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의 정체성, 내 기억 속의 과일 조각 [사람]

글 입력 2023.08.30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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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한 사람의 정체성의 일부로 흡수되는 과정은 당연해 보이면서도 흥미롭다. 어린 시절부터 자주 먹는 식재료는 인근 지역에서 나는 것일 확률이 높고, 따라서 수 세대 동안 조상과 가족들이 즐겨먹어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서든 땅과 음식과 사람은 느슨하지만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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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rtesy the artist, Paula Cooper Gallery, Alison Jacques Gallery. Photo: Andy Keate, 2021

 

 

2022년 10월, 런던 해크니에 세 개의 거대한 과일 조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윈드러시 세대를 기리기 위해 제작된 이 작품은 카리브해 지역의 몬세라트 출신 작가 베로니카 라이언(Veronica Ryan)의 커미션 작업이다.

 

윈드러시 세대는 1948년부터 1971년까지 카리브해 국가들에서 영국으로 이주해온 이민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영국 이민 정책의 일환으로 대규모 이주를 해온 이들에게 정부는 제대로 된 체류 허가증을 내주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청소부, 잡역부, 운전기사 등으로 평생을 일했으며 의료 보험 등의 기본적인 혜택도 받지 못했다.

 

2018년 영국은 불법 체류자 퇴출을 앞세워 많은 이들을 추방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때 윈드러시 세대들이 들고 일어나 자신들이 이 땅에서 쌓아온 시간과 노력을 적극적으로 수호했다. 결국 정부가 사과와 보상금을 지급함으로써 윈드러시 스캔들은 일단락되었다. 캐리비안 이주민 세대의 거주 비중이 높았던 해크니 지역에서는 이들의 문화유산을 이어가려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Hackney Windrush Art Commission이 설립되었다. 라이언에게 커미션 작업을 맡긴 바로 그 기관이다.

 

베로니카 라이언은 1956년 작은 섬 몬세라트(Montserrat)에서 태어나, 고작 18개월이었을 때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녀가 10살쯤 되었을 때, 라이언의 부모님은 그녀를 데리고 잠시 몬세라트로 돌아가 그녀가 고향을 직접 느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 시기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곳의 땅, 자연환경, 음식 등을 온 몸으로 접했고, 그녀와 생김새가 비슷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며 뿌리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녀는 런던에서의 어린 시절을 시장의 풍경과 강하게 연관 짓는다. 특히 어머니와 함께 런던 Ridley Road Market에서 과일을 고르고 식재료를 구매하던 일을 자주 언급한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미대 재학 시절 우유갑이나 계란판, 과일 트레이를 이용해 빈 공간을 만들고 채우는 작업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안식처, 제자리에 대한 은유의 표출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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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작품 Niche, 사과 포장 트레이를 이용한 작업

 

 

그녀는 남성 위주의 조각 분야에서 쉽게 자신감을 얻지 못하다가 리서치 과정에서 알게 된 루이스 부르주아, 바바라 헵워스, 에바 헤세, 루이스 네벨슨과 같은 여자 조각가들을 롤 모델로 삼고 작업을 계속한다. 이후 부드러우면서 딱딱하기도 한 과일 및 씨앗을 활용한 조각이 점차 많이 등장한다. 라이언의 작업은 식물의 생김새나 구조물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많으며, 부드러운 생명력과 대를 이어 내려오는 정체성의 연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시 해크니의 조각 작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 여기에 등장하는 커스터드 애플, 브레드 프룻, 그리고 사워솝은 영국 토착 품종이 아니다. 라이언 또한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영국에서 보냈기에 늘 이 과일들에 둘러싸여 자랐다고 하긴 어렵다. 이 과일들은 사실 라이언의 어머니가 그녀를 임신했을 당시 자주 먹었던 것이라고 한다. 작가는 이전 세대의 경험과 기억이 자신에게 흘러내려와 정체성의 일부로 새겨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작품 커미션을 받았을 때, 그녀는 몬세라트를 생각하며 캐리비안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이 과일들을 모티브로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낯선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야 하는 이주민들에게 온기와 응원을, 위로를 빚어주었다. 묘하게 이국적인 생김새의 과일이지만 런던 광장의 한복판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으로써 디아스포라 또한 커뮤니티의 멋진 일원임을, 그리고 그들에겐 런던이 따뜻한 집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지난 한 달간 런던과 베를린을 여행하고 돌아온 친구를 어젯밤에 만났다. 그녀는 들뜬 목소리로 해크니가 얼마나 다양성이 넘치는 동네였는지 실감 나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런던 동쪽에 있는 이 동네가 어떻게 예술과 자연을 융합시키며 사람들에게 안식처로 기능하고 있는지도.

 

아직도 여행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 다른 정체성들이 교차하고 섞이는 그곳에 라이언의 과일들이 있는 것이 얼마나 절묘하게 아름다운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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