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실황의 맛 [공연]

아는 맛이 더 무섭다.
글 입력 2023.09.23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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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발전하면서 클래식 음악은 더 이상 옛날처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뛰어난 음질과 화질로 수많은 명연주를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만큼 들을 수 있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도 클래식 음악을 공연장에서 실황으로 감상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공연 예술을 실황으로 보는 맛은 장르를 불문하고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유독 클래식 음악을 실황으로 들어야 하는 이유만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클래식은 남다른 시각적 퍼포먼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장르처럼 아티스트가 관객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것도 아니며, 하다못해 프로그램도 대부분 이미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수없이 반복해온 낡은 레파토리인데. 대체 왜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공연장에서 클래식을 감상해야 하는 거냐고. 

 

이런 질문과 의심을 받을 때마다 클래식 팬은 속이 터진다. 이번 글에서는 클래식 실황의 매력에 대해 적어보고자 한다. 아는 맛이 더 무섭다고, 알면 알수록 더 헤어나오기 힘든 클래식 실황의 맛을 파헤쳐 보자.

 

 

 

전자음은 절대 구현할 수 없는 악기 본연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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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은 완전한 어쿠스틱 음악이다. 다시 말해 전자 장치의 도움 없이 오직 악기 본연의 소리만으로 연주하는 음악이다. 때문에 클래식 전용 콘서트홀은 악기만으로 모든 객석에 소리가 고르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전문 음향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은 야외 공간에서 공연을 할 때 빼고는 클래식 공연에서 마이크나 스피커가 사용되는 경우는 없다. (공연장에서 마이크가 보인다면 그건 녹음용이다.)

 

최고의 음향을 가진 오디오 장비도 악기에서 나는 어쿠스틱 소리의 울림과 질감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없다. 전자음으로 송출된 음악은 귀에 꽂히지만, 실황에서 듣는 클래식 음악은 직선으로 심장까지 내리 꽂히는 느낌이다. 악기의 진동과 음폭이 적나라하게 전달된다. 음파를 온몸으로 맞는 듯하다. ‘음표가 비처럼 쏟아진다’는 표현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클래식 음악을 제대로 듣기 위해선 실황에서 어쿠스틱 음악을 느껴봐야 한다.

 

 

하늘 아래 같은 무대는 없다


클래식 음악은 해묵은 레파토리를 반복하는 장르라는 사실에 반박의 여지는 없지만, 그렇기에 그날 그 아티스트가 어떻게 곡을 해석하는지 보는 재미가 있다. 같은 아티스트가 같은 곡을 쳐도 매 공연마다 다르다. 뮤지컬이나 연극을 ‘회전문’ 도는 팬들은 공감하겠지만 클래식 음악에서도 하늘 아래 같은 무대는 없다.

 

똑같은 음표와 박자가 적힌 악보를 보고 피아노로 치는데 뭐가 얼마나 다르겠냐 싶겠지만, 알면 알수록 정말 다르다. 가요 무대로 치면 가수가 같은 곡을 노래할 때도 컨디션이나 기분에 따라 애드리브를 넣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가수가 원래 음보다 한 옥타브 높게 부를 때도 있고 원곡에는 없는 랩이나 가사를 넣기도 하는 것처럼, 클래식 음악에서도 허용되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더 극적인 전개를 위해 옥타브를 내리거나 올리기도 하고 즉흥 꾸밈음과 반주 화성을 추가하기도 한다. 그 밖에도 곡의 템포, 셈여림, 페달, 강조하는 음 등 무궁무진한 요소에 변화를 줄 수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변주를 듣게 될 때는 ‘이걸 이렇게 친단 말이지’ 하면서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속으로 흐흐 웃게 된다. 변주를 알아채는 것은 실황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클래식 앵콜의 세계는 방대하다

 

클래식 공연에서 앵콜은 전적으로 연주자의 재량으로 선곡된다. 너무도 방대한 레파토리 안에서 앵콜곡이 무엇일지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앵콜은 언제나 신선한 놀라움을 안겨준다. 심지어 앵콜이 연주될 때까지도 무슨 곡인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이때문에 예술의 전당에서는 공연이 끝나면 그날의 앵콜곡이 적힌 “오늘의 앙코르” 표지판을 찍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리곤 한다.

