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빛나던 이들이 다시 돌아온다① - 뮤지컬 '시스터즈'

글 입력 2023.09.08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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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걸그룹 1세대'라 하면 199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핑클이나 S.E.S., 베이비복스를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걸그룹을 '아이돌'에 한정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다. 1980년대, 70년대, 일제강점기까지. '케이팝'이라는 단어가 나오기도 한참 전이다. 지금처럼 체계적인 연예 시스템도 없고 가수에 대한 인식도 지금과는 많이 다르던 시대, 오로지 끼와 열정으로 마이크를 잡고 무대에 오른 여성들이 있다.

 

지난 3일 개막한 뮤지컬 <시스터즈>는 우리의 역사 속 걸그룹 여섯 팀을 조명한다. 저고리시스터, 김시스터즈, 이시스터즈, 코리안키튼즈, 바니걸스, 희자매가 그 주인공이다. 오래된 영상 속, 또는 그마저도 없어 기록으로만 존재하던 이들의 무대가 뮤지컬 안에서 다시 한번 관객을 만난다. 2023년, 화려한 모습으로 돌아온 이들의 무대를 보기 전에 여섯 팀이 어떻게 세상에 나와 발자국을 남겼는지 간략히 소개해 본다.

 

 

 

최초의 걸그룹, 저고리시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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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레코드에서 발매된 이난영의 음반 [목포의 눈물/봄아가씨](국립한글박물관 소장)

 

 

1930년대, 나라의 상황은 암울했지만 서양 문물의 유입과 함께 신문, 라디오, 영화 등이 발달하며 이전까지 없던 대중문화가 곳곳에서 꽃폈다. 음악계도 마찬가지였다. 한쪽에서는 여전히 도제식으로 전통음악의 명맥이 이어지는 한편, 다른 한 쪽에서는 전속 작곡가와 작사가가 있는 현대적인 음반사가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이철이 설립한 오케레코드사도 그중 하나였다. 이철은 오케레코드사 가수들 중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여성들을 모아 팀을 하나 만든다. 이들이 바로 기록상 공식적인 팀명이 존재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걸그룹, ‘저고리시스터’다.


저고리시스터는 그 이름답게 무대에서 우리의 전통 의상인 저고리와 서구식 드레스를 번갈아 가며 입었다고 전해진다. 5~6인조를 유지하되 멤버는 계속 바뀌었는데, 당대 잘나간다던 가수들을 이철이 직접 스카웃한 만큼 개개인의 역량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룹의 주축이 된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로, 장세정은 '연락선을 떠난다'로 가요계에 한 획을 그은 가수다. 지금으로 따지면 뛰어난 기량의 여성 솔로 가수들이 모인, 일종의 프로젝트성 걸그룹인 셈이다.

 

저고리시스터는 조선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공연을 할 정도로 인지도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한국전쟁을 겪으며 유실된 자료가 많다. 영상은 물론이고 공식 음반도 발견되지 않아 어떤 음악을 했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유일하게 음원까지 남아 있는 곡 '처녀합창'으로 짐작만 해볼 뿐이다. <시스터즈> 넘버로도 등장하는 '처녀합창'에는 당시 10대 초중반 여성들의 평범한 일상과 고민이 담겨 있어 오늘날 걸그룹의 곡과도 연결되는 정서가 있다.

 

 

 

한류의 원조, 김시스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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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스터즈가 미국에서 낸 첫 앨범 [The Kim Sisters Their First Album] (1964)



 

제2차 세계대전과 광복, 한국전쟁까지. 예술 활동이 어렵던 시기를 지나 1950년대 중반이 되자 걸그룹의 명맥도 다시 이어지기 시작한다. 이 시기,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하며 가수들이 음악을 하는 새로운 환경이 생겨난다. 바로 미8군 무대의 등장이다. 본래 미군위문협회에서 파견한 본토 가수만 오르는 무대였지만, 당시 미군 클럽은 200개가 넘었기에 본토 가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자연스레 미8군 무대에 서려는 한국 뮤지션을 위해 오디션 시스템이 생겨났고, 오늘날의 연예기획사처럼 뮤지션과 클럽을 연결하는 용역 사업도 등장했다.


이런 환경에서 저고리시스터의 주요 멤버였던 이난영이 자신의 두 딸(김숙자, 김애자)과 조카(이민자)를 모아 3인조 걸그룹 ‘김시스터즈’를 결성한다. 1953년 첫 공연을 선보인 이들은 금세 미8군의 스타가 된다. 춤과 노래만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드물게 20여 가지 악기까지 직접 연주한다는 점이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1959년에는 소문을 듣고 한국을 찾은 미국의 음악 프로듀서 톰 볼의 제안으로 미국 진출까지 하게 된다. 아시아 걸그룹으로서는 최초의 행보다. 케이팝의 대선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낸 첫 앨범 [The Kim Sisters Their First Album]은 대성공이었다. 이후 김시스터즈는 1975년 은퇴할 때까지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발하게 공연을 펼쳤다. 기록상 이들의 가수 생활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녹록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미8군 무대에 처음 섰을 때 세 사람은 10대 초반에 불과했고, 미국에 건너가서도 낯선 문화와 언어로 고생한 일화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작은 나라에서 미국 진출에 성공한 걸그룹은 그 존재만으로 많은 사람의 자부심이었으리라 짐작해본다.




 

60년대 걸그룹의 대표주자, 이시스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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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스터즈의 첫 번째 독집 [WASHINGTON SQUARE](1964)

 

 

김시스터즈가 미국에서 한창 활동하던 1960년대에 국내에서는 새로운 히트 걸그룹이 탄생한다. 이시스터즈가 그 주인공이다. 당시 미8군 무대에 설 단원을 모집하고 관리하던 몇몇 프로덕션이 있었는데, 이시스터즈는 그중 프로덕션 화양 소속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학창시절부터 합창부였던 김천숙과 김희선(개명 전:김명자) 자매, 그리고 김천숙의 직장 동료였던 이정자가 합류해 3인조가 된 이들은 초창기에는 이시스터즈가 아니라 스와니 시스터즈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높은 고음과 조화로운 화음이 특기었던 스와니 시스터즈는 경쾌한 팝송을 주로 불렀다.

 

1960년대 들어 각 가정에 라디오가 보급되고 TV방송국이 개국했다. 미8군 무대에 서던 가수들은 이제 방송에도 출연하게 된다. 스와니 시스터즈가 이시스터즈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도 한 TV 경연대회에서 펑크를 낸 이시스터즈라는 팀을 대신해 출연하면서부터였다. 이후에도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쇼 세계의 휴일' 등에 출연하며 미8군 무대 밖에서도 인지도를 높여간다. 그리고 마침내 1964년, 첫 독집을 발매하고 타이틀곡 '워싱톤 광장'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다.

 

첫 히트곡인 '워싱톤 광장'은 번안곡이었지만, 이시스터즈는 활동 기간 동안 창작곡도 여럿 발표했다. 그중 '울릉도 트위스트'는 이시스터즈라는 이름은 몰라도 그 곡조와 가사는 익숙할 만큼 지금까지도 불리는 곡이다. 히트곡의 위상에서 알 수 있듯, 멤버들의 결혼과 출산으로 휴식기를 가지고 이정자가 탈퇴하고 새 멤버가 들어오는 등 여러 변화를 겪으면서도 이시스터즈의 인기는 굳건했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60년대를 풍미한 가수로 회자된다.



*기사는 '빛나던 이들이 다시 돌아온다②'로 이어집니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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