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는 타인을 얼마나 잘 알 수 있을까? [도서/문학]

알랭 드 보통, <키스 앤 텔>
글 입력 2023.08.31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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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연인 관계라면 서로에 대해서 가장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곤 한다. 상대방이 무엇을 저녁 메뉴로 먹고 싶어 하는지, 영화를 보고 어떤 감정을 느낄지 말하지 않아도 미리 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둘의 유대감과 관계의 깊이를 증명한다.

 

비단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타인과 서로의 존재를 증명하듯 자신에게 있는 이야기를 꺼내며 수많은 공란空欄을 채워나간다.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는 사실은 곧 그 사람과 우리가 친하다는 관계의 증명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타인을 낱낱이 알고 싶어하는 우리지만, 때때로 우리는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서조차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타인을 완벽하게 안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알랭 드 보통 또한 이런 의문을 가진 모양이다. 그는 전기의 형식을 일부 빌린 소설 <키스 앤 텔>을 통해 우리가 타인을 얼마나,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탐구했다.

 

 

 

'전기'의 형식을 빌려 타인을 이해하다  


 

소설 <키스 앤 텔>의 내용은 주인공과 이사벨의 연애를 다루고 있다. 화자는 이사벨이라는 여자를 우연히 만나 연인 관계가 된다. 그는 자신에 관해 관심이 없다며 이별을 통보한 전 연인을 떠올리며, 이사벨을 자세히 알고자 결심한다. 그리고 작가(화자)가 이사벨을 완벽히 이해하기 위해 선택한 매체가 바로 ‘전기’였다.

 

보통 흔히 만들어지는 전기는 위대한 사람의 위대한 업적을 위주로 흘러가는 한 편의 기승전결 이야기다. 하지만 화자는 이사벨에 대해 고찰하며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의미’ 있는 사건보다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에 주목했다. 그의 시선에서, 한 사람을 이해하고 결론적으로 그 사람에 대한 글을 작성하는 전기를 완성하려면 이와 같은 관점이 더욱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하찮은 행동이나 경향, 전에는 상징적이라고 여기지 않아 잊어도 좋다고 여기던 영역, 예를 들어 캔 음료를 마시는 방식이나 봉투에 든 초콜릿 건포도를 꺼내먹는 방식에도 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다. 사랑을 하던 사람이 뜨거운 감정의 소멸을 설명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리가 어떤 사람의 본질을 공적으로는 사소하다고 치부하지만 그럼에도 속으로는 핵심적이라고 여기는 것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112p

 

 

사실 타인을 왜곡 없이 바라보는 방식은 (우리가 유년기에 으레 위인전을 읽을 때 그랬듯) 위인전 하나를 앞 페이지부터 읽으며 어떤 삶의 궤적을 순차적으로 따라가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그것보다 사소한 사실에서 타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는 지인 중 누군가가 말끝마다 ‘아닐 수도 있어’를 붙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 누군가는 외식할 때 항상 중식 대신 일식을 선호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은 누군가의 인생의 흐름에 있어 결혼하거나 취업하고, 아이를 낳는 ‘중대한’ 사건보다 덜 눈에 띌지 모르지만, 그 사람의 인생을 이루고 있는 조각인 점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사실들이 우리가 남을 더 정확히 안다고 판단하게 만들기도 한다. 한 연예인이 몇만 명 앞에서 공연했다는 사실을 알기는 쉽지만, 그가 영화를 볼 때 어떤 팝콘 맛을 선호하는지, 잠을 잘 때 몸을 어느 쪽으로 뒤척이는지는 알기 어렵다. 단순히 중대하고 역사적인 업적을 안다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이해도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작가는 이사벨의 습관과 버릇을 탐독해 나가며 그녀를 입체적인 전기의 주인공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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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쉬운 언어로 타인을 정의하기


 

 

그러나 이 게임에는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모르면 모를수록 더 분명하고 알기 쉬운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강렬한 인물들은 대개 2차원적이다. (…) 따라서 가장 예민하고 지적인 전기는 종종 가장 약한 전기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308p

 

 

이곳에서 작가는 타인의 특징이 고유한 형용사나 명사의 형태를 갖추어 나열되었을 때 더더욱 그 사람을 납작하게 해석할 여지가 많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내가 머릿속으로 ‘탐욕스러운 사람’이라고 판단 내린 사람이 어느 날 자기 재산을 기부하는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충격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머릿속에서 결론 내린 그 사람의 성격은 하나의 키워드로 고정되어 있었고 그 사람의 행동이 우리의 전제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사람이란 모호하고 종잡을 수 없는, 하나의 모습만 갖춘 것이 아니라 수많은 면이 있는 존재다. 따라서 정제된 언어와 ‘어떤 종류의 사람’이라는 판단은 그 사람을 정확하게 보여주긴커녕 틀린 판단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완벽한 이해란 없다


 

300페이지 넘게 이사벨을 분석하고 관찰하던 화자는 과연 이사벨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더 정확한 전기의 방식에 대한 성과를 얻었을까? 화자는 소설 내내 ‘사람을 설명하는 데 있어 범해지는 다른 전기들의 오류’를 찾아냈지만, 자신도 완벽한 전기를 써내는 것에 실패했다. 이 사실은 이사벨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증명된다.

 

 
나한테는 나도 이해 못 하는 게 많아. 솔직히 말하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도 많고. 왜 너한테는 모든 게 그렇게 분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마치 사람들의 삶이 그 말도 안 되는 전기 안에 요약 정리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나한테는 나 자신도 납득할 수 없고 당연히 너한테도 납득이 안 될 괴상한 것들이 가득해. 331p
 

 

더 깊은 이해가 더 큰 사랑을 수반한다는 일반적인 논리에 따르면, 화자는 이사벨을 열심히 탐구하고 관찰했으니 응당 그 이해가 사랑으로 이어져야 할 텐데 둘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여기서 한 사람을 끝없이 생각하며 이해하는 전기와 같은 사랑이 옳다고 생각했던 작가와 그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던 독자들에게 새로운 관점이 제기된다.

 

어쩌면 타인의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며, 그와 별개로 모든 것을 안다고 해도 그것이 관계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이며, 이 모순을 걷어내고 분석한 타인은 결코 완벽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올바른 관계와 이해를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타인을 ‘완벽히’ 혹은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령 우리가 미리 판단한 특성과 어긋나더라도 그 사람의 모순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의 모습을 어떻게든 납득하기 위해 이유를 찾는 것보다는 이런 방법이 덜 완벽하더라도 우리의 관계에는 더욱 알맞지 않을까.

 

 

[박소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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