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PC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하여 [문화 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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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Political Correctness). 세계 미디어계에서 매번 어마어마한 논쟁을 몰고 다니는 이 단어는, 한국어로 해석하면 ‘정치적 올바름’이다. 사전적으로 이 PC는 약자에 대한 편견 섞인 표현을 지양하자는 신념을 의미하지만, 사실 현 시점에서 PC는 대부분 ‘약자를 지지하고자 하는 창작물 속 메시지’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된다. 이 PC의 물결은 할리우드 영화계 전반에 비가역적인 수준으로 퍼져나갔고,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트렌드로서 자리매김했다.
사실 영화의 함의나 메시지를 두고 사람들이 의견을 나누는 건 언제나 바람직한 일이다. 영화는 언제나, 영화가 끝난 뒤 관객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기억되고 의미화되는 법이니까. 그러나 PC 요소가 포함된 영화는, 종종 PC가 영화 전체에 대한 평가를 결정지어 버리게 만드는 효과를 낳곤 한다. 영화 자체의 만듦새가 아니라, 그 PC적 메시지를 지지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영화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뜻이다.
최근 개봉한 <인어공주>는, PC에 대한 이런 논쟁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대표적인 작품이다. 원작에서 ‘빨간 머리에 하얀 다리’를 가지고 있다고 언급된 인어공주 역에 흑인이 캐스팅됐다는 사실은, 인어공주를 모를 리 없는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모으기에 충분했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의 작품성은 미묘하다고 평가받았지만, 영화에 대한 비평 담론을 견인한 건 결국 인어공주가 흑인이라는 사실 그 자체였다.
현실에서 그래야 하듯 창작물에서도 약자를 적극적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과, 약자에 대한 존중이 창작물의 흐름까지 방해한다면 용납할 수 없다는 의견. 정치의 문제가 으레 그렇듯, PC에 대한 담론 역시 양측의 논리 다툼이 매우 치열하다. PC에 대한 논란은 어떤 양상을 띠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이 움직임에 대처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할 것인지 살펴본다.
PC 논란의 오랜 역사
PC에 대한 논란은 언제 처음 시작됐을까? 그 정확한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으나, 필자가 파악한 바로 PC가 본격적인 논쟁의 소재로 가시화되기 시작한 건 1989년 초연된 <미스 사이공>이다. 당시 이 작품은 아시아인을 백인에게 구원받아야 하는 나약한 존재로 묘사했다는, 다분히 백인 중심적 관점이 적용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미스 사이공> 제작진은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맞받아쳤으나, 이들은 ‘사회적 현실과 예술을 별개의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비판 여론의 형성은, 결국 약자에 대한 창작물의 세심한 시선의 필요성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아시아인들의 모습에 대한 상습적인 왜곡을 이제는 멈추라는 그들의 요구는, 당시 미국 내 아시아인들의 처지를 고려했을 때 지극히 타당해 보인다. 그렇다면 PC는 그 이후에도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았을까? 그랬다면 이 글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테다. PC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분명 필요한 사상이었지만, 그것을 주장하는 일부가 점차 독선적인 사고에 빠지게 된 게 문제였다. 가령 한 논문에서는 한국의 글쓰기 수업에서 한 여학생이 ‘<햄릿>은 여성혐오적 텍스트이니 공부할 수 없다’며 수업 자체를 보이콧한 사례를 제시한다(문형준, 2017).
논문의 저자는 이 일에 대해 여학생의 결기를 칭찬하면서도, 동시에 이는 PC주의의 이면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분석한다. 나를 힘들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아무리 위대한 작품이라도 수용할 필요가 없다는, 일종의 ‘자기애적 주관성’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극단적 PC주의자들은 그렇게, 종종 자신의 기준에 차지 않는 모든 창작물을 ‘혐오로 가득 찬 차별주의적 작품’으로 낙인찍곤 한다.
그런데 PC를 둘러싼 작금의 논란을 바라본다면, 이와 유사한 현상은 비단 PC주의뿐 아니라 반PC주의 진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일부 반PC주의자 역시, PC가 포함된 모든 작품에 대해 ‘정치이념에 미친 교조적인 작품’이라고 손가락질하곤 한다. 말하자면 PC주의자는 PC가 조금이라도 결여된 작품에 대해, 반PC주의자는 PC가 조금이라도 포함된 작품에 대해 ‘질려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데는,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PC적 요소가 삽입된 작품들이 점차 늘어나게 된 점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시대적 특성상 과거에는 PC가 결여된 작품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이에 이들을 비판하는 PC주의적 주장이 힘을 얻곤 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PC는 외려 영화 제작자들이 의도적으로 활용하는 소재가 됐다. 원작에 없던 소수자 중심 서사가 추가된 작품, 원작의 배역을 소수자로 교체한 작품, 퀴어 영화처럼 소수자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까지. PC는 더 이상 명백한 비주류가 아니었고, 그때부터 영화 속 PC는 개척해내야 할 새로운 가치가 아닌 도전받아야 할 기존의 이념으로 변모했다.
