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손끝에서 피어나는 빛바랜 아름다움 - ‘살랭의 은신처’ 살랭 작가

글 입력 2023.07.29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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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선으로 그려낸 꽃과 풀, 가구 그림에서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물씬 풍긴다. 문구 브랜드 ‘살랭의 은신처’의 첫인상이었다. 액자에 넣어 감상해야 할 것 같은 이 ‘작품’은 사실 떡메모지, PET 테이프 등으로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기도 하다. 귀엽거나 키치한 것이 대세인 문구계에서 살랭의 은신처는 귀엽지도 키치하지도 않은 독특한 콘셉트로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꾸준히 사랑받아 왔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문구계에 애정을 갖고 오래 지켜봐 온 사람으로서, 꿋꿋이 자기 길을 걸어가는 살랭 작가가 늘 궁금했다. 


은신처란 몸을 숨기는 곳을 의미한다. 트렌드에 민감한 문구계에서 자신만의 은신처에 머무는 것은 창작자로서 바람직하지 않은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귀중한 것은 숨겨진 곳에 있는 법. 지난 18일에 만난 살랭 작가는 은신처를 박차고 나오는 것만이 나를 표현하고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아님을, 은신처를 잘 가꾸며 사람들을 그곳으로 초대하는 방법도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가 정성스레 가꿔 나가는 은신처를 만나 보자. 

 

 

 

섬세한 선에 담아낸 중세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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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 안녕하세요. 현재 문구 브랜드 ‘살랭의 은신처(saleign’s lair)’를 운영하고 계시죠. 독특한 이름이라 눈에 띄었어요.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살랭’은 문구를 만들기 전부터 오랫동안 사용해 온 필명이라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되었어요. ‘은신처’는 ‘Lair’라는 영단어를 번역한 거예요. 서양에서는 주로 용의 은신처를 의미하는데, 대중성에 신경 쓰기보다 제 마음대로 만들어가는 브랜드의 성격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단어에서 ‘숨겨진 보물창고’ 같은 느낌이 나는 것도 좋았고요.

 

 

‘옛것의 섬세함을 선에 담아 기록하고 재해석하는 고아하고 화려한 이미지의 담지자’라는 브랜드 설명만 봐도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귀여운 게 대세인 문구계에서는 흔치 않은 콘셉트인데, 작가님은 왜 ‘옛것’에 매료되었나요?


저는 중세 수도사들의 손끝에서 탄생한 그림과 채식본을 좋아해요. 대량생산 기술이 등장하기 이전, 오랜 시간을 들여 한 땀 한 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낸 예술작품들이죠. 열심히 만들다가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장인정신이 마음에 들어요. 거기서 많은 영감을 받습니다. 저도 장인정신을 계승하고 그들의 고집을 닮고 싶어요. 

 

 

작가님의 섬세한 그림을 보면 당대 수도사들의 작업과 닮은 부분이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저는 주로 펜화를 그리는데 예전부터 고생을 사서 한다는 소릴 듣곤 했어요. (웃음) 그림을 그린다는 건 자기를 표현하는 일인 동시에 마음을 갈무리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수도사들의 활동과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살랭의 은신처 제품은 ‘삼월색조관찰’, ‘선연한 동경’ 등 독특한 이름과 함께 그 안에 각각의 이야기가 들어 있어요. 덕분에 제품 설명만 읽어도 재미있더라고요. 이런 아이디어는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제가 미술 전공이 아니라서 그림에 기초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보완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그럼 나는 이야기가 있는 그림을 그리자는 결론이 나왔어요. 초창기에는 제가 어릴 때부터 만들던 이야기에서 주로 아이디어를 떠올렸어요. 요즘은 다양한 콜라보레이션 작업과 외주 작업을 하며 영감을 많이 받아요. 내가 가진 이야기에만 집중하던 때를 지나 이제는 날이 갈수록 제 세계관이 커지는 느낌이에요.

 

 

세계관이 확장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경험을 하셨는지 좀 더 들어보고 싶어요. 


원래는 ‘학대 피해자의 살아냄’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고, 거기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어요. 그런데 제가 보고 듣고 배우는 게 늘어나면서 어느 순간 그 이야기에서 졸업해버렸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때까지는 세상을 고통 중심으로 인식했다면, 이제는 고통 외에도 다양한 것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거예요. 


예를 들어 제 부전공이 생명과학인데, 생명과학의 여러 분야 중 하나인 식물분류학을 공부하며 식물의 특성에서 영감을 받는 식이죠. 다른 작가님들을 보며 내가 몰랐던 표현 기법이나 마케팅 방법을 배우기도 해요. 지금 생각나는 건 사엘라 작가님과의 콜라보 작업이에요. 이분은 17~19세기 근대를 배경으로 한 그림을 많이 그리세요. 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시대인데, 함께 작업하며 많이 배웠습니다. 