 

슈만의 <트로이메라이>, 베토벤의 <비창 2악장>, 쇼팽의 <녹턴 9-2> 등 유난히 많이 연주되는 앵콜곡이 있긴 있다. 이처럼 보통 유명하고 짧은 소품곡이 앵콜로 연주된다. 혹은 본 프로그램의 흐름에 연결되는 곡을 연주하기도 한다. 예컨대 지난 6월 루체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을 협연한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앵콜곡으로 모차르트의 또 다른 명작 레퀴엠을 피아노 편곡 버전으로 연주했다. 이는 흔치 않은 모차르트의 단조곡을 본 프로그램으로 선보인 만큼 그의 또 다른 유명한 단조곡을 앵콜로 연주함으로써 모차르트의 어둡고 비극적인 면모를 확실히 강조한 게 아닐까 한다. 연주자의 고심과 애정이 담긴 앵콜은 프로그램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기도 한다. 

 

가요계에도 앵콜, 앵앵콜, 앵앵앵콜 등 본 프로그램 못지않은 앵콜 분량을 자랑하는 가수가 있듯이 클래식계에도 아예 3부에 가까운 분량으로 앵콜을 하는 아티스트들이 있다. 반면에 아무리 성원을 보내도 앵콜이 본 프로그램의 여운을 해치면 안 된다는 신조로 1-2곡 정도까지만 연주하는 아티스트도 있다.

 

앵콜의 분량에서도, 앵콜 선곡에서도 아티스트의 색깔이 들어간다. 앵콜이 단순히 공연 끝에 덧붙이는 서비스가 아니라 엄연히 공연의 일부분인 이유다.

 

 

 

클래식에도 있다, 보는 맛

 

클래식 공연 티켓팅을 하면서 시야가 좋은 자리와 음향이 좋은 자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나에게 누가 물었다.

 

“클래식은 어차피 들으러 가는 건데 시야가 뭐가 중요해?”

 

클래식 공연에는 대중음악 무대처럼 화려한 조명도 안무도 없지만 그에 못지않은 시각적 퍼포먼스가 존재한다. 클래식 음악도 엄연히 무대 퍼포먼스이기 때문에 실제로 연주자들도 어느 정도의 액팅을 의식하면서 연주한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음악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만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적절한 액팅은 음악의 감동을 극대화한다. 나는 피아노 공연을 좋아하기 때문에 피아니스트의 퍼포먼스에 대해 주로 설명해 보겠다.

 

피아노가 손가락으로 치는 악기라고 해서 피아니스트들이 손으로만 연주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피아니스트는 온몸으로 연주한다. 피아노는 사람 몸보다 훨씬 큰 악기이기 때문에 88개의 건반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온몸을 자유자재로 써야 한다. 음량에 따라 몸이 잔뜩 오그라들었다가 펴졌다가 한다. 있는 힘껏 피아노를 내리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거나 고개를 휙 젖히기도 한다. 아예 의자에서 엉덩이를 띄워서 일어나다시피 하거나 반동에 의해 발이 들썩일 때도 있다. 리듬을 탈 때는 고개나 어깨가 리듬에 맞춰 들썩인다. 말그대로 음악이 몸으로 시각화되는 느낌이다. 얼핏 피아노가 아니라 몸에서 음악이 나오는 듯도 하다.

 

피아니스트의 표정을 보는 재미도 있다. 때로 과한 표정은 감상을 방해할 수 있지만, 피아니스트가 음악에 완전히 빠진 표정을 지을 때만큼 숭고하고 아름다운 게 없다. 