그렇게 논쟁이 흘러오다 어느덧 2023년 현재. 사람들은 PC적 요소가 들어간 작품이 나올 때마다 그를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팽팽히 나뉘어 대립하곤 한다. 때론 한쪽이 이기고 때론 다른 쪽이 이기니, 어느 쪽이 언제나 맞다고 말할 수는 없을 테다. 그렇다면 창작물의 일부로서 가능한 많은 관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PC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 걸까.
재해석이 PC를 만났을 때
PC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정의하려면, 결국 어떤 PC는 지지를 받았고 어떤 PC는 그러지 못했는지를 알아봐야 한다. 이 논의에서 우선적으로 이해해야 할 점은, PC에 대한 논란의 핵은 언제나 ‘부자연스러움’이라는 점이다. 단지 영화에 흑인이나 성소수자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 자체만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 물론 앞서 언급한 극단적 반PC주의자는 그런 비판도 일삼곤 하나, 그것이 범대중의 여론을 이끌어갈 정도의 호소력을 갖지는 못한다. 그러니 논란이 되는 PC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원작을 재해석한 작품에서 기존에 없던 PC적 요소가 추가되었을 때와, 재해석 여부와 관계없이 부자연스러울 정도의 PC적 요소가 포함되었을 때.
논란이 된 <인어공주>는 전자에 해당한다. 모든 논쟁을 차치하고서라도 안데르센의 원전 <인어공주> 속 에리얼이 적발의 백인이라는 점만큼은 분명하며, 그걸 백인으로 다시 한 번 시각화해낸 것은 과거의 디즈니였다. 그리고 디즈니가 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에리얼 역에 흑인을 캐스팅한 건, 최근 디즈니의 행보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 디즈니는 애니메이션 <모아나>와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마블의 <블랙 팬서>와 <샹치> 등을 통해 주인공 캐릭터의 저변을 다양한 인종으로 확대하려는 노력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네 개 작품들 중, 주인공이 흑인이나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논쟁의 대상이 된 작품은 없다. <모아나>의 주인공이 흑인이라고 디즈니를 비난하는 건, 한 치 의심의 여지도 없이 인종차별주의자가 맞을 테다. 논란이 된 디즈니의 PC적 행보는 이런 오리지널 작품이 아니라, <인어공주>의 흑인 에리얼, <피노키오>의 흑인 요정, <피터팬>의 흑인 팅커벨, <백설공주>의 라틴계 백설공주였다. 그리고 이런 인종 변경은 작품 전반에서 이뤄진 게 아니라, 마치 할당제처럼 한 작품마다 한 캐릭터씩 이뤄졌다.
이것을 인종적인 다양성을 어떻게든 확보해 보려는 디즈니의 노력으로 보는 시선도 있겠지만, 역으로 파격적인 캐스팅을 서사적으로 납득시키려는 노력은 오히려 부족했던 것 아니냐는 비판 역시 가해질 수 있을 테다. 매번 작품의 큰 틀은 바꾸지 않은 채로 일부 주인공의 인종만 바꾼다면, 그 의도는 참신하고 색다른 스토리를 만들기 위함이 아닌 정치적 메시지의 전달이라고 보일 수밖에 없을 테니. 결국 <인어공주>에 대한 평가는, 작품성 자체보다도 디즈니가 전달하려는 이 정치적 메시지에 동의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크게 나뉘어 버리게 되었다는 점이 아쉽다.
메시지의 타당성을 떠나 분명한 건, 디즈니가 이러한 캐스팅에 대해 폭넓은 대중들을 설득할 정도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점이다. PC는, 오리지널 작품에 삽입될 때보다 기존 작품을 변경해야 할 때 더 분명하고 명확한 이유를 필요로 한다.
부자연스러움의 경계는 어디인가
그러나 재해석 작품에 삽입된 PC 코드가 언제나 부담스럽다며 혹평받는 건 아니다. <인어공주>처럼 원작의 주요 캐스팅을 흑인으로 바꿨음에도 대중적 흥행을 거둔 사례도 존재하며, 원작에 없던 약자 중심 서사를 삽입했음에도 외려 호평만 받은 사례도 존재한다.
전자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브리저튼>이 있다. 명실상부 넷플릭스 최대 히트작인 이 시리즈는, 백인들과 흑인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영국 사교계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렇기에 여자 주인공인 다프네는 백인 여성이지만, 남자 주인공인 사이먼은 흑인 남성이다. 다만 이 이야기의 원작 소설에 흑인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으며, 사이먼은 분명히 백인이었다. <인어공주>와 동일한 ‘블랙 워싱(black washing)’이 여기서도 행해진 셈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블랙 워싱을 극에 자연스럽게 녹여내기 위해, 이야기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우선 흑인 왕비의 탄생으로 흑인들이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얻게 되었다는 가상의 설정을 부여해, 역사적 논란은 있더라도 하나의 서사로서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게끔 했다. 또 다프네가 사이먼에게 빠져드는 과정 역시, 흑인인 사이먼의 탄탄한 근육을 강조하는 클로즈업샷 등을 통해 설득력 있게 연출되었다. 결정적으로 이 드라마는 'bad guy'
처럼 누구나 알 법한 현대 팝송들을 관현악풍으로 편곡해 마치 중세 무도회 음악인 양 삽입하는 등, 이야기의 ‘역사성’을 깨트리는 데 있어 뻔뻔하면서도 재치 있는 설정들을 유려하게 활용한다. 결론적으로 이 드라마는 백인 왕자 특유의 소년미보다는 흑인 공작의 육감적인 몸매를 강조하는 편을 택했고, 결과는 훌륭했다. PC가 가미되어 있든 말든, 로맨스물에서 주인공의 감정선에 자연스럽게 이입할 수 있다면 그건 성공한 장르물일 테다. 외려 뻔한 신데렐라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는 이 드라마에서, 흑인 설정은 보는 재미를 한층 더해줄 매력적인 유인으로 작용했다.