 

 

 

나만이 그릴 수 있는 ‘옛것’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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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랭의 은신처 메모지와 스티커들로 살랭 작가가 꾸민 장면

 

 

문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신 건 언제부터였나요?


문구 작가로 활동하던 친구가 제 그림을 보더니 메모지로 한번 만들어보라고 하더라고요. 마침 시험 기간이라 공부 빼고 모든 일이 재미있었기에 덥석 해봤죠. 그게 히트를 쳤어요. 그때 깨달았어요. 아 그림은 취미로만 그리고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림으로 먹고살 수도 있겠다고요. 그림만 그리는 게 아니라 문구류나 리빙데코 쪽으로 가면 프리랜서로 일할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그림을 오랫동안 그리셨던 것 같은데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제가 고3 때 이런 말을 했대요. 나는 절대로 미술로 먹고살지 못할 거라고. 왜냐하면 굶어 죽을 거니까. (웃음) 스스로도 그런 생각이 강했고, 주변에서도 다들 미대 진학을 반대했어요. 제 눈에도 그림만 그려서 먹고사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더라고요. 그림 그리는 거 다음으로 관심 있던 게 예술철학이라 철학과에 진학했죠. 작품을 만들려면 어쨌든 내 세계가 있어야 할 테니 철학과가 도움이 되겠다 싶기도 했어요.

 

 

두 번째 전공으로 생명과학을 선택하신 것도 눈에 띄었어요. 철학과 생명과학은 다소 생뚱맞은 조합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다들 궁금해하시더라고요. 왜 철학과 생명과학인지. (웃음) 중세를 좋아하다 보니 그 시대의 식물 세밀화에도 관심이 생겼어요. 보태니컬 아트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는데 좀 더 찾아보니 둘이 다른 거였어요. 보태니컬 아트가 식물의 아름다운 부분, 특히 꽃을 그리는 그림이라면, 식물 세밀화는 해당 식물의 생애주기와 함께 그 식물의 꽃과 열매까지 포함되도록 그리는 그림이더라고요. 식물에 대한 전문지식이 필요한 분야였던 거죠. 


식물 세밀화를 좀 더 잘 이해하고 그릴 방법을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식물을 깊게 공부하고 싶어졌어요. 생명과학에 속한 식물분류학이 눈에 띄었고, 그래서 생명과학을 선택했습니다. 

 

 

전공과 현재 하시는 일이 관련 없을 것 같으면서도 연결되어 있네요. 전공부터 지금 하시는 일까지 흔치 않은 행보인데요, 작가님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에 대한 고민이나 불안은 없었나요?


저는 원래부터 매니악한 성향이 강하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브랜드를 꾸려 와서 그런지 말씀하신 종류의 고민은 별로 없었어요. 다만 내가 내 세계 안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은 있어요. 충분히 대중과 공명하고 있는가 자문하곤 하죠. 그렇다고 무작정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가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녹아 없어질 수도 있으니 거리 유지가 중요해요. 작가 정체성을 유지하되 대중과도 공명하며 활동을 지속해 나가는 게 과제입니다.

 

 

문구가 특히 대중성과 예술성, 상업성이 얽혀 있는 분야라서 관련된 고민을 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기도 해요. 


저는 대중에게서 너무 멀어지는 게 아닌가 고민하는데, 주변을 보면 너무 대중성을 좇는 게 아닌가 고민하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저는 대중성, 예술성, 상업성이 서로 완전히 대립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세 요소가 2차원의 벤다이어그램 형태가 아니라 3차원의 X, Y, Z축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봐요. 예술성과 상업성은 있지만 대중성이 없을 수도 있고, 대중성과 예술성이 있는데 상업성은 없을 수도 있거든요. 한 가지를 추구한다고 해서 다른 한 가지로부터 반드시 멀어지는 건 아니에요.

 

 

그럼 대중성이나 상업성 관련 고민 외에 다른 고민이 있다면 무엇인지 들려주실 수 있나요?


주제에 대한 고민이 있어요. 너무 옛날 것들에만 집착하는 건 아닌가. 어쨌든 제가 사는 시대는 현대니까 현대적인 것도 시도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요. 제가 그리는 풍의 그림은 중세 사람들이 이미 그려 두었어요. 막말로 구글에 검색하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중세 그림이 많은데, 직접 그 시대의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냐는 거죠. 그런 말을 다른 사람에게 실제로 듣기도 했어요. 


