칭한다. 나의 경우 영화를 만들거나 글을 쓸 때 생산자가 된다.

 

생산자가 되어보면 예술을 창조하는 과정이 생각보다 처절하고 의외로 단조롭다는 걸 깨닫는다. 무용수나 음악가는 머릿속에 있는 추상적인 예술을 실현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나날 동안 지극히 성실하게 습작과 연습을 반복한다. 글을 쓰는 일도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순간 떠오르는 영감으로 술술 써 내려가는 작업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한없이 빈 종이를 멍 때리며 쳐다보고, 지겹고도 지독한 퇴고를 수없이 거친다. 영화를 제작하는 일도 화려하고 재밌는 순간들이 많을 것 같지만, 그럴듯한 한 컷을 위해 하루 종일 수십 명이 단순 노동(혹은 ‘뻘짓’)을 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향유자일 때 접한 예술은 가끔 쉬워 보일 때가 있다. ‘저 정도면 나도 하겠는데’, 혹은 ‘나도 저것보단 더 잘할 것 같은데’하는 마음이 든다. 그러나 생산자가 되어보면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실감하게 된다. 향유자로서는 단숨에 쉽게 소화해 낸 분량이 생산자에게는 뼈를 깎는 고통과 기나긴 시간을 거쳐 탄생시킨 분량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생산자 모드일 때 가끔 향유자였을 당시의 내 오만했던 태도를 반성하기도 한다. 창조는 정말이지 생각보다 어렵다, 항상.

 

또한 생산자가 참여자와 달라지는 지점은 바로 ‘관객’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생산자는 필연적으로 소통의 의무가 생긴다. 아무리 높은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소통할 수 없는 예술이라면 생산자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생산자는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끝없이 저울질하며 스스로 생각하는 예술이 너무 대중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 자기검열과 자격지심의 늪에 빠지기 딱 좋다.

 

안타깝게도 생산자는 가끔 예술을 느끼는 걸 까먹기도 한다. 지난한 연습과 단조로운 루틴에 지치고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보면 정작 예술의 본질에서 점점 멀어진다. 너무 가까이에서 오래 들여다보면 사리 분별이 잘 안되는 것처럼 예술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만 같다. 순수하게 즐길 수 있었던 향유자와 참여자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일순간 생산자만이 느낄 수 있는 희열이 찾아온다. 머릿속에 어렴풋이 갖고 있었던 영감을 그대로 실현해 냈을 때. 나의 창조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나왔을 때. 이 희열은 고통의 시간에 비하면 찰나이지만, 너무도 황홀하고 경이로워서 그 순간을 위해서라면 영혼도 팔아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시간 대비 효율은 극악이어도 황홀경의 정도는 감히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되지 않아서, 예술가는 중독자처럼 또다시 예술을 계속하기로 마음먹는다.

 

*

 

예술의 향유자부터 참여자를 거쳐 생산자까지. 나는 요즘도 세 가지를 번갈아 가며 예술을 접하는데, 가끔 이것들이 뒤섞이며 혼란을 주거나 혹은 시너지 효과를 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후기를 남겨야 하는 향유라면 자세가 조금 달라진다. 그때부턴 생산자로서의 향유다. 예술을 맘껏 즐기기는 어려워진다. 이 예술을 통해 나도 무엇이든 뽑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매의 눈과 귀로 소재를 찾는다. 뭔가 아이디어가 생기면 그걸 잊지 않고 잡아두기 위해 그 후의 내용에는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향유자보다는 생산자의 책임이 더 크기에 이때는 생산자로서의 의무감이 향유자로서의 욕구보다 앞서는 것 같다.

 

참여자와 생산자로서의 경험이 향유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내가 직접 연주해 본 곡을 음악회에서 들어보는 경험은 색다르다. 악보를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 연주자가 어떤 음을 어떻게 강조하는지, 어느 부분을 얼마나 마법같이 연주하는지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또 영화를 제작해 본 사람은 영화를 볼 때 좀 더 분석적이고 전문적인 눈으로 감상할 수 있다.

 

반대로 향유할 때의 경험을 기억해 내는 것도 생산자에게 도움이 된다. 생산자는 자신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을 잃어버릴 때가 많다. 이럴 땐 향유자의 감각을 불러오려고 노력해야 한다. 향유의 경험 없이는 좋은 생산이 나오기 어렵다. 관객의 입장이 되어봐야 좋은 예술이 어떤 건지 좀 더 객관적인 눈이 생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고 찰리 채플린이 말했다. 예술에 가까워질수록 어쩐지 더 고달파지는 것 같다. 향유자일 때의 예술이 가장 순수하게 행복하고 즐거운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세 역할 모두 각자만의 방식으로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씩은 모두 접해볼 만하다. 예술을 깊이 이해하는 데 각각의 경험은 전부 유효하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장르를 좋아한다면 향유에서 멈추지 말고 참여해 보는 것. 그리고 어떤 분야든 생산자가 되어 예술을 창조하고 다른 사람들과 나눠 보는 것. 예술의 다양한 얼굴을 접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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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연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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