 

그 밖에도 피아니스트마다 자주 나오는 습관이 있다. 어떤 피아니스트는 한 손이 연주할 때 다른 한 손으로 지휘하듯 공중에 곡선을 그리기도 한다. 또 어떤 피아니스트는 주먹이나 팔꿈치로 피아노를 내리치기도 한다. 연주하면서 입으로 옹알옹알대는 ‘허밍’도 있다. 실제 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피아노 연주에 묻혀서 소리가 들리진 않는다. 그래도 오물대거나 삐쭉 나오는 입을 볼 수 있다. 항상 ‘노래하듯이’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들이 몰입할 때 흔히 나오는 습관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발이 들썩이고 타악기 연주하듯 손을 마구 내리치는 파질 세이의 연주

리듬에 맞춰 입을 오물대는 것도 맘껏 볼 수 있다

 

 

물론 시각적 표현의 풍부함이 음악성과 직결되는 건 아니다. 아티스트마다 퍼포먼스의 정도나 종류가 다 다르다. 대체로 나이 많은 거장은 절제되어 있는 편이고 젊은 신예일수록 액팅이 더 풍부하긴 하지만 이것도 아티스트 개개인의 특징이자 색깔이다. 참고로 호로비츠는 움직임도 표정 변화도 거의 없는 피아니스트였는데, “음악은 내면에 있는 것”이라고 하며 피아니스트의 ‘연기’를 쓸데없는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 반대편에 극단적인 예로 랑랑이 있다. 랑랑은 화려한 퍼포먼스와 풍부한 표정으로 때론 평단과 대중의 혹평을 받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가 현재 가장 잘나가는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된 배경에는 이런 대중성과 스타성이 한몫 하지 않았을까도 싶다. 


표현이 과하든 거의 없든, 시각 퍼포먼스도 아티스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요소이다. 이를 생생하게 지켜보면서 음악을 감상하는 것 역시 실황의 맛이다. 

 

 

 

공연은 총체적 경험이다


모든 경험은 총체적이다. 그러니까 실황의 맛에는 공연 그 자체 외에도 공연을 보러 가는 길, 보고 나오는 길, 보기 전의 기대와 보고 나서의 회고 등 앞뒤 경험이 전부 포함된다.

 

클래식 공연을 앞두고는 프로그램 곡을 예습하는 시간이 필수다. 잘 몰랐던 곡과 작곡가를 알아가는 귀한 시간이다. 어느 정도 곡에 익숙해지면 공연에서는 어떻게 연주될지 상상한다. 공연이 다가올수록 쌓여가는 기대감을 만끽한다.

 

공연 보러 가는 길. 공연장 지하철역에서부터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같은 목적지로 향하는 인파 속에서 두근거리는 감정을 공유하며 걷는다. 나도 모르게 들려오는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오늘 공연을 보게 된 계기나 기대감을 엿듣는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보통 저녁 공연은 식사 시간 직후라서 식곤증에 취해 노곤한 상태로 공연장에 들어서게 된다. 공연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잠을 깨운다. 안내방송이 나오고 사람들이 서둘러 들어와 착석한다. 불이 꺼지면 관객석이 고요해진다. 기침 소리와 부스럭대는 소리만 남은 고요 속에서 무대 조명만이 서서히 밝아진다.

 

무대 정중앙에 거대한 검은 피아노가 영롱하게 빛나며 오늘의 주인을 잠자코 기다린다. 무대 입장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면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온다. 피아니스트가 성킁성큼 걸어나와 인사를 하고 피아노 의자에 앉는다. 박수 소리가 멎는다. 

 

숨죽인 고요 속에서 피아니스트는 정장 자켓 단추를 풀고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다. 마치 의식처럼 손수건으로 이미 깨끗한 피아노 건반을 다시금 닦는다. 계속된 적막. 눈을 감는 피아니스트. 그가 피아노에 손을 얹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는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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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특히 독주회에서 폭풍 전야와도 같은, 터질 듯한 긴장감이 감도는 이 순간을 유난히 좋아한다. 어떨 땐 어둠 속 수천 명의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내며 홀로 거대한 피아노 앞에 덩그러니 앉은 피아니스트에게 이 무대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일단 연주를 시작하면 절대 멈출 수 없기에 피아니스트는 더욱 신중하게 시작할 수밖에 없다. 피아니스트가 숨을 고르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이 시간 동안 관객도 감상할 준비를 한다. 그렇게 아티스트와 관객이 함께 주파수를 맞춘다. 