구글 이미지에 없고 나만이 그릴 수 있는 ‘옛것’은 무엇일까. 그러려면 그림에 나만의 현대적인 해석이 들어가야 할 텐데 그게 뭘까. 지금도 고민하는 중이에요. 제 예술세계를 쌓아가며 평생 계속되는 고민일 것 같습니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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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소품과 '살랭의 은신처' 마스킹테이프, PET 테이프들

 

 

작가님은 많은 사람의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를 책임지고 계시죠. 작가님 본인은 어떠신가요? 기록을 좋아하는지, 그렇다면 평소 어떻게 기록을 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기록하는 건 옛날부터 좋아했어요. 일기도 쓰고 블로그도 하고. 지금도 투두리스트를 강박적으로 쓰는 편이에요. 여담이지만, 저는 그림보다 글이 먼저였어요. 인터넷 카페에 글을 한창 올리던 시기가 있었는데 글만 쓸 때는 아무도 안 보다가 그림이 있으면 조회수가 확 올라가더라고요. 그래서 그림도 그리기 시작한 거죠. 그 나이 때는 사람들 관심이 고프잖아요.


기록을 좋아하고 많이 하다 보니 문구 덕질도 오래 해 왔어요. 만년필 같은 필기류 덕질로 시작해 종이에 빠지고, 그다음에는 잉크에 빠져서 500병도 넘게 모았어요. (웃음) 디자인문구를 처음 알고 충격을 받기도 했죠. 특히 일본 문구를 보고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었어요. 너무 예뻐서 이런 데다 어떻게 메모를 하나 했는데 제가 이제 그런 걸 만들고 있네요.

 

 

2018년 무렵부터 문구를 만들기 시작해 벌써 햇수로 6년 차입니다. 그동안 문구 시장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지난 시간을 돌아봤을 때 작가님께 터닝포인트였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두 가지가 생각나요. 첫 번째는 초창기에 만든 랩핑지. 그때까지 랩핑지는 대부분 모조지로 만들었는데 제가 처음으로 스노우지 제작을 시도했어요. 처음엔 말리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랩핑지가 엄청난 인기를 끌어서 한 쇼핑몰 해당 카테고리 1위에 오르기까지 했어요. 나중에는 스노우지로 랩핑지를 만드는 게 대세가 되었죠. 그때 일을 계기로 대중의 요구를 다 따르지 않아도 내가 소신 있게 작업하고 수요를 개척하면 된다는 걸 처음 느꼈어요.


두 번째는 2021년에 PET 테이프를 제작한 거예요. 대만 팬이 디자인 PET 테이프를 선물로 주며 제 그림으로도 한번 만들어보라고 하더라고요. 중화권에서는 PET 테이프가 인기라면서요. 그래서 제가 다짜고짜 대만 업체에 연락을 해서 만들었어요. 당시 우리나라 문구계에는 디자인 PET 테이프가 많지 않았고 있어도 퀄리티가 좋지 않았는데, 제가 한국 작가로서는 최초로 최신 기술을 사용한 디자인 PET 테이프를 만든 거죠.


그 제품이 또 히트를 쳐서 국내에 디자인 PET 테이프 제품이 많이 늘어났어요. 그 후로는 품목에 관한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씰스티커가 유행한다고 그걸 그대로 만들지 않아도 된다. 내가 트렌드를 만들면 되겠다는 믿음이 생겼죠. 해외 시장으로 시야를 확장하는 계기도 되었어요. 언어가 안 되니 어려울 거라는 막연한 마음속 벽이 있었는데, 번역해줄 사람을 고용하고 번역기를 사용하면 어떻게든 되더라고요. 세상은 참 넓어요.

 

 

지금까지 말씀을 들어보니 작가님은 엄청 적극적으로 길을 개척해가는 스타일이에요. 그런 성격은 타고나는 건가요?


전공과 관련이 있어요. 철학에서 니체를 배웠는데 니체는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초인’을 제시해요. 초인이란 정신을 단련해 인간의 한계와 불안정성을 극복한 자를 의미하죠. 거기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안 되면 되게 하고, 트렌드를 따르기만 할 게 아니라 트렌드를 만들 수도 있다는 걸 니체에게서 배웠어요. 물론 제 그림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해요. 실력이 없지 않으니까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죠.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철학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듭니다. (웃음)


철학 공부 좋아요. (웃음) 철학을 공부하면 인생에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닻이 생깁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작가님이 해보고 싶은 작업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지금 출판사와 계약 후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살아가는 법에 관한 책을 쓰고 있어요. 가을에 나올 예정이니 많이 기대해주세요. 12월에 있을 서일페에도 참가합니다. 그리고 곧 대학원에 진학해요. 거기서 무사히 살아남기가 목표입니다. (웃음)


작가로서는 지금보 다 더 많은 사람을 매료시키고 싶어요. 콜라보 프로젝트도 많이 해보고 싶고요. 무엇보다 저는 이 일을 하면서 롤모델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업계에 제 또래나 저보다 어린 분들은 많은데, 나이가 있는 여성이 생각보다 별로 없어요. 제가 열심히 해서 롤모델이 되고 싶습니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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