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화를 패러디하다 - 2023 산울림 고전극장 '이숲우화'

글 입력 2023.08.20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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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란 주로 동물이나 식물 등 인간 아닌 존재가 주인공으로 등장해 인간을 풍자하고 교훈을 주는 이야기를 의미한다. 우화라고 하면 <토끼와 거북이>, <여우와 신 포도> 등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이야기를 떠올리기 쉽지만, 우화의 뜻을 생각하면 지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우화를 만들거나 기존의 우화를 변형하는 일도 얼마든 가능할 것이다.


‘2023 산울림 고전극장’의 세 번째 작품 <이숲우화>는 창작집단 ‘우주도깨비’와 ‘보통현상’의 콜라보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솝우화>를 새롭게 들려주고자 한다. 일종의 패러디인 셈이다. 2023년에 연극으로 새롭게 보는 <이솝우화>는 어떤 모습일까. ‘짐승의 세계’라는 부제와 ‘그늘진 땅을 숲이라 한다면, 이 곳은 어리석은 짐승들의 세상’이라는 문구를 보며, 연극을 보기 전에는 다소 무겁고 사회 비판적인 작품이지 않을까 예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연극이 시작된 지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깨졌다.


연극이 시작되는 곳은 성공한 작가 이솝의 북토크 자리다. 성공한 작가라고 하기엔 어딘가 어설픈 차림새로 무대에 선 이솝은 다짜고짜 자신이 왜 글을 쓰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시작한다. 사연은 이러하다. 어릴 때부터 듣는 걸 좋아해 대학생이 되어서는 모든 수업을 들으러 다녔고, 그 과정에서 놓치는 말이 없도록 수업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녹음본을 빌려달라길래 그게 ‘이 수업이냐’ 되물었고, ‘이 수업이냐’를 반복하다 ‘이솝’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는 것.


앞으로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예고라도 하는 것 같은 이솝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허무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 ‘와장창’ 깨뜨린 배우들은 본격적으로 네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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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이야기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우화를 지금 시대에 더 잘 들어맞도록 비튼다.

 

<여우와 두루미>는 먹이를 먹는 방식이 다른 여우와 두루미가 번갈아 가며 서로를 골탕 먹이는 이야기였지만, 여기서는 사랑 이야기가 된다. 여우는 두루미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두루미가 두루미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과 같은 여우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쓰다가 뼈 아픈 결말을 맞는다.


<개미와 베짱이>에서는 운동으로 자신의 몸을 가꾸고 관리하는 것이 개미와 베짱이의 ‘일’로 등장한다. 강박으로까지 보일 만큼 몸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개미와 달리 운동은 식사를 더 맛있게 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베짱이의 관점이 흥미롭다. 그러던 베짱이 앞에 미의 여신이 등장하며 일장연설을 하기 시작하는데, 웃음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세 번째로는 오래된 부부의 이야기를 <토끼와 거북이>를 통해 펼쳐 보인다. 한쪽은 포유류, 다른 한쪽은 파충류인 데다가 사는 곳도 서로 다른 이들은 언제부터였는지 모를 대화 단절로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둘은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서로가 아니라 관객을 향해 독백처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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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세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역시 이 작품의 백미는 마지막 이야기인 <달에 간 까마귀>다.

 

배우가 짐승을 연기했던 앞 이야기들과 달리 여기서는 인간이 주인공이다. 등장하는 세 인간은 다름 아닌 연극을 만드는 일을 한다. 이들은 까마귀가 나오는 우화를 무대에 올리고자 한다. 문제는 공연이 코앞인데도 언어를 넘어선 소통을 하겠다는 연출의 변덕으로 모든 대사가 까마귀 우는 소리인 ‘깍, 까악’으로 바뀌었다는 것. 당연히 배우들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까마귀가 나오는 우화를 어떻게 관객에게 전달할 것인가를 두고 세 사람은 갈등하고 감정을 폭발시키는가 하면, 타협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대사와 행동, 감정선이 너무나 있을 법해서 객석에서는 공감의 웃음이 터져 나온다. 한 편의 공연이 만들어지는 지난한 과정을 그린 네 번째 이야기는 이번 공연 전체에 대한 패러디로 읽히기도 한다.


세 사람이 무대에 올리려는 이야기인 극중극도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반짝이는 것을 좇는 습성이 있는 까마귀는 밤이 되면 달빛 아래에서 빛나는 것을 찾으러 나온다. 하지만 사실 지상의 것이 빛나는 것은 달빛이 있기 때문. 즉 빛의 근원은 빛나는 것 자체가 아니라 달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흰 까마귀는 달을 찾으러 먼 길을 떠났지만, 막상 마주한 달은 빛나지도 둥글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다.


흰 까마귀의 경험담은 무대 위에서 연극 만드는 연기를 하는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 편의 연극을 올리려는 사람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애쓰지만, 그 의미가 창작자를 넘어서 객석까지 온전히 전해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계속할 수도, 그만둘 수 없는 지경에서 찾아오는 ‘이게 아닌데’ 싶은 순간들은 당사자에게는 역경이고 제3자에게는 코미디다.


그렇다면 까마귀가 나오는 우화를 무대에 올리는 일이나 산울림 고전극장에서 <이숲우화>를 무대에 올리는 일은 다 소용없는 일일까. 연극은 그렇게 냉소적인 결론을 내는 대신 세 사람이 우여곡절 끝에 서로를 이해하고 예술적인 순간에 도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침내 배우는 ‘깍, 까악’이라는 대사를 완벽하게 소화한다! 시종일관 웃다가 어쩐지 마음이 뭉클해지는 장면이다.

 

<이솝우화>를 2023년에 연극으로 무대에 올린다고 했을 때 많은 관객이 심오한 의미를 찾을 준비를 하고 왔을지도 모르겠다. 이 연극은 그럴 필요 없다고, 각자가 느끼는 대로 연극을 즐겨 달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다 보면 배우가 까마귀의 대사를 완벽하게 소화하던 순간처럼, 각자 <이숲우화>와 공명하는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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