 

공연이 끝나고 난 후. 인파 속에서 잔뜩 들뜬 감정을 느낀다. 공연이 좋았을수록 시끌벅적하다. 주로 공연을 혼자 다니는 나는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엿들으며 공감하기도 하고,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기도 한다. 방금 전까지 같은 공간에서 숨죽여 앉아서 함께 공연을 만들어 간 사람들과의 동지애도 느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날의 공연을 회고한다. 좋았던 곡은 유튜브에서 다른 버전으로 다시 들어보며 곱씹어 보기도 하고, 같은 아티스트의 다른 곡을 찾아 들어보기도 한다. 매 공연 후에는 이런 식으로 아는 레파토리가 더 넓어진다. 공연 전에 내가 예상했던 것과 무엇이 달랐는지 생각해 보며 이 공연이 나에게 가져다준 변화를 깨닫는다. 때론 공연 직후 느꼈던 감정이 회고 과정 중에 변해서 공연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이처럼 공연 한 개를 관람하는 경험은 이 모든 과정을 포함한다. 직접 공연을 보러 극장에 가지 않는 이상 느껴볼 수 없는 총체적인 경험이다.

 

*

 

결국 모든 공연예술이 그렇듯이 실황의 맛이란 그 날, 그 현장에 내가 함께 한다는 현장감 그 자체다. 이 감각은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라 설명하기 매우 어렵다. 공연은 대개 시청각적인 매체지만 나는 실황의 맛에는 모든 오감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공연홀의 조금 퀴퀴한 냄새나 푹신하면서도 보드라운 좌석 시트의 촉감이 그것이다. 현장감은 굳이 설명하자면 그런 것이다.

 

또한 현장감은 여러 사람들과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감각이기도 하다. 스포츠 경기나 대중가요 콘서트처럼 계속 환호하거나 소리를 지를 수는 없지만, 클래식 음악 공연에서도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과 함께하는 감각이 있다.

 

이 과정에서 소위 ‘관크’라고 불리는 관람 방해는 피할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관크 역시 현장감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다. 대극장 기준으로 2,000여 명의 사람들이 함께하는 공간에서 기침 소리, 뭔가 떨어뜨리는 소리, 말소리, 핸드폰 소리 등이 하나도 나지 않는 것은 사실상 기적에 가깝다. 그날의 음악은 이 수많은 사람과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소음이든, 침묵이든, 그날의 관객은 공연의 참여자이기도 하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4분 33초 동안 아무런 연주 없이 그저 침묵만 흐르는 곡인데, 이 시간 동안 발생하는 모든 소음도 음악이 될 수도 있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현대 음악이다. 이 곡이 제시한 것처럼 관객이 만들어 내는 소리도 이날 음악의 일부라고 생각해 본다면 마음이 조금 너그러워진다.

 

지난 6월 루체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2부 앵콜곡 <님로드>의 완벽한 연주 직후 정말 작은 소음 하나 없이 완벽한 적막이 흘렀던 10초를 생생히 기억한다. 음악이 완전히 멎고서도 10초라는 시간은 꽤나 긴 시간이다. 나는 그날 기적을 경험했다. 매진이었던 공연에서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10초 동안 완벽한 정적을 만들어 낸 것이 기적이 아니면 뭘까. 의심할 여지 없이 이때의 적막은 <님로드> 연주의 일부였고, 관객들이 만들어 낸 음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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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미래학자들은 인터넷이 발명되면서 방구석에서도 양질의 영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세계 곳곳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여행의 수요가 줄어들 것이라 예측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상을 접한 사람들은 오히려 더 여행을 가고 싶어 했다. 이처럼 인간은 무언가를 ‘직접’ 하는 것, 그 시간에 그 현장에서 경험하는 것을 원한다. 

 

공연 예술도 마찬가지다. 현장감은 다양한 부분에서 종합적으로 느끼는 감각이다. 현재성과 물성만이 주는 특별한 감각. 이것이 존재하는 한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공연예술의 현장성은 영원할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피켓팅에 참전할 것이고, 공연장에 갈 것이고, 회전문을 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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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연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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