성공적인 PC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사례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다. 30년도 더 된 작품인 <매드 맥스>를 원작처럼 두고 있는 이 영화는, 대표적인 PC 사상 중 하나인 페미니즘이 매우 강하게 반영된 영화기도 하다. 스토리라인은 착취당하는 여성들의 연대와 해방을 중심 소재로 흘러가며, 주연 배우와 감독들은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임을 분명히 했다. 기존 영화에서는 그런 의도가 거의 드러나지 않았으니,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PC 코드를 새롭게 삽입하게 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테다.
그러나 이 작품은, 평론가와 대중 모두로부터 호불호가 거의 없는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 이 내용이 PC인지 아닌지를 따지고 있을 이유가 없을 만큼 압도적인 액션의 쾌감을 선사하니, 관객들의 평가에서 PC 요소에 대한 왈가왈부는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그러면서도 ‘여성에 대한 착취는 나쁘다’는 명확한 메시지는 모두에게 전달되었으므로, PC 요소를 넣은 사회적 의미가 퇴색되지도 않았다.
이렇게 로맨스와 액션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장르에서, 원작에 없던 PC 코드를 넣고도 성공적인 결과를 거둔 두 사례를 살펴봤다. 두 사례가 말해주는 건, PC를 납득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열쇠는 결국 ‘장르적 재미’라는 점이다. 정말로 재밌고 의미 있는 작품이 PC 하나만으로 대중의 민심을 잃게 되지는 않는다. <인어공주>에 대한 비평의 담론이 PC에 의해 잠식되었다는 건, 역으로 영화의 작품성이 그 논란을 덮을 정도로 뛰어나지는 않았다는 걸 의미하는 셈이었다. 그러니 PC가 논란의 중심이 되는 건, 언제나 PC로 인해 작품의 만듦새가 전격적으로 훼손되거나 작품 자체의 장르적 재미가 미묘하다고 평가받을 때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다.
PC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혹여 문제가 될까 봐, PC 요소가 포함된 작품에 대해서는 감상평을 입 밖으로 내기도 어려워진 요즘이다. <인어공주>를 본 주변인들이 ‘재밌다’는 말도, ‘재미없다’는 말도 쉽사리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PC에 대한 논란이 얼마나 소모적이고 힘겨운 것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오히려 현실에서는 이야기를 꺼내기 어렵다 보니 온라인에서의 논쟁만 끝없이 격화되는 듯해,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분명히 해두고 싶은 건, PC가 포함된 작품이든 아니든 관객인 우리에게 작품에 대한 평가를 부담스러워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제작사들이 더 나은 작품을 만들도록 이끌 수 있는 건 언제나 관객들의 솔직하고 가감 없는 의견이다. 그러니 되려 밤낮없이 고민하고 끊임없이 부담스러워해야 할 주체는, 언제나 콘텐츠의 창작자여야 함을 말하고 싶다. PC의 결여 또는 과잉이 어떤 파급효과를 불러올지에 대한 제작사들의 신중한 논의가 매번 선행됐다면, 창작물 속 PC에 대한 논란이 과연 지금처럼 과열되었을까. 어쩌면 우리가 PC에 대해 이렇게까지 상반된 의견을 보이는 건, 그들이 PC를 창작물의 요소가 아닌 목적으로 바라보며 큰 고민 없이 작품들을 찍어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더 좋은 PC를 만들어낼 의무를 일단 창작자에게 맡겨둔다면, 관객들이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관객을, 비난이 아닌 대화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 오래도록 이 PC 논란을 지켜보며, PC에 대한 관객 개개인의 신념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렇다면 현명한 관객의 태도란, 결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관객을 ‘무식하다’고 깎아내리며 극단적 PC주의자/반PC주의자로 변해가는 걸 의미하진 않을 테다. 되려 그들의 존재를 받아들이되 나의 생각을 뒷받침할 지식과 경험을 차분히 쌓아가는 것이야말로, PC를 바람직한 길로 나아가게 할 성숙한 소비자의 자세가 아닐까 싶다. 궁극적으로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PC가 만연해지기까지, 창작자들이 필요로 하는 건 관객들의 지성 있는 지지와 비판, 그리고 대화일 것이라 굳게 믿기에.
[강민우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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